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48)화 (48/138)

“너는….”

사제는 남자를 가만히 응시할 뿐, 다른 이들처럼 경전 구절을 읊거나 탄식하며 울지 않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춘 사제는 한참 동안 남자를 보다가 어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제의 깨끗하고 흰 손이 검고 창백하게 굳은 어머니의 뺨을 쓸어내렸다.

“어찌 이런 선택을.”

혼잣말 같은 사제의 중얼거림은 모호했다. 그러나 남자는 어째서인지 내포된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저 사제가 그를 보며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어머니는 신에게 기도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눈앞의 사람을.

그녀는 제 죽음을 통해 기다리던 이를 만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이리 평온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사제는 뒤늦게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그런 뒤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제들이 불쌍한 전쟁고아를 거두어 챙기는 건 흔한 일이라, 누구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제는 교단 내에서도 꽤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었는지, 남자에게 그럭저럭 괜찮은 지원을 해 주었다.

전쟁은 이 순간에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불안정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 빠르게 성공하는 방법은 무기를 쥐는 것이었다.

다행히 남자는 퍽 능력이 좋았다. 시골 촌부의 아들로 근근이 살아갈 뻔했던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이 땅에 만연하는 죽음이 너를 구원하리라.”

합격 통지서를 본 사제는 그렇게 말했다.

“이것이 네 운명이라면 최선을 다하거라. 빛나는 자리에 올라서면 반드시 합당한 보상이 따를 터이니, 신께서 너를 내게 내려 주셨음이 틀림없다.”

남자는 그날, 사제가 얼마나 높은 자리를 꿈꾸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또한 그가 어째서 그동안 어머니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인지도.

어머니의 빼어난 외모를 닮은 남자는, 제 알맹이가 아버지를 닮았음을 깨달았다.

***

그림 작업을 잠정 중단시켰다.

표면적으로는 화가의 건강상 이유였다. 브레드라는 이름의 그 화가는 허술하게 둘러댄 본인의 핑계를 후작이 순순히 받아 주자 깊이 안도했다. 본인이 정말로 깊은 신임이라도 받고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본래 눈치가 없고 가벼운 인간이라는 건 한눈에 알아봤지만, 전이라면 조금이라도 의심했을 상황에서 안심하고 넘어가는 걸 보니 정말 정신없는 듯했다.

하기야,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단단히 떨어졌겠지.

디무스는 브레드의 행적이 적힌 보고서를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어리석긴.”

보고서를 올린 그의 보좌관, 찰스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계약이 만료되기 전에 야반도주할지도 모릅니다.”

“하라고 해. 굳이 손 쓸 필요가 없으니 편하겠군.”

디무스의 주변에는 브레드 같은 사람이 많았다. 한두 번의 만남이나 대화만으로 마치 그와 대단한 사이가 된 것처럼 으스대는 사람들.

대개 그런 경우 바라는 건 비슷했다.

디무스가 가진 돈, 혹은 디무스의 외모, 그도 아니면 그럴듯해 보이는 후광과 인맥.

브레드도 그랬다. 그와 처음 접선했던 날, 디무스가 그를 한눈에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솔직히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브레드는 미술전에서 몇 번이나 낙방했으면서도 제 실력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꾸역꾸역 헛되게 시간을 보내는 남자이니까. 그 와중에 술과 도박을 좋아하니, 돈으로 꾀어내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게다가 심지어 신의랄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본인의 그림이 주기적으로 팔릴 기미가 보이자, 리브와의 약속을 어기고 어떻게든 그녀의 얼굴을 그릴 정도로.

아마 누드 모델의 정체를 그간 숨겨 준 것 역시 브레드가 의리를 아는 사람이라서기보다는, 리브가 아니고서는 그 실력 없는 화가의 모델을 해 줄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따로 손쓰지 않으십니까?”

“굳이?”

브레드가 얽힌 집단은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디무스가 수고롭게 나서지 않아도 그들이 브레드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일단 돈을 빌리게 유도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받아 내겠지. 그것이 과도하게 잔혹한 방법이라고 해도.

“말은 전했나?”

디무스의 시선을 받은 아돌프가 얼른 입을 열었다.

“네, 그런데….”

브레드의 작업이 잠정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리브에게 전한 건 아돌프였다. 본래 그의 업무는 아니나, 리브가 가장 신뢰할 만한 이를 보내려다 보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작업이 완전히 중단될 경우 약속된 그림을 돌려받지 못할까 싶어 걱정하는 듯합니다.”

아돌프의 말에 디무스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 그림.”

지하실에 걸어 둔 누드화를 떠올리며, 디무스는 잠시 침묵했다.

솔직히… 처음부터 그 그림을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 계약서를 작성했다고는 하나, 그것을 무효로 만드는 일이야 어려울 게 없으므로.

“아직 포기한 게 아니었나.”

그림 따위는 까맣게 잊은 줄 알았더니.

애초에 그녀가 그림을 되찾으려 했던 목적은 가정 교사 일에 지장이 생기는 걸 우려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건 아픈 여동생을 돌보고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기 위해서고. 누드 모델을 하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결국 돈이 문제라는 건데, 그 부분은 디무스가 추가 근무라는 명목으로 해결해 준 참이었다. 그러니 가정 교사 일에 설사 지장이 생긴다고 한들 문제가 있나?

이제 와 그림을 돌려받는 건 아무 의미도 없을 텐데.

“그 부분은 내가 따로 이야기하지.”

어차피 조만간 부르려 했다. 그녀와의 키스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마음에 들었고,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으니까.

평소 타인과의 접촉이 징그럽고 꺼림칙하게 느껴지던 걸 떠올려 보자면, 그녀에게 느끼는 이 감정은 명백히 예외적이고 특별했다. 희귀한 것은 빨리 움켜쥐어야 마땅했다.

맨살로 만지고, 타액이 오가는 데도 불쾌하지 않았으니 그보다 더한 것도 가능하지 않겠나.

물론 디무스는 그녀 역시 저를 거부하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그녀가 힘겹게 유지하던 거리감은, 마차에서 내리지 못했던 그 순간 사라졌으니.

자발적으로 다가오던 그녀를 떠올리자, 떨떠름하던 감정이 그나마 나아졌다.

“그녀가 마음에 드시는 거라면, 그냥 곁에 두시면 되지 않습니까?”

의아한 얼굴로 아돌프와 디무스의 대화를 듣던 찰스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그 말에 아돌프도 내심 동의한다는 얼굴로 디무스를 보았다.

디무스는 그런 수하들을 힐끗 보고는 심드렁하게 시가를 꺼내 들었다.

“훌륭한 작품일수록 제값을 잘 치러야 하는 법이지.”

작품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 작품의 가치를 아는 것. 가치를 인정하는 것. 가치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는 것.

“마땅히 그래야만 ‘소유’할 수 있고.”

리브는 브레드의 그 형편없는 실력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접하기에는 아까운 여자였다. 우습기나 하던 뒷모습과 달리 앞모습은 아주 훌륭했다.

조금 마른 듯하면서도 적당히 굴곡 있는 몸매나 의외로 깨끗한 피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디무스의 시선을 가장 사로잡는 건 그녀의 얼굴이었다.

특히 그 처연한 녹색 눈동자 말이다. 그 큰 눈으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사람을 쳐다보면서, 의외로 내뱉는 말들은 단정하기 그지없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위태로운데, 묘하게 버텨 내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자꾸 건드리고 싶었다.

하물며 철벽같던 표정에 금이 가기라도 할 때면, 어찌나 마음에 드는지.

단순히 옷을 벗긴 것만으로는 그 민낯을 볼 수 없었다. 덕분에 공을 좀 들여야 했으나, 그 수고가 아깝지 않을 정도의 보람은 느껴지니 아무래도 좋았다.

덕분에 무료하던 생활에 조금쯤은 활력이 생기기도 했고 말이다.

“몸뚱이만 가져다 놓으면, 다른 조각상과 다를 게 없지 않나.”

“그녀의 마음을 원하시는 겁니까?”

찰스가 놀란 듯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그간 굳이 원하지 않아도 사방에서 제 마음을 받아 달라는 호소를 들어왔던 디무스라, 새삼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디무스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아돌프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디무스가 리브를 제 옆에 앉혀 두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도통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후작님의 관심과 사랑에만 목을 맬 텐데요.”

그리고 그건 디무스가 아주 싫어하는 행동 중 하나였다. 저를 봐 달라고 울고불고 애원하는 것. 그게 싫어서 이제껏 그림이나 조각상을 들여온 게 아닌가.

“그녀는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미술품들과는 전혀 다른… 관심을 주어야 하지요.”

디무스는 어렵지 않게 아돌프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건 좀, 재미없는 소리군.”

디무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가 리브의 무너진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 맞지만, 자존심을 버리고 매달려서 구걸하는 게 만약 사랑이나 관심 같은 시답잖은 것이라면 아주 실망스러울 것 같았다. 세상에는 그보다 값비싼 게 아주 많으니까.

그녀는 영리한 여자이니, 그쯤이야 구분할 줄도 알 것 같은데.

“주제를 아는 여자이니 내 곁을 오랫동안 지키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겠지.”

“만약 그녀가 제대로 처신하지 못한다면….”

리브 로이데스를 자주 상대해 온 까닭인지, 아돌프가 그녀에게 제법 연민을 가지게 된 모양이었다.

디무스가 다소 신경질적인 눈으로 아돌프를 응시했다. 자신의 물음이 과했음을 깨달은 아돌프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가치가 떨어진 작품을 굳이 소장할 필요는 없지. 그때는 그대가 나서면 되겠군, 아돌프. 그러라고 작성한 계약서 아닌가?”

아돌프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의 순종에도 불구하고 이미 불쾌해진 디무스는 보좌관들에게 나가 보라는 듯 짜증스럽게 손짓했다.

홀로 남은 집무실에서 시가 불을 붙이며, 디무스가 아돌프의 말을 떠올렸다.

리브 로이데스가 제대로 처신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다른 뭇 사람들이 그랬듯 재미없는 꼴로 변한다면?

아, 생각만으로도 지루한 가정이었다.

가급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지만… 행여 그렇게 된다면 디무스가 보일 반응은 정해져 있었다.

수집가의 덕목 중 하나는, 버릴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안목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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