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46)화 (46/138)

잠시 뜸을 들이던 카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치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고.”

그러고는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가벼운 어조로 설명을 이어 갔다.

“다만 후작이 워낙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아직 그 시도가 성공한 사람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뭐랄까, 이제 와서는 다들 암묵적으로 손대지 않는 고가의 조각상이 됐죠. 손꼽히는 거물 정도 되어야 집 안에 들일 수 있는, 그런 값비싸고 보기 좋은 조각상.”

“사람을 조각상 취급하는 건 좋아 보이지 않네요.”

“당사자인 후작은 사람을 조각상 취급도 하지 않는걸요.”

“그냥 낯을 많이… 가리시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제 입으로 뱉었지만 정말 헛소리였다. 그럼에도 리브는 조심스럽게 후작의 편을 들었다. 아무도 모르게 쌓은 친분 때문일까? 후작의 험담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진짜 아무것도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이해했는지, 카밀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듣자니 어마어마한 정신병이 있어서, 누구와 손 닿는 것도 싫어한다던데요. 악수는 물론이고, 대화조차 길게 이어 가기 어렵다고. 그와 한 식탁에 앉아 본 귀족이 있다는 말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펜던스 남작가가 후작과 친분이 있다는 소문이 돌 때 무척 놀라웠죠.”

카밀의 시선이 저택 쪽으로 향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저택을 응시하던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건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다. 말을 한 직후, 카밀이 빙긋 웃으며 리브에게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제가 이런 말을 했다는 건 비밀입니다.”

“그럼요.”

후작이 제법 결벽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은 그를 만났던 초반에 리브도 종종 느꼈던 감상이었다. 다만 그는 이제 리브의 앞에서 심하다 느껴질 정도로 까탈스럽게 굴지는 않았다. 카밀은 후작이 남과 손 닿는 것도 싫어한다고 말하지만… 당장 리브는 후작과 입술을 맞대지 않았던가.

그러니 정신병이라는 말은 과장되었고, 그냥 성격이 좀 예민하다고 보는 게 옳았다. 정말 병적인 증세였다면 혀까지 사용해서 그런….

생각을 이어 가던 리브가 재빨리 시선을 옮겼다. 다시금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그날의 기억을 떨치고자, 그녀는 일부러 화단의 꽃송이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뜯어보았다.

조명을 받은 화단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과연 카밀이 굳이 이곳을 언급한 이유가 있었다. 아마도 화제가 조금 더 로맨틱했다면, 그럴듯한 분위기를 만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

리브가 고집스럽게 화단을 노려보고 있는데, 카밀이 문득 다시 말문을 열었다.

“아, 그런 말도 들어 봤습니다.”

리브의 의아한 시선을 받은 카밀이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사교계에서는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으니, 그가 군 장교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말이요. 하지만 적어도 제가 아는 선에서는 찾을 수 없었죠. 일정 수준 이상의 군 기록은 본래 함부로 열람할 수 없기도 하지만요.”

군 장교.

그러고 보니 그와 비슷한 말을 밀리언에게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밀리언은 후작이 장교 출신이라서 살생에 능하다더라는 소문이 있다고 했었다.

순간 리브의 뇌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던 건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를 쏘았던 게 자신이라고 말하던 후작의 목소리도.

사냥터에서 엽총을 다루던 모습만 상기해 보아도, 그는 총기에 결코 문외한이 아니었다.

“때로는 불가피하게 저질러야 하는 살생이라는 게 있는 법이네, 선생.”

어쩌면 후작은 정말 장교 출신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실전 경험이 많은 장교.

“그가 정신병을 앓게 된 것도 군 생활 때문이라는데, 일견 설득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추측을 근거 삼아 정신병이 있다고 단정하는 건 맞지 않죠. 함부로 논하기에 건강 문제는 너무 예민한 사안이네요.”

“그 말씀도 맞습니다.”

입으로는 카밀의 말을 전부 억측이라고 부정하면서도, 리브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을 마음 한구석에 담아 두게 되었다. 제가 보고 들은 것과 어느 정도 맞물리는 지점이 발견되니 더욱 그랬다.

그가 장교 출신이라면, 그는 어느 나라 군대에서 복무했을까? 오만한 태도를 보건대 결코 낮은 위치는 아니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의 부대를 이끌었을까? 제복을 입은 그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틀림없이 아주 근사했을 텐데.

지위가 높은 장교였다면 인기도 많았을 텐데 왜 독신이지? 어쩌다가 이런 시골 도시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일까.

일반 군인이야 사지 멀쩡한 장정이라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지만, 장교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장교가 되려면 사관 학교를 졸업해야 하는데, 이 사관 학교 자체를 입학하기 위해서는 거액의 후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귀족 가문에서 후계자가 되지 못한 차남이나 삼남들이 주로 장교가 되었다. 물론 실력을 통해 들어가는 경우도 극소수 있다고 하지만… 솔직히 그 많은 생도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숫자라면, 사실상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입학생들의 신분이 이러하니 당연하게도 사관 학교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교계와 비슷한 귀족들의 세계였다. 운 좋게 낮은 신분으로 거액의 후원금을 내고 들어가게 되었다 한들, 세력가의 눈에 들지 못하면 졸업하기도 전에 인생이 결정될 정도로 말이다.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장교가 되었다면, 그것도 기록이 열람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위치의 장교였다면 심상치 않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인데.

무수히 피어나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리브의 귓가로 카밀의 질문이 들려왔다.

“선생님은 후작에게 참 관심이 많으시군요. 원래 관심이 많으셨나요?”

덕분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호기심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리브가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냥, 전에 밀리언 생일 파티 때 먼발치에서 뵈었던 게 인상 깊게 남았나 봐요.”

“아, 그렇군요.”

카밀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다만 더 캐묻지도 않았다. 그게 도리어 리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지레 뜨끔 하는 비밀을 품고 있어서 그런지, 괜히 그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맞잡은 손을 만지작거리던 리브가 결국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입술을 뗐다.

“마르셀 선생님이야말로 무척 많은 걸 알고 계시네요. 평범한 미술 선생님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 정도야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알 수 있는 것들이죠.”

늘 그래 왔듯 카밀의 반응은 가벼웠다. 그러나 리브는 이제 더는 그의 그런 말에 선뜻 넘어가지 않았다.

“정보를 직접 찾아보는 건 귀를 기울이는 것보다 훨씬 적극적인 행동이지 않나요?”

후작이 군 장교 출신인지 찾아보았다고, 제 입으로 직접 말한 게 바로 카밀이었다. 리브의 지적에 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뒤늦게 제 말실수를 깨달은 그가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오, 예리하시네요.”

난처한 얼굴로 본인의 목덜미를 주무르던 그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뗐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리브가 말문을 열었다.

“귀찮게 느껴지셨을 수도 있는 청이었는데, 기꺼이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입구 쪽에서 산책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저택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을 확인한 리브도 슬슬 들어가 보아야겠다 싶어 몸을 돌리는데, 카밀이 뒤에서 그녀를 불쑥 불러세웠다.

“로이데스 선생님.”

살짝 눈살을 찡그린 카밀이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듯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다소 조심스럽게 말했다.

“후작에게 너무 관심 가지지 마세요.”

매번 가볍고 장난스럽게, 때론 능청맞게 건네오던 어투와는 확연히 달랐다. 리브는 그가 지금 아주 진지한 마음으로 조언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카밀을 바라보던 리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요?”

리브의 물음에 카밀은 고민스럽다는 듯 조금 더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가 괜스레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음, 선생님은 좋은 분이신 것 같아서요.”

“네?”

저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리브가 되물었으나, 카밀은 제 말을 설명해 주는 대신 이마를 문지르며 탄식했다.

“나쁜 길로 빠지려고 하는 지인을 보는 심정이 이런 건가, 싶네요.”

“무슨 말씀이신지….”

“혹시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당장은 못 미더우시겠지만, 급할 때 어쩌면 제가 선생님께 해답을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그의 모호한 말 속에서 형태를 알 수 없는 불온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러나 카밀이 리브에게 나쁠 소리를 하는 것 같으냐 하면, 또 그건 아닌 듯했다.

그의 이 정체 모를 호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고민하던 리브는 결국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을 택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하네요.”

카밀은 서운한 내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죠?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펜던스 남작가를 나선 건 생각보다 더 늦은 시간이었다. 리브는 지체하지 않고 합승 마차가 모여 있는 거리로 향했다.

남작가가 부에르노의 번화가에 있었음에도, 진득하게 어둠이 내려앉자 거리가 꽤 한적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리브의 마음이 불안해지기는 충분했다.

괜히 더 쌀쌀하게 느껴지는 밤공기를 이겨 내 보고자 어깨에 걸친 숄을 좀 더 끌어당긴 리브가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막 대로변에 다다르려는 찰나였다.

히힝!

어두운 골목 귀퉁이에서 말의 투레질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앞발을 구르는 말발굽 소리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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