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45)화 (45/138)

카밀과 대화할 기회를 잡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남작 부부가 카밀을 놓아주지 않은 탓이었다. 그 와중에 밀리언은 기어이 리브를 후원으로 끌고 나온 참이었다.

“우리 집 후원은 밤에 보아도 아름다워요! 정말 예쁘죠?”

오늘은 특별히 더 아름답게 불을 밝혀 두었다며, 밀리언이 리브를 재촉했다.

지금은 식사 후 응접실에서 소소하게 담소를 나누거나, 여유롭게 산책을 하는 시간이었다. 밀리언의 권유가 아니어도 이미 후원을 구경하고 있는 선생이 몇 보였다.

“응, 정말 예쁘네.”

밀리언의 말대로 후원 곳곳이 밝아서 보기에도 좋았고, 밤공기가 너무 차갑지 않아서 걷기에도 적합해 보였다. 이 정도 밝기라면 어둡다는 이유로 지레 겁먹게 되진 않을 것 같았다.

“밀리언! 밀리언?”

리브의 팔짱을 끼며 후원으로 향하려던 밀리언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멈칫했다. 펜던스 남작 부인의 목소리였다.

“밀리언!”

“어서 들어가 봐.”

“하아…. 후원은 직접 안내해 드려야 하는데.”

밀리언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연이어 들리는 부름을 더는 무시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팔짱을 풀었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 기다려 주셔야 해요?”

“그래, 알았으니까 어서 가 봐. 부인께서 기다리시겠다.”

투덜거리면서 돌아서는 밀리언을 웃으며 보던 리브가 후원을 돌아보았다.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다른 선생들을 보니 새삼 자신이 얼마나 사교성 없이 지냈는지 체감이 되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다른 선생들은 이런 식사 자리 이전에 서로 안면을 익혀 둔 듯했다.

수업을 빼고는 펜던스 남작가에 방문하지도 않고, 관련된 사람을 만나지도 않던 리브와는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아마 이 자리가 새로운 인맥을 형성할 좋은 기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리브는 굳이 선생들과 친해지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조용히 후원을 구경하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전이라면 어떻게든 한 명의 학생이라도 더 소개받을 수 있도록 힘썼겠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만큼의 절박함이나 초조함이 없었다.

‘아마도 그 남자 덕분이겠지.’

느릿느릿 후원 안으로 들어서며 리브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변화가 좋은 것인지, 아직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거부하거나 경계하려는 마음이 사라졌을 뿐이었다.

후작은 종잡을 수 없는 남자이지만 기댈 수 있는 남자이고, 심지어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나는 그 남자와 키스했어.’

게다가 첫 키스였다.

사실 리브는 첫 키스에 대단한 의미 부여를 하고 살아오진 않았다. 그런 것에 환상을 가지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집안의 가장이 된 이후로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첫 키스의 강렬함이 유난스럽게 남아 버렸다.

입 안을 휘젓던 그 뜨거운 살덩이는 낯설면서도 신기했고, 뒤엉키는 타액 소리는 어딘가 자극적이었다. 키스가 길어질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고, 그와 조금 더 닿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것은 리브가 난생처음 느낀, 적나라한 성적 충동이었다.

‘만약 그가 먼저 입술을 떼지 않았다면, 분위기에 휩쓸려 그 남자 목이라도 끌어안았을지 몰라.’

무심코 입술을 매만지던 리브가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퍼뜩 손을 내렸다. 상상만으로 얼굴이 홧홧해져서, 그녀는 보폭을 크게 하며 후원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지금 제 얼굴을 누군가 본다면, 이 음험한 생각을 전부 알아챌 것만 같았다.

후원 입구 쪽에는 그래도 사람이 제법 있었는데, 안쪽으로 들어오자 퍽 한적했다. 불이 밝게 켜져 있어도 인적이 없으니 분위기가 조금은 스산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느라 정신없던 리브가 그런 분위기를 깨달은 건 조금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슬슬 돌아가야 하려나?”

너무 생각 없이 걸었더니 의도했던 것보다 더 깊이 들어오게 된 것 같았다. 저택의 소음이 멀어졌다는 걸 알아챈 리브가 얼른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정원수에 가려져 있는 모퉁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밀리언이니?”

혹시 그녀를 데리러 온 걸까.

리브가 반색하며 이름을 뱉자, 정원수 뒤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실망하게 해 드려서 죄송하네요.”

머쓱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이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리브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마르셀 선생님.”

“밀리언이 이곳에 계신다고 해서 와 봤는데, 생각보다 깊이 들어와 있으셔서 조금 헤맸습니다.”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모습을 드러낸 카밀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제게 볼일이 있으셨어요?”

“저야 늘 있죠. 아마 로이데스 선생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시겠지만.”

오늘은 그녀 역시 카밀과의 대화를 원했으나, 굳이 그 사실을 알려 주진 않았다. 애초에 카밀과 그녀는 대화하려는 목적 자체가 다를 테니까.

스스럼없이 호감을 표하는 청년의 모습에 리브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간 열심히 선을 그었으니 이성적인 호감도 잦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진 않은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후원이 아름답죠? 구경은 잘 하고 계신가요? 저쪽에 화단이 예쁜데, 보셨습니까?”

그가 가리키는 곳은 후원 입구 쪽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녀를 화단으로 안내하려는 듯 걸음을 옮기는 카밀을 따라, 리브도 천천히 발을 옮겼다. 어차피 바깥으로 나가려면 카밀이 말한 방향으로 이동하기도 해야 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이동하면서, 카밀이 넉살 좋게 대화를 이끌었다.

“펜던스 남작가의 정원사 솜씨가 아주 훌륭하더라고요.”

“잘 아시네요. 자주 와 보셨나 봐요.”

“최근에 펜던스 남작가에 방문할 일이 조금 늘어나서요. 집주인은 아니지만 대강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소개해 드릴 정도의 지식은 쌓였답니다.”

펜던스 남작가와의 친분을 선뜻 인정한 그가 씩 웃었다.

“물론 예쁜 화단을 보며 나눌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도 준비되어 있고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란, 전에 말씀하셨던 그런 내용들인가요?”

사소한 가십에서부터 후작 같은 거물의 뒷이야기까지.

언젠가 카밀이 리브에게 했던 말이었다. 자신이 한 말을 떠올렸는지, 카밀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 혹시 그런 화제는 별로 재미없으실까요?”

평소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리브는 그에게 듣고 싶은 내용이 있었기에, 굳이 마다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이야기라면 흥미로울 수밖에 없죠.”

리브가 순순히 받아들일 줄은 몰랐던지, 카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로이데스 선생님은 세상만사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이셨는데.”

“보신 대로예요. 다만 세상에는… 관심을 안 둘 수 없는 것들도 존재한다는 걸 알아요.”

리브의 말에서 무언가를 짐작한 걸까? 카밀의 입매가 미묘하게 변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리브의 안색을 살펴보던 그가 이내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궁금하세요?”

그는 역시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제 질문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리브는 직설적으로 질문했다.

“디트리언 후작님에 관한 소문이요.”

이미 후작에 대한 관심을 넌지시 표출했던 적이 몇 번 있는지라, 카밀은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았다. 다만 조금 입술을 삐죽거리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소문이라면?”

“뭐든요. 달리 그분에 관해 알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이런 기회에 들을 수 있을까 궁금하네요. …어차피 사교계에 도는 가십이라면 진위가 검증되지 않았겠지만요.”

“그렇긴 하죠. 특히 후작의 소문은… 유독 그런 편이고요.”

아래턱을 문지르던 카밀이 고민스럽다는 듯 앓는 소리를 냈다.

“후작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불친절하고 신경질적이라는 사실이야 익히 들어 보셨을 테고….”

대화를 나누며 걸었더니 금방 화단에 도착했다. 후원 입구도 가까워져서, 이제 저택 소음도 꽤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사람의 그림자가 왔다 갔다 하는 입구 쪽을 힐끗 본 카밀이 이내 입을 열었다.

“가장 간단한 것부터 이야기하자면, 디트리언 후작 가문이 어느 나라의 가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고로 그가 정말 후작인지도 알 수 없죠.”

그 말에 리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모두가 그분을 후작님이라고 부르잖아요.”

“네, 그는 등장할 때부터 디트리언 후작이었죠.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후작이었을 리는 없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무심코 수긍한 리브가 후작을 떠올렸다.

다만 차갑고 오만한 그 남자를 보고 있으면, 그가 후작님이라고 불리는 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날 때부터 후작이었을 것만 같았다. 그가 누군가를 내려다보고 지시하는 게 너무 당연해 보였다.

“가문부터 정체를 알 수 없으니, 당연히 그의 과거 또한 모두 베일에 싸여 있죠. 덕분에 온갖 말을 가져다 붙이기 아주 좋은 상대이기도 하고. 심지어 생김새가, 전에 보셨죠? 소문이 안 나는 게 이상할 겁니다.”

“그렇죠.”

얼굴로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다면, 후작은 벌써 대륙 반절을 불태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당장 성격이 조금만 다정했어도 온갖 치정 문제로 나라를 뒤집어 놓았겠지.

“연회장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게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당사자는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후작의 뒤를 캐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도 넘쳐난답니다.”

“뒤를 캐서 좋을 게 뭐가 있죠?”

“글쎄요. 뭐가 나오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작게는 시시한 사랑놀이에 사용될 수도 있고, 크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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