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47)화 (47/138)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본 리브가 눈을 크게 떴다. 바쁘게 움직이던 다리도 우뚝 멈췄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던 검은 마차를 발견한 탓이었다.

리브와 눈이 마주친 마부가 모자를 들썩이며 아는 척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마부는 리브와 안면이 있는, 평소 그녀를 후작에게로 데려다주는 바로 그 마부였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이렇게 우연히 마주칠 수 있지?

리브가 얼떨떨한 눈으로 마부를 보고 있는데, 그가 이리 오라는 듯 눈짓했다. 무심코 주변의 시선은 없는지 돌아본 리브가 조심스럽게 마차로 다가갔다.

“무슨 일로 여길….”

마부는 대답 대신 마차 쪽으로 손짓했다.

리브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몇 행인들이 보이기는 하나 다들 리브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특별한 구석이 없는 검은색 마차에 불과했으니, 이 모습을 본 누군가는 리브가 마차를 호출했을 거라고 여길 터였다.

머뭇거리던 리브가 조심스럽게 마차 문고리를 잡았다.

달칵.

후작은 이 늦은 시간에 굳이 데려오라고 시킨 걸까? 그럴 바에 내일 보는 게….

“……!”

습관처럼 자리에 앉은 리브가 문을 채 다 닫지 못하고 행동을 멈추었다. 당연히 텅 비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마차 내부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후작님?”

다리를 꼬고 기대앉아 있는 이는 분명 후작이었다. 당황한 얼굴로 굳어 버린 리브를 본 그가 마차 문을 향해 턱짓했다.

“일단 문부터 닫지. 천장에 불을 밝힐 수 있는 작은 램프가 있네.”

“아, 네.”

황급히 문을 닫은 리브가 램프를 밝혔다. 마차 안이 밝아지자 후작의 얼굴이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한 그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예상보다 늦게 끝났군.”

그 말은 꼭, 그가 리브를 의도적으로 기다렸다는 것처럼 들렸다.

“후작님께서 어떻게 여길….”

“선생이 펜던스 남작가의 초대를 받고 외출했다고 하기에.”

아마 오늘 리브를 부르기 위해 집으로 마차를 보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후작이 펜던스 남작가 근처에서 이 검은 마차를 타고 있는 지금 상황이 설명되는 건 아니었다.

“급한 볼일이 있으셨나요?”

추가 근무가 아니고서야 그가 저를 급히 봐야 할 일이 뭐 있겠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리브를 힐끔 본 후작이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이 어두운 거리를 무서워해서, 퇴근할 땐 늘 마차로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고 하더군.”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리브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가 말하는 게 추가 근무를 하고 난 뒤의 퇴근길이라는 걸 알아들은 탓이었다.

“오늘은 어떻게 귀가하려 했나?”

“합승 마차를 타고….”

“합승 마차는 선생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진 않을 텐데.”

그건 그랬다. 합승 마차를 타도 결국 정류장에서 집까지는 걸어가야 했다. 그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걱정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정은 리브가 감내해야 할 문제이지, 후작이 참견할 일은 아니질 않나.

혼란스러워하는 리브의 얼굴을 본 후작이 희미한 조소를 흘렸다. 곁에 두었던 지팡이를 들어 마부석 쪽으로 난 창문을 툭툭 친 그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나를 에스코트도 모르는 사람으로 보고 있나?”

“…저를 에스코트해 주러 오셨다고요?”

“아니면 내가 뭐 하러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을까.”

리브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데, 눈앞에 그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 버렸으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후작의 신호를 받은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리브의 집이었다.

“어두운 거리를 무서워하면서 저녁 식사 초대에 응하다니, 생각보다 선생은 대책 없는 성격이었군.”

멍하게 앉아 있던 리브가 그 말에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

“학부모와의 비정기적인 만남은 제 업무의 일환이니까요. 펜던스 남작가의 일이라 이해해 주실 거라고 멋대로 판단했습니다. 오늘 못한 추가 근무는 괜찮으시다면 내일 하겠습니다.”

“그거야 내가 내킬 때 할 일이고.”

단칼에 거절당하자, 리브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그 추가 근무의 조건은 후작이 원할 때였지.

괜히 감정적으로 후작을 피하려다가 추가 근무까지 지장이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렇게 걱정하다가, 결국 리브는 자신이 후작을 피하고 싶어 했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도 자연스럽게 떠올리고 말았다.

후작과의 키스.

그것을 생각하자 얼굴에 열이 올랐다. 갑작스러운 후작의 등장에 당황스럽기만 하던 마음은 점점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잔뜩 달아오른 설렘이었다.

행여 자신의 안색에 이 감정이 드러날까 싶어서, 리브가 고개를 푹 숙이고 제 무릎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후작은 더 이상 그녀에게 말을 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대로 조용히 집에 도착해서, 얼른 인사를 하고 내리면 들키지 않겠지?

다행스럽게도 펜던스 남작가에서 리브의 집까지는 가까웠다. 본래 걸어서 출퇴근하던 길인데 마차를 탔으니 평소보다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마차의 속도가 줄어들다가 천천히 멈추는 것을 느낀 리브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조심히 들어가시고, 다음부터는 되도록 불시에 일정을 잡는 일이 없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빠르게 말을 쏟아 낸 리브가 마차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나 문을 열기도 전에 후작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복습은 잘 했나?”

문고리를 잡은 리브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하얗게 질렸다.

눈을 깜빡이며 침묵하던 리브가 천천히 후작을 돌아보았다. 처음과 같은 자세로 흐트러짐 없이 앉은 그가 리브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리브가 대답하지 못하자, 후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리브를 바라보던 후작이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기억이 안 나면 다시 알려 주겠네.”

유난히 반짝거리는 백금발이 그의 고갯짓에 몇 가닥 흐트러지고, 램프 불빛을 받은 벽안이 평소보다 더 오묘한 색으로 일렁거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는 건 요사스러운 그의 입술이었다.

리브는 저 입술의 감촉을 알았다.

“저는….”

안 돼.

머릿속으로 선명한 경고등이 켜졌다. 새빨간 경고등은 지금 당장 이 마차에서 내려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문고리를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리브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물 밖으로 끌려 나온 생선처럼 겨우 숨만 헐떡이는 것이었다.

안 돼!

다시금 경고등이 울렸으나, 곧 더 큰 목소리가 그 경고등을 무시하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왜 안 돼?

“그러니까….”

입술을 벙긋거리던 리브가 마른침을 삼켰다. 어디선가 날 리 없는 시가의 향기가 났다.

속눈썹을 파르르 떨던 그녀가 가까스로 속삭이듯 대답했다.

“…다시 알려 주세요.”

희미하던 후작의 미소가 조금 더 짙게 변하고, 벽안에 웃음기가 서렸다.

“정답이네.”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에서 끝내 힘을 뺐다.

***

남자는 거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평범한 촌부였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어머니와 단둘이 생활했다. 남자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부터 어머니는 그를 안고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불안정해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생활이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모자가 정착한 곳은 아름다운 미혼녀에게 박하지 않은 분위기의 동네였다. 모자는 비교적 수월하게 스며들 수 있었다.

어머니는 성실했고, 아들을 사랑하는 자애로운 부모였다.

특출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면, 시골 마을의 작은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마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신심이 깊은 신도였다. 매주 열리는 예배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여유가 생길 때마다 아들의 손을 잡고 예배당 기도실을 찾았다.

어린 사내애로서는 좀이 쑤셔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시간을 견뎠다.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기도실에서의 그녀는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신에게 기도했다. 이 평화로운 나날을 지켜 달라고.

신은 어린 소년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남자가 일곱 살이 되던 해, 전쟁이 터졌다. 날아온 포탄이 집을 무너뜨리고, 어머니는 잔해에 깔려 숨졌다. 어머니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 외출했던 남자는 겨우 목숨을 부지해, 마을 사람들과 정신없이 피난길에 올랐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금방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무너지고 불탄 잔해 속에서 가족을 찾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남자 또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어린 소년의 몸으로는 잔해를 치울 수 없어서, 수습을 도와줄 사람들이 파견되고서야 어머니의 몰골을 제대로 확인했다. 늘 아름답게 빛나던 백금발의 머리카락은 잔뜩 그을려 엉망으로 엉킨 데다, 사지가 피범벅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어머니의 얼굴은 평온했다.

마치, 기도하고 있을 때처럼.

죽은 마을 사람들의 시신을 전부 수습했을 즈음, 이 비통한 현장에 성직자들이 파견되었다. 시골에 파견하기에는 상당히 고위직에 있는 사제들이었다. 기존에 있던 작은 예배당과 그곳에서 근무하던 성직자의 유해를 수습하고 신도들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신이시여.”

“이 불쌍한 영혼들을 당신 곁으로 인도하소서!”

간절하게 신을 부르짖으며 우는 마을 사람들의 어깨를, 사제들이 다정하게 토닥여 주었다.

그 속에서 남자는 우두커니 있었다. 그는 그저, 평온하게 눈 감은 어머니의 시신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남자에게도 한 명의 사제가 다가왔다. 벽안에 수려한 외모를 가진 젊은 사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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