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44)화 (44/138)

“선생님, 선생님!”

“응?”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길래 코앞에서 불러도 모르시는 거예요?”

퍼뜩 정신을 차린 리브가 미간을 찌푸리며 얼른 사과했다.

“아, 다 풀었니?”

“그게 아니고요, 선생님. 제 이야기 안 들으셨죠?”

“미안해. 선생님이 좀… 정신이 없네.”

거친 손길로 앞머리를 쓸어 올린 리브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리브를 걱정스럽게 보던 밀리언이 얼른 문밖의 하녀를 불렀다. 몸에 좋은 차라도 준비하라고 성화를 부리는 밀리언을 무감하게 본 리브가 심란한 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베리워스 저택을 다녀온 지도 벌써 3일이 되었다.

그러니까… 후작과 키스를 한 뒤로 벌써 3일이나 흘렀다는 소리였다.

그 일로 리브의 일상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3일째가 되어서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어딜 보든, 무얼 하든 머릿속에는 온통 후작뿐이었으니까. 그와 나눈 그 짧은 키스, 그리고 그 순간의 모든 풍경이 뇌리를 떠나지 않고 단단히 박혀 버렸다.

아니, 그걸 키스라고 할 수 있을까? 후작은 그걸 ‘가르침’이라고 했고, 그는 정말로 시가를 어떻게 피우는지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그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무슨 말로 포장하든 그건 키스였다. 짧지만 농밀한 키스. 아주 친밀한 관계에서 할 법한 신체접촉 말이다.

물론 이미 후작의 앞에서 몇 번이고 나신을 내보인 리브였으니 이런 접촉에 놀라는 게 새삼스러울 수는 있었다. 그녀도 어쩌면 후작이 더 많은 걸 요구할 수 있겠다고 짐작했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추가 근무를 하는 시간이 아니었는걸!’

그저 그가 베푼 호의에 감사 인사를 하러 간 그런, 평범하고 일상적인 자리였다. 나신도 아니었고, 누드모델로서 앉아 있던 것도 아니었다.

옷을 벗을 때는 미리 각오라도 했는데, 그때는 정말로 무방비 상태였다. 그래서 더 놀랐고, 이성을 되찾을 생각도 못 한 채 속수무책으로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해서 싫었냐 묻는다면….

‘…어떻게 싫을 수 있었겠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오는 남자와의 키스라니.

후작의 악명 높은 인성에도 불구하고 그와 뭐라도 해 보고 싶어 하는 숱한 여성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를 사랑하고 말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키스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자극적이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더 큰 자극을 위해 얼마든지 몸을 던지고 싶을 정도로.

‘내게 이런 욕정이 있었을 줄이야.’

그가 준 알사탕은 그녀의 방, 책상 서랍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그걸 먹었다간 그렇지 않아도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드는 이 기억에서 영영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버리자니 그 또한 선뜻 내키지 않아서, 눈에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 버린 참이었다.

하지만 안 보인다고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바로 오늘, 출근 직전까지도 리브의 시선은 알사탕이 들어 있는 책상 서랍에 한참 꽂혀 있었으니까.

리브가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떠올릴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계속 이렇게 정신을 빼놓고 있으면 곤란했다. 후작이 아니어도, 리브에게는 신경 써야 하는 일상이 많으니까.

밀리언의 수업이라든가, 코리다의 건강이라든가, 연락이 두절된 브레드라든가, 추가 근무…. 추가 근무를 하게 되면 또 후작과….

오, 이 끈질긴 기억은 도대체 언제쯤 사라질까!

“선생님, 많이 안 좋으세요?”

하녀에게서 직접 쟁반을 받아 들고 온 밀리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리브의 안색을 살폈다. 리브가 얼른 이마에서 손을 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괜찮아. 미안해, 밀리언. 오늘 제대로 나가지 못한 진도는 보충 수업을 해 줄게.”

“윽, 보충 수업은 안 해도 돼요! 그보다 선생님, 못 들으신 것 같아서 다시 말씀드리는데요.”

밀리언은 행여 리브가 지금 당장 보충 수업 날짜를 잡을까 봐 걱정되었던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내일 저녁 식사 괜찮으세요?”

“내일 저녁 식사?”

“네. 부모님이 대접하고 싶으시다고 하셔서요. 원래 직접 여쭤보는 게 맞는데, 오늘 급히 일정이 생기셔서 두 분 모두 외출하셨거든요.”

후작과의 추가 근무가 불특정하게 늘어난 이후, 리브는 어지간해서는 개인적인 약속을 잡지 않으려 해 왔다. 어차피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라서 그간 큰 불편함을 느끼진 못했는데….

“다른 선생님들도 초대할 예정이에요. 그중에서도 선생님은 절대 빠지시면 안 된다고요! 저랑 제일 친하시잖아요.”

리브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밀리언이 울상을 지으며 설명했다.

아마도 밀리언의 사교계 데뷔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좀 더 신경 써 달라는 의미로 자리를 마련하는 모양이지.

잠깐 고민하던 리브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내일, 후작이 그녀를 갑자기 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꾸역꾸역 그러한 가능성을 외면했다.

설사 그가 정말 그녀를 부른다고 해도, 지금은 그를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고.

학부모와의 만남은 가정 교사로서 주기적으로 가져야 하는 업무 중 하나였다. 후작이 펜던스 남작가의 수업은 배려해 주겠다고 말했으니, 여차하면 그걸 핑계로 삼아야지.

멋대로 당위성을 만들어 낸 리브가 밀리언을 향해 웃어 보였다.

“시간을 알려 주면 맞춰서 올게.”

***

저녁에 펜던스 남작가를 방문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따금 펜던스 남작 부인과 따로 자리를 가진 적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짧은 티타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로이데스 선생님, 음식은 입에 맞아요?”

“네, 아주 맛있습니다.”

겉으로 빙긋 웃으면서도, 리브는 이따금 초조하게 창밖을 확인했다. 올 때만 해도 노을이 지고 있던 하늘은 이제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미 집을 나설 때부터 리브의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동안 밀리언의 수업이 끝나면 해가 지기 전에 퇴근했고, 추가 근무를 할 때는 늘 집 앞까지 마차로 데려다주었기에 밤거리를 걸을 일이 없었다.

덕분에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어두운 거리가 어떤 공포를 주는지.

‘엉뚱한 곳에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너무 섣부르게 승낙했다는 자책감이 들었으나, 이미 참석하겠노라고 말해 두었으니 별수 없었다.

그나마 갈 때는 노을이 지고 있을 뿐, 완전히 어두운 시간이 아니었다. 문제는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사한 동네는 전에 살던 거리와 비교하면 아주 안전한 동네라는 걸 알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이성대로 움직이던가.

‘돌아갈 때는 합승 마차를 타는 게 낫겠어.’

마차를 타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거리가 가까운 편이지만, 괜히 어두운 거리를 걷는 것보다야 돈을 주고서라도 마차를 타는 게 마음은 편할 것 같았다.

“앞으로도 우리 밀리언 잘 부탁드려요.”

인심 좋게 웃는 펜던스 남작 부인을 따라, 식탁에 둘러앉은 손님들도 웃음 지었다.

사실 밀리언을 가르치는 모든 선생이 이 저녁 식사에 참석한 건 아니었다. 리브가 보기에 지금 이 자리에는 적당히 수준이 맞는 사람들만 모아 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신분이 엄청 높거나, 권위가 있는 선생들은 아예 보이지 않는 것이다.

서로 통성명을 하진 않았다지만 대강 밀리언이 누구에게 무얼 배우고 있는지는 들은 바가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선생들은 물론 각자의 자리에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겠지만, 아마도 리브와 같은 평민일 가능성이 컸다.

그런 의미에서 카밀이 한 식탁에 앉은 건 정말 의외이기도 했다.

카밀은 펜던스 남작 부부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이 자리에 있는 선생 중 남작 부부와 제일 친밀해 보였다. 그가 이들 중 가장 늦게 고용되었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최근 미술품 구매 문제나 추기경을 대접하는 일로 자주 만났다던 게 저런 결과를 낳은 듯했다.

리브가 조용히 물을 마시며 카밀을 바라보았다. 남작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던 카밀이 그 시선을 느꼈는지, 리브 쪽을 돌아보았다. 미처 눈길을 피할 사이도 없었다.

리브와 눈이 마주친 그가 입매를 씩 끌어 올렸다. 살짝 찡그린 콧잔등에서는 앉은 자리가 멀지만 않았으면 당장 말을 걸고 싶다는 듯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러나 리브는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카밀과 나눌 대화라고 해 봐야….

‘아.’

그러고 보니 카밀이 사교계 소식에 능통하다 했던가. 그렇다면 후작에 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원래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면.’

차라리 후작에게 문란한 뒷소문이라도 있다면 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정말 그런 소리를 들으면 별로 달갑지는 않겠지만, 차라리 그가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를 희롱하려는 작정이라면 대처하기도 쉬웠다. 저를 희롱해 오는 인간을 대하는 일이야 이미 몇 번이고 해 보았으니까.

식사가 끝나면 아마도 디저트를 먹으며 편히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리브는 그때 카밀에게 넌지시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듣고 싶은 게 정말 후작의 문란한 뒷이야기인지는, 끝내 장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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