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50)화 (50/138)

“코리다 양과 비슷한 나이입니다.”

오늘 그는 리브를 만나러 왔으나 집에 있는 사람은 코리다뿐이었다.

언니의 당부 때문에 집 안으로 초대할 수 없다며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한 코리다는 대신 차를 가지고 나왔다. 덕분에 아돌프는 마당에서 차 대접을 받는 중이었다.

“아저씨네 딸도 학교는 못 다녀요? 집에만 있으면 엄청 심심한데, 데려오셔도 돼요. 저랑 놀면 되잖아요!”

“…지금은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어릴 때 아팠던 거라서.”

그 말에 코리다가 크게 탄성을 터뜨렸다.

“와, 그럼 다 나은 거예요? 아저씨 딸도 저 진찰해 주신 그 의사 선생님이 고쳐 주셨어요?”

“그분은 아니고….”

있지도 않은 딸에 대한 설명을 이어 가기 어려워서, 아돌프는 차라리 말을 돌리기로 했다. 어차피 코리다와도 언젠가 한번 대화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으니까.

“그보다 코리다 양은 학교에 다니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까?”

아돌프의 물음에 코리다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학교 못 다녀요.”

언니가 없으면 외출도 못 하는 코리다였다. 당연히 학교생활은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 사정을 보아하니 완치는커녕 하루하루 건강이 악화하지 않기만을 기도하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뻔히 그걸 짐작할 수 있으면서도, 아돌프는 모른 척 말을 이었다.

“건강해지면 말입니다. 거트루드 박사는 실력이 좋아서 곧 코리다 양을 건강하게 만들어 줄 겁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염두에 두어야지 않겠습니까.”

“…건강해지면요?”

눈을 동그랗게 뜬 코리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기억을 더듬어 가며 말했다.

“우리 부모님은 수공예 장인이셨어요. 엄청 높은 귀족들도 부모님한테 의뢰했을 정도로 실력이 좋았대요. 저는 잘 모르지만, 언니 말에 의하면 정말 대단하셨다고 했어요.”

가벼운 어조로 말하던 코리다가 문득 아돌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눈을 가늘게 뜬 그녀는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저도 부모님처럼 엄청난 기술을 가지고 싶어요. 그래서 그 기술로 귀족들의 의뢰를 잔뜩 받아서 부자가 되는 거예요.”

아돌프는 본능적으로, 리브가 이러한 코리다의 속내를 알지 못하리라는 걸 예상했다. 늘 자신을 과보호하는 언니에게 이런 속내를 털어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돌프는 코리다에게 ‘너무 집에만 있으면 좋지 않으니 마당 산책이라도 해라’라는 권유를 한 전적이 있었다. 당연히 리브보다는 제 말을 잘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

순간 눈을 번득인 아돌프가 태연한 표정을 꾸미며 질문했다.

“기술이라…. 특별히 생각해 본 게 있습니까?”

“음, 자수도 좋고, 목공도 좋고, 가죽 같은 걸 다뤄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코리다가 눈을 반짝이며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었다. 아마도 머릿속으로는 수십 번 상상해 본 모양이었다.

아돌프가 그녀를 향해 빙긋 웃었다.

“로이데스 양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군요.”

“오, 맞아요….”

반짝거리던 코리다의 눈에 빛이 사라졌다. 다시 시무룩해진 코리다를 힐끗 본 아돌프가 차를 음미하며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유명한 수공예 장인이었다니, 그렇다면 분명 코리다 양에게도 재능이 있을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네. 베리워스 저택의 서재에 관련 서적이 아주 많으니, 다음에 가면 저와 함께 찬찬히 둘러보고 관심 가는 걸 찾아보죠. 후보군을 좁혀야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도 좋으니.”

코리다의 진료서에 뭐라고 쓰여 있든 치료는 시작될 것이다. 앞으로의 진료를 생각하면 베리워스 저택은 코리다가 자주 방문하게 될 장소였다.

아돌프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짓던 코리다가 이내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뭘 공부하든 돈이 들잖아요.”

코리다는 가장 노릇을 하느라 밤낮없이 일하는 리브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당사자였다. 심지어 리브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원흉이기도 했다. 지금도 약한 몸뚱이로 부담을 지우고 있는데, 괜히 공부하겠다는 소리를 하며 더 큰 금전적 부담을 만들 수는 없었다.

코리다의 걱정을 알아들은 아돌프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각오했던 것보다 대화는 더 원활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많은 인재를 위해 후견인 제도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후견인을 잘 구한다면 코리다양도 언니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후견인이요?”

“그래요. 특출난 수공예품은 예술품에 가까우니, 충분히 후견인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분야를 지원하고자 하는 사람도 많고요. 특히 마주르칸이 그쪽으로 유명합니다. 유명한 수공예 장인들도 많이들 유학을 가는 나라죠. 치안도 아주 훌륭하고.”

집에만 붙어 있는 코리다라고는 해도 인근 나라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때문에 코리다는 그게 어디냐고 묻는 대신,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마주르칸은 멀잖아요.”

“하지만 교육 과정이 탄탄하니, 기왕 공부할 거라면 그런 안정적인 곳에서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정말로 수공예에 뜻이 있다면요.”

코리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다른 대답을 하진 못하고 있지만,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진 게 겉으로 표가 날 정도였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귀띔해 주는 겁니다만, 내가 마주르칸에 아는 분이 있습니다. 수공예 장인을 양성하는 데에 노력을 아끼지 않는 분입니다. 만약 생각이 있다면 연결해 주겠습니다.”

아돌프의 말은 사실이었다. 마주르칸은 옆 나라인 토르스텐보다도 먼 곳이지만, 수공예 물품이 크게 발달해서 유명한 장인을 배출하고 있는 나라였다. 그리고 각국에 적절한 인맥을 가지고 있는 아돌프는 마주르칸에도 좋은 인맥을 두고 있었다.

고로 코리다가 정말 수공예에 뜻이 있다면, 얼마든지 후견인을 소개할 수 있었다. 코리다의 재능이 마주르칸의 전문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 정도라면 장차 어딜 가든 대접받는 장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건강해져야겠지만요. 그러니 부디 거트루드 박사의 치료를 잘 따르기 바랍니다.”

아돌프의 당부에 코리다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네!”

희망에 찬 코리다의 얼굴을 보자, 아돌프는 그답지 않게 조금 더 커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러면서 내심 기도했다.

정말로 최선을 다해 좋은 후견인을 연결해 줄 테니, 얼른 나아서 문제없이 제 언니를 떠나 주길.

그리하여 이 난감한 상황이 어서 끝나길.

***

리브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코리다와 아돌프는 절친한 친구나 다름없는 꼴로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어? 언니!”

“왜 나와 있… 아돌프 씨?”

기운 없이 대문을 열고 들어오던 리브가 아돌프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돌프가 얼른 몸을 일으키며 빙긋 웃었다.

“아, 금방 돌아올 예정이시라기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언니에게 드릴 게 있으시대!”

얼떨떨한 눈으로 코리다와 아돌프를 번갈아 보던 리브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아돌프는 굳이 지체할 이유가 없다는 듯, 곧장 가져온 것을 내밀었다.

그것은 서류 봉투였다.

“거트루드 박사에게 전달받은 그대로 들고 왔습니다. 당연히 내용은 읽지 않았고요. 주인님께서도 내용을 모르십니다.”

아돌프가 건네는 것이 코리다의 진찰 결과지라는 걸 깨달은 리브가 딱딱한 얼굴로 서류 봉투를 받았다. 내용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티를 내려는 듯, 봉투 입구가 단단히 봉인된 게 보였다.

봉투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리브의 얼굴을 슬쩍 살핀 아돌프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로이데스 양이 원하는 쪽으로 진행해 주겠다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원하는 쪽이라면 정확히 뭘 말씀하시는 거죠?”

“무엇이든요.”

막막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그의 대답에 리브는 그저 침묵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임무를 다한 아돌프가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코리다 양, 기다리는 동안 말 상대를 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코리다의 배웅을 받으며 아돌프가 몸을 돌렸다. 리브 대신 대문 단속을 한 코리다가 슬금슬금 제 언니의 곁을 맴돌았다. 거트루드 박사가 준 것이라는 말만으로도 코리다가 이 서류 봉투의 정체를 유추하기는 충분했다.

“그거 내 진찰 결과서 맞지? 응?”

“응, 그런 것 같아.”

한숨과 함께 대답한 리브가 집 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코리다가 그 뒤를 졸졸 따라가며 조잘거렸다.

“얼른 뜯어 보자. 응?”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 줄 알고.”

“뭐든 적혀 있겠지.”

진찰받기 전까지만 해도 잔뜩 겁먹었던 걸 모두 잊어버린 건지, 코리다는 마냥 궁금하기만 한 얼굴이었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서류 봉투를 보는 코리다의 모습에, 리브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나쁜 말이 적혀 있지는 않을까 무섭지는 않아?”

“그 여자 선생님 실력 엄청 좋대. 아까 아돌프 아저씨가 그랬어.”

아돌프와 친해진 코리다의 모습을 좋게 보아야 할지 가늠되지 않았다. 그는 분명 나쁜 사람 같진 않았지만….

아니, 이런 고민이 다 무슨 소용일까.

리브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돌프가 후작의 보좌관인 이상, 좋든 싫든 그를 마주하는 날이 많을 터였다. 기왕 자주 만나야 한다면 데면데면한 것보다야 친한 게 낫지.

“이건 그냥 진찰 결과일 뿐이야. 치료는 시작도 안 했고.”

“그럼 결과에 따라서 치료를 시작하면 되잖아.”

걱정이 많은 리브와 달리 코리다는 태평하기만 했다. 리브가 대답 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자, 코리다가 뒤늦게 인상을 찌푸리며 질문했다.

“혹시 치료받는 건 안 도와주시겠대? 그냥 진찰만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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