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57)화 (57/138)

“미친놈들이군.”

가감 없이 흘러나온 디무스의 중얼거림에 찰스가 헛기침했다.

“서신이 제대로 닿지 못한 것 같다면서 직접 확인하겠다더군요.”

“답을 보냈는데도 글자를 못 읽는 걸 보면 그 집안 인간들이 전부 시력에 이상이 생긴 모양이지?”

일관되게 같은 답장을 서너 번 보낸 것 같은데. 짜증스러운 디무스만큼이나 찰스도 퍽 곤혹스러운 얼굴이었다.

“말테 공작 영애가 직접 방문할 예정이니 준비해 달라고 당부해 왔습니다.”

“그래, 그래서 거절하겠다고 했는데 전혀 못 알아들었군.”

입술을 비튼 디무스가 짜증스럽게 신문을 노려보았다.

추기경의 방문 소식에는 추기경을 모시는 대표적인 귀족들의 이름도 실려 있었다. 말테 가문의 귀한 외동딸인 루지아 말테도 그 속에 껴 있는 이름 중 하나였다.

“겁도 없이 돌아다니다 총이라도 맞으면 어쩌려고.”

“추기경의 이번 방문은 평화 순례를 명목으로 하고 있습니다. 말테의 눈치를 보지 않더라도, 일단 순례단에 해를 끼치면 전 세계 교인들의 반발을 살 테니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하겠죠.”

“아, 그걸 믿고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가.”

실소를 흘린 디무스가 몸을 뒤로 물렸다.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그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내가 교단이 무서워서 문을 열어 줄 거라고?”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따지자면 루지아 말테는 멍청한 여자가 아니었다. 고위 귀족 가문의 딸답게 고등 교육을 수료했고, 핏줄에 대한 긍지도 높았다. 제 위치에 맞게 사람을 부릴 줄도 알고 권력을 누릴 줄도 아는 딱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하물며 토르스텐의 손꼽히는 대귀족 말테 가문이 아닌가. 평생 제 뜻대로 되지 않았던 일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디무스의 제멋대로인 태도와는 결이 달랐다. 그와 달리 루지아는 태생에서 비롯된 오만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번에 직접 오는 것 또한 그 오만함에 근거한 선택이리라.

덕분에 사고의 한계 또한 명확한데, 본인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겠지.

“똑같이 곱게 자랐는데 이쪽은 왜 이렇게 어리석은지 모르겠군.”

“…예?”

얼떨떨한 표정으로 디무스의 말을 곱씹던 찰스는, 조금 늦게 그 말을 온전히 이해했다.

“그, 말씀하신 김에 함께 보고드리겠습니다. 로이데스 양의 추가적인 조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찰스는 급한 소식을 전하느라 미뤄 두었던 보고서를 뒤늦게 디무스의 책상 위에 올렸다.

“부모는 수공예 기술자로, 주 고객층은 귀족들이었습니다. 형제는 여동생 하나뿐이고, 교류 중인 친인척은 없습니다. 유년기는 비교적 평범하게 보냈으며 클레망스 학창 시절 당시 평판은 모호한 편입니다. 졸업 후 양친을 여읜 뒤에 학교에서 맺은 인맥으로 가정 교사 일을 시작했고요. 업무 문제로 이사를 자주 다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 근무지들에서는 썩 좋은 소리가 없더군요.”

보고서를 훑어보며 찰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디무스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의외군.”

평판이 나쁠 여자는 아닌 것 같은데.

“학창 시절 평판은 왜 모호하지?”

“구설수에 좀 시달린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클레망스 기숙 학교가 남녀공학이기도 하고, 귀족의 비율도 높은 편이다 보니 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디무스는 상대로 하여금 어딘가 가학성을 부추기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런 감상이 비단 자신만의 것이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그런 분위기가 아니어도 객관적으로 두고 보았을 때 딱히 뒤떨어지는 외모가 아니고, 아마 학창 시절을 제법 성실하게 보냈을 것 같은 성격이니 누군가는 눈여겨보았으리라.

“이전 근무지에서는?”

“단기 교사직 때의 평판은 좋습니다. 그런데 입주 가정 교사로 근무했던 두 곳에서는 반응이 나빴습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찰스가 차분한 어조로 보고를 이어 갔다.

“카린 자작가에서는 자작의 큰아들을 유혹하려 했다는 이유로 쫓겨났고, 루세트 백작가에서는 지도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해고됐습니다. 루세트 백작가에서는 영애의 저조한 성적을 근거로 3개월 치 급여를 지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입주 생활비를 청구해서 마찰을 빚었다고 합니다.”

3개월 치라니. 모르긴 해도 리브에게는 상당히 큰 금액이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디무스는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보고서를 보았다. 보아하니 입주 생활비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한 듯한데, 결국 급여는 받지 못한 것 같았다.

“생활고에 오래 시달려 온 듯합니다. 귀족의 정부가 되어 한몫 단단히 잡으려는 목적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디무스가 리브에게 보이는 관심이 이례적이라는 걸 알게 된 후, 리브의 뒷조사를 좀 더 상세하게 해 오겠다고 자처한 찰스였다. 그는 생전 여성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인 적 없던 주인이 이렇게까지 공들이는 모습이 영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런 와중에 과거에 이런 추문을 달고 다녔었다니 자연스럽게 미심쩍은 마음까지 들었겠지.

찰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 눈에는 이 관계의 시작이 리브의 일방적이고 필사적인 노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일 테니까.

“그럴 성격이었으면 진즉 어디든 들어앉았겠지.”

태평하게 대꾸한 디무스가 보고서를 내려놓은 뒤 눈가를 가볍게 문질렀다.

“그나마 요즘 눈치껏 굴고 있으니….”

코리다와 함께 왔으니 섹스는 할 수 없다고, 유리온실에서 만난 그녀는 그렇게 에둘러 그를 거절했다.

억지로 눕히려면 그럴 수도 있었겠으나 디무스는 그러지 않았다. 섹스 한 번 했다고 애틋한 사이가 된 양 굴지도 않고, 특별히 더 새삼스럽게 달라지지도 않은 리브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자신을 앞에 두고 제 동생을 염두에 둘만큼 이성적이기까지 한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코리다의 존재를 언제까지고 묵인해 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그 정도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눈치껏 그가 원하는 행동을 해낼 수 있으리라.

“차라리 잘됐군.”

“네?”

“풍파 없이 곧게 자라기만 한 자존심은 사소한 일에도 쉽게 부러지는 법이야. 이참에 귀찮은 걸 좀 치워야겠어.”

찰스가 의아한 눈으로 디무스를 보았다. 디무스는 그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대신, 펜으로 신문의 한 지점을 톡톡 두드렸다. 검은 잉크가 점점이 묻어나는 자리에는 추기경과 순례단의 방문 날짜가 적혀 있었다.

신문에는 자세하게 적혀 있지 않지만 아마도 선발 순례단이 먼저 부에르노에 도착하고, 추기경이 며칠 여유를 두고 후발대와 함께 당도할 것이다.

“나에게 방문 요청을 한 날짜가 이날보다 앞섰으니, 아마 루지아가 추기경보다 먼저 부에르노에 들어올 예정이겠지.”

점점이 찍힌 잉크를 힐끗 본 디무스가 찰스에게 명령했다.

“루지아의 방문 날짜에 맞춰서 오페라를 예약해 둬.”

“…오페라요?”

찰스의 얼굴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었다.

“설마 면전에 대고…. 그랬다간 부에르노 내에서도 소문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언제까지고 숨겨 둘 생각은 아니었으니 상관없어.”

리브 로이데스의 얼굴을 내놓고 보여 주지 않아도, 그가 여성을 끼고 나타나면 그 자체로 온 시내가 떠들썩해질 터였다. 그러나 디무스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한두 번도 아닌 데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누구의 눈치를 볼 처지도 아니니까.

“게다가 소문이 난다고 해서, 딱히 문제가 될 게 있나?”

“물론, 없습니다. …후작님께는.”

찰스의 석연찮은 중얼거림을 귓등으로 흘린 디무스가 쥐고 있던 펜을 신문 위로 굴렸다. 잉크 몇 방울이 아무렇게나 튀어 글자를 적셨다.

디무스와 얽힌 여자가 리브 로이데스라는 게 밝혀지면 아마도 리브는 조금 귀찮아지겠지만… 알아서 적당히 잘 처신하지 않겠는가.

혹시라도 너무 성가시게 된 나머지 펜던스 남작가의 가정 교사 일을 그만둔다면 더 좋을 일이고.

“아, 그리고 보석을 좀 구매했으면 좋겠군.”

마땅히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한 그녀가 디무스의 그늘에 자리 잡고, 디무스는 새롭게 들인 수집품을 즐거운 마음으로 즐기면 되었다.

그는 귀한 수집품일수록 값을 아낌없이 치르는 편이니 그녀 또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으리라.

그들이 보냈던 첫날밤이 그러했듯.

***

리브의 얼굴을 보자마자 밀리언은 대뜸 비명부터 질렀다.

“꺄악! 선생님, 순례단 명단 보셨어요?”

“그래, 그래. 다들 그 이야기를 하더라.”

리브가 가벼운 어조로 대꾸했다.

굳이 신문을 찾아볼 필요도 없었다. 거리를 나가면 온통 그 이야기뿐이었으니까.

펜던스 남작가로 출근하는 내내 리브는 행인들로부터 귀에 딱지가 얹도록 몇몇 이름을 반복해서 들었던 참이었다. 그리고 지금, 밀리언의 입에서도 그 이름이 나올 기세고.

“말테래요, 말테! 세상에!”

“토르스텐을 향한 네 관심은 여전하구나.”

“토르스텐이 아니고 말테요! 바로 얼마 전에 파혼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그 주인공이잖아요!”

로맨스 소설의 신봉자인 밀리언은 연신 뺨을 감싸고 비명을 질렀다. 밀리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말테 공작 영애가 애틋한 사랑을 위해 정략결혼을 거부한 용기 있는 귀족 영애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였다.

게다가 말테 공작 영애는 벌꿀 같은 블론드를 가진 아름다운 여성으로도 유명했다. 아마 뭇 로맨스 소설들의 주인공이 되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테지.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세요? 카밀 선생님이 아는 분이 추기경님을 모신다던 거요. 그분이 글쎄, 말테 공작 영애와 절친한 사이라지 뭐예요! 순례단 명단에도 이름이 올라가 있다고요!”

이쯤 되니 카밀은 본인이 범상치 않은 신분을 숨기고 있다는 걸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어쩐지 놀랍지도 않은 그 소식에, 리브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분들이 이번에 펜던스 남작가에 머무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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