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49)화 (49/138)

오늘도 브레드의 작업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심란한 눈으로 잠긴 문을 응시하던 리브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몸을 돌렸다.

“당분간 그림 작업은 진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화가의 건강이 몹시 나쁜 모양이더군요.”

누드화 작업의 중단을 알려 주러 온 아돌프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리브는 브레드의 건강이 나빠졌다는 말을 도통 믿을 수 없었다. 그 말을 후작이 믿었다는 것 또한, 믿기지 않았다.

후작이 그간 리브에게 관대했던 건 사실이지만, 리브는 그게 아주 이례적인 태도라는 걸 알았다.

아무리 보아도 후작의 성정은 절대 유순하지 않았고, 가난한 화가의 건강 사정까지 살펴 줄 정도로 세심하지 못했다. 차라리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며 벼르고 있으면 모를까.

브레드를 만나 경고라도 해 주고 싶은데, 며칠째 작업실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작업실 문 아래에는 수거하지 않은 우편물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마지막 만남에서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뭐였더라.

‘사업가….’

그래, 수도에서 전시회를 열어 준다는 사업가를 만났다고 했지. 리브는 그와의 연을 끊으라고 권유했고, 브레드는 도리어 화를 냈다. 혹시 그 일로 무언가 화를 당한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털레털레 계단을 내려온 리브가 막 걸음을 내디디려는 찰나였다.

“누구세요?”

카랑카랑한 물음이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리브가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았다.

“네?”

“누구시냐고요. 저긴 제 남편 작업실인데.”

눈꼬리가 매섭게 위로 치켜 올라간 여성이 리브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노려보며 물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여성을 보던 리브는 이내 그녀가 브레드의 아내라는 걸 깨달았다. 아마 작업실 앞에 쌓여 있던 우편물을 가지러 온 게 아닐까?

작은 키에 통통한 체격을 가진 브레드의 아내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리브에게 성큼 다가왔다.

“누구냐니까?”

당장이라도 머리채를 휘어잡을 기세로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리브가 무심코 대답했다.

“그, 브레드 씨의 작업 파트너요.”

“작업 파트너?”

여성의 얼굴에 불신이 가득했다. 제 남편의 실력을 알고 있는 그녀는 브레드에게 제대로 된 작업 파트너가 있을 거라고 믿지도 않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모델이라고 고백할 수는 없었다. 브레드의 그림 중 리브를 모델 삼아 그린 작품이라고는 누드화가 전부였으니까.

머리를 굴리던 리브가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제가 브레드 씨에게 화구 같은 물품 제공을 하고 있어요.”

굳이, 아주 굳이 따지자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후작의 저택에서 작업하게 된 계기가 바로 리브 덕분이었으니까. 간접적으로 화구를 제공했다고 우기면 억지로 우겨 볼 수는 있겠지.

…아마도.

“화구?”

“네. 아시다시피 화가에게 화구는 아주 중요해요. 그래서 늘 신경 써서 거래하는 편이죠.”

미심쩍은 눈으로 리브를 훑어보던 여성이 팔짱을 낀 채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작업실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데요?”

뭔가 석연찮기는 하지만 일단 넘어가겠다는 태도였다. 리브는 내심 안도하며 얼른 말했다.

“물품을 제공하기로 했는데 시일이 한참 지나도록 뵐 수가 없어서요. 따로 언질 받은 게 없는데 연락이 갑자기 끊기는 바람에, 거래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거든요.”

리브의 말에 여성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날카롭게 되물었다.

“하…. 그 인간이 뭐 외상이라도 달았어요?”

아마도 외상 빚에 시달린 게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당장이라도 험한 말을 쏟아 낼 것 같은 여성의 모습에 리브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외상은 아닙니다. 다만 정해진 납품 수량이 있어요. 날짜가 밀리면 다른 거래에도 지장이 생겨서.”

나오는 대로 둘러대면서도 진땀이 났다. 다행히도 리브의 표정 관리가 꽤 훌륭했던 건지, 여성은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뭘 납품하기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인간 당분간 안 나올 테니까, 다른 쪽 거래 먼저 해결하세요.”

“안 나온다고요?”

“네.”

큰일이 난 줄 알았더니, 여성의 반응만 보아서는 나쁜 일을 당한 게 아닌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그렇다고 영문 모른 채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리브가 작업실 쪽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애써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돌아가서 보고해야 하니까요. 정확한 사유를 알아야 거래를 차질 없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상인들이 어떤 식으로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두루뭉술한 말로 정기적인 거래를 갑자기 중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리브의 임기응변에 납득한 듯, 여성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수도에 갔어요.”

“수도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리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요. 거기서 전시회를 열 예정이라, 대관한 전시회장을 확인하러 갔어요. 전시할 작품을 그리려면 화구는 계속 필요할 테니까 거래가 취소될 일은 없을 거예요.”

리브는 저도 모르게 탄식할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아, 오. 그렇군요. 네.”

적어도 이 여성은 그 전시회장의 대관료가 브레드의 주머니에서 나갈 예정이라는 걸 까맣게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기어이 사업가의 손을 잡기로 했다는 브레드의 소식에 리브는 저절로 심란해졌다.

그녀라도 여성에게 사실을 말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괜히 끼어들어 남의 가정에 불화를 만드는 게 옳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리브가 속으로 어떤 고민에 휩싸였는지 알 리 없는 여성이 불현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그 인간이 전시회 이야기 안 했어요? 사방에 자랑하고 다녔을 텐데?”

그녀의 말대로 브레드의 성격이라면 사방에 제 전시회 소식을 알리고 다녔을 것이다. 리브는 곧장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얼핏… 듣기는 했는데 확정이라고 하진 않았던 것 같아서요.”

가계를 책임진 건 브레드가 아니라 눈앞의 여성이었다. 브레드가 사고를 크게 칠수록, 그걸 수습해야 하는 여성의 부담이 더 커진다는 의미였다.

생활고가 얼마나 사람을 피 마르게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리브는 도통 이 찜찜함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마침내 결심한 리브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여성이 먼저 손을 휘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렇게 됐어요. 근데 화구 납품한다고 했죠? 가게가 어디예요? 영수증 좀 보고 싶은데.”

여성이 깐깐한 눈으로 리브를 바라보았다. 리브가 다시금 당황한 얼굴로 굳었다.

“네? 아, 저희가 소량으로… 알음알음 장사하고 있어서요. 가게를 내진 못했어요. 지금은 가져온 게 없는데, 영수증은 다음에 챙겨 드려도 될까요?”

“언제 또 오시는데요?”

아무래도 여성의 마음에는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는 듯했다. 하기야 리브의 모습이 장사꾼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였을 테니까.

리브는 가정 교사를 하며 단련해 온, 신뢰감이 묻어나는 얼굴로 애써 웃었다.

“작업실이 열리면 브레드 씨에게 전달하겠습니다.”

“흠. 그 인간은 제대로 안 가져올 수 있으니까, 우편으로 보내 주세요.”

과연 여성은 브레드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았다. 웃는 낯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인 리브가 헛기침하며 슬그머니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부인, 제가 듣기로는… 그 전시회장 대관료요. 그걸 그… 브레드 씨가 내야 한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보죠?”

리브의 말에 여성의 안색이 대번에 돌변했다.

“예?”

“전시회가 열릴 예정이라니, 그 문제는 잘 해결되었나 봅니다. 축하드려요.”

리브의 말이 이어질수록 여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다가 곧 와락 일그러졌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짐작했는지, 곧 사나운 욕설을 뱉었다.

영수증을 받을 주소를 건네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여성이 대강 인사말을 뱉고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뛰다시피 걸음을 옮기며 빠르게 멀어지는 여성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리브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잘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부디 브레드가 정신을 차렸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그 사업가라는 사람의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홀리는 것보다, 후작의 그림을 하루빨리 완성해 주는 게 차라리 더 생산적이라는 걸 그가 알아야 할 텐데.

***

“돌아가지.”

“네?”

당연히 리브를 태워 갈 줄 알았던 마부가 의아한 얼굴로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지팡이 끝으로 커튼을 살짝 걷어서 바깥을 보고 있던 디무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고 있었다.

“마차 돌려.”

직접 리브를 데리러 오겠다고 했을 때만큼이나 변덕스러운 결정이었다. 그러나 마부는 군소리 없이 고삐를 쥐었다.

검은 마차를 발견하지 못한 리브가 털레털레 멀어져 가는 게 보였다. 마부는 그런 리브의 뒷모습을 힐끗 보았다가, 주인의 명대로 마차를 돌렸다.

검은 마차는 올 때와 같은 모습으로 부에르노 시내를 빠르게 벗어났다.

***

아돌프는 미혼이었다.

그러니 리브에게 ‘아픈 딸이 있다’라며 늘어놓았던 말은 전부 파렴치한 거짓말이었다.

평소 그는 거짓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때는 정말로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말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리브가 마음을 열지 않았으리라는 게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후작의 밑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 이처럼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겼기에, 리브에게 한 거짓말도 비슷한 느낌으로 했었다.

다만 평소와 다르게 이번 거짓말은, 좀 더 크게 다가왔다.

특히 코리다와 마주칠수록 더욱.

“아저씨네 딸은 몇 살이에요?”

있지도 않은 아픈 딸을 꾸며 내느라 아돌프는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차라리 법전을 읽는 게 차라리 마음은 편할 것 같았다.

그는 창의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상상력이 풍부하지도 않았다. 괜히 허풍을 심하게 떨었다간 후에 수습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 섣부르게 말을 부풀리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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