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51)화 (51/138)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조금 전 아돌프는 리브에게 ‘원하는 쪽으로 진행해 주겠다’라고 말했다. 정확히는 후작의 말을 전해 준 것이지만, 아무튼. 그 말은 코리다가 건강해질 수 있도록 어떤 방면으로든 지원해 주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몸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엉망이 아니라면, 코리다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완치할 수 있으리라. 이건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냥 네가 나보다 용감하다 싶어서.”

리브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을 용케 들은 코리다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용감한 게 아니라 언니 덕분에 별로 걱정하지 않는 거지.”

무슨 일이 생기든 리브가 곁에 있으니 어떻게든 잘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신뢰의 발로였다.

그래, 코리다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신뢰하고 있는데 우물쭈물할 수는 없었다. 리브는 침착하게 봉투를 뜯었다.

결과지는 생각보다 길었다. 간략하게 적혀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전반적인 상태를 상세하게 진단한 모양이었다.

현재 몸 상태는 물론이고, 지금 코리다가 보이는 증세가 어떤 문제로 인한 결과인지, 이를 방치할 경우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그동안 먹은 약이 어떤 작용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한계가 있는지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뭐래?”

끝없이 이어지는 긴 문장을 확인한 코리다는 몇 줄 읽지도 못하고 두 손을 들었다. 그녀는 본인이 읽기보다는 리브가 이를 보고 해석해 주길 기다리기로 한 듯했다.

코리다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고 한참 서류를 읽어 내리던 리브의 손이 마침내 마지막 장까지 닿았다.

“언니?”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까지 전부 눈에 담고서야, 리브는 자신이 긴장감으로 인해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길게 한숨을 뱉은 그녀가 코리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치료하지 못할 병은 아니래.”

“정말?”

“응, 거의 완치할 수도 있을 거래.”

이 결과지에 의하면, 코리다의 병은 ‘스커비베리’라는 이름으로 명명한다고 했다. 정확한 명칭이 생긴 지 채 3년이 지나지도 않았으며, 아직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나 병의 진척도에 따라 완치에 가깝게 치료할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여져 있었다.

“그간 먹은 약이 아예 헛되진 않았었나 봐.”

다음 진료 때 먹고 있는 약을 챙겨 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증상을 보아 생활 습관과 식습관 전반을 검토해야 한다는 당부도 쓰여 있었다.

이대로라면 악화하여 사망에 이를 수 있으며, 아마 먹고 있는 약은 그저 병이 깊어지는 속도를 조금 늦추는 정도의 작용만 하고 있을 거라는 말도.

다만 리브의 우려대로 코리다의 지금 상태는 작은 충격으로도 뼈가 쉽게 부러질 수 있고, 출혈도 남들보다 쉽게 날 것이라고 했다. 아마 일상적인 생활을 하려고 하면 채 반나절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테니, 당장 치료를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도 했다.

“네 몸이 약한 건 맞다네. 그러니까 몸 상태가 좋은 것 같아도 함부로 외부 활동을 하진 말래.”

“윽, 진짜?”

리브는 질색하는 코리다에게 친절하게 문장을 짚어 주었다. 어깨를 늘어뜨린 코리다가 실망스러운 눈으로 서류를 보았다.

“그래도 불치병은 아니라니 다행이잖아.”

“나 정말 건강해질까?”

“아돌프 씨가 그랬다며. 실력이 아주 좋다고.”

무턱대고 피부터 뽑아 보자던 과거의 경험에 비하면 지금의 이 결과지는 무척 신뢰도가 높았다. 진찰을 받을 당시 말하지 않았던 세세한 증상까지 전부 파악해서 적어 둔 것만 보아도 그랬다. 적어도 제대로 된 병명을 명시했다는 점에서부터 차이가 있었다.

물론 병명이 생긴 지 3년도 안 되었으니, 과거 진료를 본 돌팔이 의사는 아예 병의 정체도 몰랐겠지만.

“건강해질 거야, 코리다.”

늘 불확실한 희망을 이야기했던 리브지만,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장담할 수 있었다.

코리다는 건강해질 것이다. 이제는 정말로,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

리브가 첫 추가 근무를 할 때, 그녀는 건드리면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잔뜩 긴장해서 굳어 있었다. 디무스는 아직도 그때의 그 우스운 꼴을 기억했다.

그래서 지금, 들뜬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리브의 모습이 더 신기했다. 여동생의 진료 결과가 나왔다더니, 내용이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 문제가 아니어도… 리브는 이제 디무스의 앞에서 마냥 굳지 않았다. 그녀가 내비치는 감정은 좀 더 다채로워졌고, 풍부해졌다.

“의사를 소개해 주신 건 후작님이시니까, 보여 드리는 게 맞지 않을까 싶어서 가져왔습니다.”

조심스럽게 진료서를 내미는 그녀의 얼굴에는 은은한 홍조가 서려 있었다.

진료서 내용은 궁금하지 않았으나, 디무스는 선뜻 그것을 받아 들었다. 장황하게 적혀 있는 내용을 대강 훑어본 그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트루드 박사는 디트리언 가문 소유의 저택 외에는 방문하지 않아. 그러니 앞으로 치료는 이곳에서 받도록.”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돌프 씨가 말하기를, 진료비는….”

“박사는 어차피 내 주치의니 필요 없네.”

딱 잘라 말하자 리브가 멈칫하며 입술을 다물었다. 그녀의 반응을 빤히 보던 디무스가 진료서를 테이블 위에 툭 던지며 물었다.

“아니면 굳이 청구하길 바라나?”

오랜 시간 몇 푼에 얽매여 살아온 습성 탓일까? 뭐든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주제에, 리브는 도통 까닭 없는 물질적 지원을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루비 목걸이를 주었을 때도 단칼에 거절했었지. 얼렁뚱땅 옮긴 집의 집세도 꼬박꼬박 납부하고 있다고 했다.

의사를 소개해 주는 것까지는 용인하면서도 진료비를 대납해 주는 게 싫다니.

디무스는 어렵지 않게 리브의 사고를 짐작했다. 자신이 동정받고 있다는 걸 적나라하게 확인하기 싫은 것이리라. 나신으로나마 돈을 벌지언정, 거지처럼 동냥하진 않겠다는 쓸데없는 자존심이었다.

“진료비 몇 푼이 내게 큰 부담이라도 될까 저어되나?”

“…물론 그럴 리는 없죠.”

“돈이라는 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법이네. 남에게 공짜 돈을 받는다고 삶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아.”

리브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얼핏 그의 말에 수긍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디무스는 그녀가 좀처럼 동의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관자놀이 부근을 검지로 꾹 누르며 삐딱한 눈으로 리브를 보던 디무스가 이내 입매를 비틀었다.

“정 불편하면, 나를 즐겁게 해 봐. 대가는 그것으로 하지.”

“어떻게요?”

“그걸 나에게 물으면 어쩌나? 선생이 알아서 할 문제지.”

다 무너졌다고 생각했는데, 리브의 속내에 여전히 견고한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되자 디무스는 급격하게 지루해졌다.

손대기 전부터 흐물흐물하게 구는 것들은 딱 질색이지만, 제법 공을 들여 아껴 주어도 뻗대는 이 역시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인내심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굳이 참아 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디무스의 표정이 심드렁하게 변한 것을 리브 역시 눈치챈 듯했다.

난처한 얼굴로 고민하던 그녀가 힐끗, 문가를 돌아보았다. 애초에 오늘의 만남은 추가 근무를 위한 것이었고, 때문에 지금 이 방에는 그녀와 디무스뿐이었다.

새삼스럽게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한 그녀가 단정하게 묶여 있던 옷깃 리본을 잡았다. 얇은 싸구려 공단 리본이 스르륵 풀어졌다.

추가 근무를 하면서, 리브는 늘 디무스가 ‘벗으라’는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그 행동은 이 모든 시간이 ‘추가 근무’라는 걸 암묵적으로 규정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디무스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제 옷을 벗고 있었다.

리본을 풀고 첫 번째 단추를 풀 때까지만 해도 머뭇거리던 리브는, 심호흡과 함께 좀 더 거침없이 옷을 벗었다.

카라코, 페티코트가 아래로 툭툭 떨어지며 쌓였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를 따라 리브의 몸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평소 그녀가 옷 한 벌을 벗을 때마다 일일이 그것을 접어서 한쪽에 고이 모셔 두었던 걸 생각하면, 지금의 모습은 분명 다르게 다가왔다.

디무스는 검지로 윗입술을 느리게 문지르며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푹신한 소파가 그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투박한 겉옷을 벗고 속옷 차림이 된 리브가 문득 시선을 들었다. 녹색 눈동자가 디무스를 빤히 응시했다.

시선을 마주친 채로, 리브가 속옷 끈을 당겼다. 꽉 조여 있던 가슴골이 느슨해지며 흰 유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보기 좋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던 가슴이었다. 살집이 적당히 있어서 옷을 벗을 때마다 살짝 출렁거리곤 했는데, 정면으로 보니 유독 그 움직임이 도드라졌다.

숨을 크게 쉬느라 리브의 가슴이 눈에 띄게 들썩였다. 다소곳하게 드러낸 제 봉긋한 가슴을 손끝으로 스치듯 훑으며, 리브의 손이 아래로 향했다.

스타킹을 고정하고 있는 낡은 가터벨트의 클립이 미세한 쇳소리를 내며 풀어졌다. 그에 따라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멜빵이 아래로 늘어지고, 한껏 당겨져 있던 스타킹도 느슨해졌다.

얇은 스타킹은 금방이라도 찢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해진 상태였다.

아마도 조금만 힘주어 당기면, 형편없이 조각나지 않을까?

손쉽게 찢어질 스타킹의 감촉을 떠올리자 입 안이 말랐다.

혀로 입술을 축인 디무스가 긴 다리를 꼰 채 팔걸이를 지지대 삼아 턱을 괴었다. 갈증을 없애기 위해 술을 마실까 싶다가도,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취기로 인해 명료한 정신이 해이해질 게 영 마뜩잖았다.

벨트를 푼 리브가 얇은 스타킹을 아래로 밀어냈다. 스타킹이 위에서부터 동글동글하게 말려 내려가자, 가려져 있던 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디무스가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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