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54)화 (54/138)

그가 저를 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바라는 게 이런 것인지는 확신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수치스럽게 거절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런 기묘하고 근거 없는 확신을 했다.

또한 그 확신이 평소 리브가 그를 보며 은밀히 키웠던 성적 관심에 용기를 불어넣었다. 한 번이라도 자 보고 싶다는, 날것의 욕망. 그리고 예상대로, 그는 그녀를 안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격렬한 시간이었다.

떨어지는 욕실 물 아래에 서서, 리브는 잠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희고 깨끗하던 몸에는 흔적이 울긋불긋하게 남아 있었다. 사내의 커다란 손아귀가 남긴 손자국, 질근질근 깨물어 만든 울혈, 옷에 살이 쓸리며 생긴 가벼운 상처들.

그뿐인가? 허리 아래는 서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얼얼했다.

피부를 손끝으로 살짝 쓸어내리기만 해도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 감각이 조금 전의 일을 선명하게 되살렸다.

자극적이고 황홀한, 생전 체험해 본 적 없는 열락의 시간이었다. 그녀는 분명… 흥분했다. 성적으로 확실하게.

그 폭풍 같은 쾌락이 지난 뒤에 이토록 허무한 공허함이 남을 줄은 몰랐을 뿐이다.

몇 번이나 까무러쳤던 그녀와 달리, 후작은 파정하는 순간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 체액으로 더럽혀졌을지언정 끝내 벗어던지지 않은 옷가지 또한 그의 여유를 드러냈다. 물론 구겨지고 얼룩진 옷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짧게 혀를 차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몰골을 확인한 뒤, 곧장 방을 떠날 것처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바로 가지 않고 시가를 꺼내 물었다.

그때까지도 리브는 침대에 누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당분간 누드화 작업은 중단하라고 지시했네.”

테이블 앞에서 뿌연 연기를 뱉던 후작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리브는 지쳐서 일어날 기운이 없었으나, 누워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으므로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듣기는 했습니다.”

“그자가 어쭙잖은 미술 기법을 개발했다며 후원해 달라고 매달리던데. 그걸 거절하니 병이 났다고 하더군.”

역시 후작은 병이 났다는 브레드의 핑계를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 증거로 무심한 음성에 미미한 조소가 묻어났다.

괜스레 제 얼굴이 화끈거려서, 리브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브레드가… 성격이 급한 면이 있지만, 나쁜 의도로 그런 건 아닐 겁니다. 생각이 좀 짧지만 누굴 속이고 못된 짓을 할 정도로 성품이 악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요즘 사정이 좋지 않아서 무리한 바람을 가진 모양이에요.”

그냥 좀, 생각이 짧고 가벼울 뿐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얼마 전 씨근대며 돌아섰던 브레드의 아내를 떠올린 리브가 수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수도까지 올라갔다는 건 불안하지만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린다면 큰일을 당할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림 작업이 끝나지 않았으니, 후작에게 브레드를 어느 정도 두둔해 두는 게 좋겠지.

“그와는 무슨 관계지?”

나름대로 브레드를 대변해 보려던 리브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삐딱하게 선 후작이 리브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당연히 화가와 모델 관계죠.”

“단순히 그런 사이라기에는 그를 꽤 열심히 대변하는 것 같은데. 뭐가 더 있기라도 하나?”

두루뭉술한 질문이지만 함의한 내용이 명확했다. 울컥 치민 노기에 리브의 뺨이 붉어졌다.

지금 이렇게 흐트러져 있는 그녀의 꼴이 평소 헤프게 사람을 만나고 다녔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하물며 브레드는 유부남인데! 애초에 미혼이라고 해도 함부로 몸을 섞지 않았겠지만, 리브는 배우자가 있는 이와 놀아날 정도로 문란한 가치관을 가지지도 않았다. 후작의 저 가볍고 무례한 질문이 모욕적일 정도로 말이다.

“부에르노에 정착할 때, 사기당할 뻔한 걸 브레드가 구해 주었습니다. 사정이 어려운 제게 선뜻 부업을 제안해 주기도 했고요.”

비록 후작이 보기에는 별것 아닐 일이겠으나, 리브에겐 가슴을 쓸어내릴 만큼 큰 사건이었다.

“그게 전부인가?”

“그의 도움에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을 뿐입니다. 후작님께서는 제가 가벼워 보이시겠지만, 오늘 같은 일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단호한 리브의 말에 후작이 잠시 침묵했다. 그의 주변을 떠도는 시가 연기가 조금 짙어졌다고 느껴진 순간, 그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그건 듣기 좋은 소리군.”

리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디무스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돌아와 재떨이에 시가의 타들어 간 부분을 털었다.

“화가의 행실이 시원찮던데, 적당히 관심을 끄는 게 선생의 안위에도 좋을 것 같아.”

아마도 후작은 브레드가 요즘 의심스러운 사람과 어울리고 있음을 아는 것 같았다. 제법 친절한 그의 충고에 리브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말씀드렸다시피 그는….”

“괜히 그런 자를 도우려다 불필요한 화를 입으면, 가엾은 여동생은 어쩌나.”

그 순간 리브는 대화하고 있는 상대가 후작이라는 사실도 잊고 즉시 싸늘한 대꾸를 뱉었다.

“이 문제에서 코리다가 왜 나오나요?”

“저런, 선생은 그 화가와 얽힌 자들이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군.”

짐짓 안타깝다는 눈으로 저를 보는 후작의 모습에, 리브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조금 수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알아볼 생각도 없었고, 알아볼 재간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후작이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브레드가 무언가 질 나쁜 자들과 얽힌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처럼 적당히 방관할 게 아니라, 당장 그에게 경고를 해 주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러다가 험한 꼴이라도 당하면….

“선생에게 피치 못 할 사정이 생겼을 때, 여동생을 맡길 곳이라도 달리 있나?”

“…그런 건 아닙니다.”

후작이 다시 한번 코리다를 언급하자, 당장 브레드에게 위험을 알려야 한다는 마음이 쏙 들어갔다.

후작의 말대로였다. 괜히 오지랖을 부렸다가 행여 휘말리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브레드가 도대체 누구와 어떻게 얽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채무란 대개 지저분한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리브가 이미 충고했음에도 브레드는 리브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새삼 무언가 말을 더 얹는다고 태도를 바꿀 사람은 아니었다.

약간의 친분으로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리브에게 일이 생기면 건강하지도 않은 코리다가 살아남을 방도는 없으니까. 이제야 겨우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앞으로 고민해 보는 게 좋겠어. 괜히 그 화가의 모델이라는 이유로 선생까지 위험해질 수 있으니.”

무신경하게 말한 후작이 시가를 재떨이에 내려놓았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방을 나서려는 듯했다.

아마도, 리브의 질문이 없었다면 말이다.

“제가 위험해지면 방관하실 건가요?”

방문 앞에서 멈춰 선 후작이 리브를 느리게 돌아보았다. 그는 의외라는 듯 눈에 이채를 띄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는 후작을 향해 리브가 재차 말했다.

“그러지 않으실 거잖아요.”

“확신하나?”

“이미 그러지 않으셨으니까요.”

후작은 대답 대신 그녀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방을 나가는 대신, 그는 리브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마치 칭찬을 하듯 부드럽고 깊은 키스를 했다.

그러다가 점점 숨이 가빠졌고, 몸이 다시 뒤로 떠밀렸으며, 겨우 차린 기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왜냐하면 후작이 다시….

똑똑.

아련하게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머리 위로 흠뻑 쏟아지는 물을 얼른 잠근 리브가 황급히 준비된 수건을 들었다.

시간을 오래 지체하기에, 이곳은 후작의 저택이었다. 생전 이용해 본 적 없는 호화스러운 욕실에 서서 상념에 빠졌던 그녀는 얼른 이성을 되찾았다.

몸을 닦고 옷을 입기는 했으나 머리는 아직 젖어 있었다. 말릴 여유 같은 건 없으니, 리브는 일단 방으로 갔다.

후작은 이미 나간 지 오래였다. 그녀가 씻는 사이 하녀들이 다녀갔는지, 침대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환기를 위해 창문이 조금 열려 있기도 했다. 제 불긋불긋한 몸과 곳곳에서 느껴지는 격통이 아니었다면 전부 꿈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똑똑.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서늘해진 방 안 공기를 깊이 들이마신 리브가 방문으로 다가갔다.

달칵.

조심스럽게 문을 연 리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돌프 씨?”

“아, 로이데스 양. 실례인 줄 알면서도 급히 전할 게 있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축축하게 젖은 리브의 머리카락을 본 아돌프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사과했다. 리브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런데 급히 전할 게?”

“받으세요.”

빈 복도를 확인한 아돌프가 주머니를 꺼내 리브에게 건넸다.

“방에 물이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지금 하나를 먹으면 효과가 발휘될 거라고 합니다.”

“이게 뭔데요?”

“피임용 알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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