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의 시선을 느낀 코리다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아, 나도 같이 가.”
코리다를 후작과 직접 마주치게 하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닐 것이다. 후작은 냉담하고 비사교적이기로 이름 높은 남자이니까. 그런 남자가 느닷없이 의사를 소개해 주는 호의를 보였다고 하면 세상 물정에 밝지 않은 코리다라고 해도 이상함을 느낄 터였다.
게다가 후작의 입장에서도 굳이 코리다를 만나 줄 이유가 없을 테지. 리브는 지체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돼. 그… 언니가 다녀올 동안 혼자 괜찮겠어?”
“나 인사 안 해도 되는 거 맞아?”
“괜찮습니다, 코리다 양.”
필립이 곁에서 부드럽게 코리다를 만류했다. 아돌프 역시 부담가지지 않아도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눈치를 보던 코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혼자 있을 수는 있는데….”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혹시 코리다 양이 걱정되신다면, 저도 자리를 지키도록 하지요.”
아돌프가 리브를 달래려는 듯 말했다.
리브는 잠시 고민했다. 필립이나 아돌프가 코리다에게 새삼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았다. 바로 직전에 티에리의 진찰까지 받았는데, 새삼 나쁘게 굴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이 모든 건 후작의 명령 아래에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그러니 코리다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건 후작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기도 하겠지.
“얼른 다녀올게, 코리다.”
“응,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그래, 빨리 다녀오자.
그렇게 마음을 정한 리브가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아돌프가 하인 하나를 붙여 준 덕에 그녀는 헤매지 않고 후작을 찾아갈 수 있었다. 후작은 저택 가장 위층 개인 휴게실에 있었다.
창가에 기대선 그는 시가를 물고 있었는데, 열린 창문 너머로 뿌연 연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진찰받았다고?”
“네, 배려해 주신 덕분에 잘 받았습니다.”
“거트루드 박사는 조금 까탈스러운 면이 있지만, 실력이 좋아서 믿고 맡길 수 있지. 듣자 하니 선생의 인사를 제대로 안 받아 줬다던데?”
소식이 빠른 걸 보니 실시간으로 누군가 말을 전한 모양이었다. 애초에 본인의 주치의를 직접 소개해 준 것이니 같은 공간에 없었어도 관심을 둘 법했다.
놀라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인 리브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런 건 괜찮습니다. 코리다만 제대로 봐주신다면.”
자신이 한 호언장담을 증명하듯, 진찰하는 내내 티에리는 아주 진지했다. 코리다의 병에 관해 섣부른 진단을 내리지도 않았고, 사소한 증세 하나하나를 기록했다.
피를 조금 뽑긴 했지만, 그건 과거에 했던 사혈과는 달랐다. 바늘로 손가락 끝을 찔러서 필요한 만큼만 챙긴 게 끝이었다. 청진기를 사용할 때에도 코리다의 의사를 물었고, 신체에 손을 댈 때마다 미리 동의를 구했다.
그 태도에 코리다는 상당히 안심한 눈치였다. 처음 진료가 시작될 때만 해도 뻣뻣했던 코리다의 태도는 나중에는 상당히 풀어졌다.
“진료 결과는 듣지 못했나?”
“당장은요. 몇 가지 확인을 하려면 시일이 좀 필요하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렇군. 결과는 나오는 대로 선생에게 전달하라고 이르지.”
진료가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도 잠시, 후작의 말을 듣자 다시금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행여 진단 결과가 나쁘면 어떡하지. 그동안 먹은 약이 아무 소용 없었다면, 몇 년 사이에 몸이 더 나빠졌다거나, 자신의 간병에 문제가 있다거나….
리브가 무섭게 부풀어 오르는 안 좋은 생각들을 애써 밀어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할 걱정은 아니었다. 지금 그녀는 혼자 있는 게 아니니까.
리브는 두 손을 맞잡은 채 본래 하려던 감사 인사를 뒤늦게 뱉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너무 큰 도움을 주셔서….”
“앉게.”
리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후작이 소파로 턱짓했다.
앉는 순간 다리가 풀렸는지, 소파 쿠션이 풀썩 내려앉는 소리가 조금 크게 울려 퍼졌다.
“누가 보면 선생이 환자인 줄 알겠군.”
리브가 다소 붉어진 얼굴로 반박했다.
“방금은 실수였습니다.”
“선생의 얼굴이 얼마나 창백한지 몰랐다면, 거울을 보여 주지.”
다소곳하게 앉아 있던 리브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내내 창가에 기대서 있던 후작이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반쯤 탄 시가를 재떨이에 툭, 던지듯 내려 둔 그가 그 옆에 있던 시가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느긋한 손길로 시가 하나를 꺼낸 그가 캡을 잘라 낸 뒤 리브의 곁으로 다가왔다.
손수건을 건네주었던 그때처럼, 무심하고 대수롭지 않은 손길이 리브에게 내밀어졌다.
“향을 맡으면 의외로 기분이 좀 나아지거든.”
얼떨결에 시가를 받아 든 리브가 당황한 눈으로 후작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무심한 눈과 마주친 순간, 리브는 불에라도 덴 듯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두꺼운 시가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던 그녀가 입술 끝으로 조심스럽게 시가를 물었다.
냄새야 곧잘 맡았지만 직접 연초를 물기는 처음이었다. 낯설기 짝이 없는 감촉과 맛에 어쩔 줄 몰라 하는데, 후작이 성냥으로 시가 끝에 불을 붙여 주었다.
코앞에서 일렁이는 작은 불꽃을 홀린 듯 응시하던 리브는 별안간 코끝을 톡, 쏘는 따가움과 뜨거운 열기에 반사적으로 시가를 빼 들었다.
“쿨럭, 쿨럭!”
무심코 호흡을 하다가 요령도 없이 시가를 들이마신 리브가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격렬하게 튀어나오는 기침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기침을 하고서야 그녀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손에 들린 시가는 그 와중에도 발갛게 불이 붙어서 타고 있었다.
“아, 선생에게는 너무 어려웠나.”
후작은 처음부터 리브의 반응을 예상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리 태연할 수 있을까?
기침을 하는 바람에 뺨과 눈가가 붉게 물든 리브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후작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시가를 가져갔다.
“그렇다면 먼저 배워야겠군.”
그는 리브가 조금 전까지 물고 있던 시가를 능숙하게 빨아들였다. 연기를 입 안으로 굴리다가 뱉은 후작이 시가를 들지 않은 손으로 리브의 턱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그 힘을 따라 리브의 턱이 위로 올라가고, 후작과 눈이 마주쳤다.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시가의 연기가 코끝을 매캐하게 찌르고 시야를 뿌옇게 흐렸다. 그러나 그 독한 연기를 신경 쓸 정신은 온통 다른 곳으로 향했다.
입술을 내리누르는, 다소 거칠고 습윤한 감촉으로.
“……!”
무방비하게 벌어져 있던 입술 사이로 아까와 다른 뜨거움이 파고들었다. 방금 시가를 피운 까닭에, 타액에는 향기가 섞여 있었다. 단지 맵기만 하던 향에서는 씁쓸하고 건조하게 메마른 잎사귀의 흔적이 느껴졌다.
당혹감과 충격으로 굳어 있던 리브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코앞에서 후작의 얼굴을 보니 자극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야를 차단하자 촉각이 더 예민하게 살아났다.
입 안으로 침입한 혀는 그녀의 혀를 부드럽게 휘감고 점막을 쓸어내렸다. 느리고 진득한 움직임에 온 신경이 한곳으로 쏠렸다. 그의 혀끝이 어디를 어떻게 짓누르고 문지르는지, 너무도 선연하게 느껴졌다.
속수무책으로 밀려오는 감각이 점점 전신으로 번졌다. 누군가 등줄기를 긁어내리기라도 한 듯, 오싹한 소름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흐읏….”
헐떡이던 입술 사이로 울음 같은 숨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마치 신호가 된 것처럼, 부드럽게 맞물려 있던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아까보다 더 강하게 미는 힘에 리브의 상체가 뒤로 밀려났다. 그러나 뒤로 물러났음에도 입술이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강하게 맞붙었다.
입 안을 유영하듯 휘젓던 혀가 그녀의 혀를 옭아매고 떨어지지 말라는 듯 빨아들였다. 턱을 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 게 느껴졌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입가를 타고 흘렀다. 뜨겁게 얽히는 숨에 시가 냄새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점점 더 기울어지는 상체가 균형을 잃을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넘어지지 않고자, 리브는 본능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내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손안에 셔츠의 부드러운 촉감이 구겨지는 순간, 숨소리마저 빼앗아 가던 힘이 비로소 떨어졌다.
그녀의 턱을 단단하게 움켜쥐고 있던 힘도 사라졌다. 숨을 크게 들이켠 리브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잠시 굽혔던 허리를 펴면서 멀어져 가는 후작의 모습이 느린 움직임으로 보였다.
타액으로 인해 번들거리는 입술이 아니었다면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우아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나마 조금 전 리브가 매달릴 것처럼 움켜쥐었던 가슴팍이 구겨져 있는 게 그에게 남은 흔적이었다.
입술을 뗐음에도 쉽사리 숨을 고르지 못한 채로, 리브가 후작을 멍하게 보았다. 후작은 꽤 타들어 간 시가를 아무렇지 않게 테이블 위로 짓이겼다.
“제대로 배웠을지 모르겠군.”
비싼 테이블 위에 새카맣고 동그란 흔적이 남았다. 아직 연기가 가시지 않은 시가를 그 위에 툭 던진 후작이 완전히 리브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고서야 리브는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렸다.
“…배우…다니요?”
“입 안에서 연기를 어떻게 굴려야 할지 말일세.”
입술에 남아 있던 타액을 손수건으로 닦아 낸 그가 구겨진 제 가슴팍을 발견하고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손날로 툭툭, 쳐서 구겨진 부분을 대강 펼친 그가 테이블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작게 포장된 알사탕이었다.
“내가 누굴 가르쳐 본 적은 없어서 이 수업의 성과를 모르겠는데.”
아까 시가를 쥐여 주었던 리브의 손에 동그란 알사탕을 대신 쥐여 준 후작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리브를 응시했다.
“성실하니 복습은 잘 하겠지.”
삐뚜름하게 올라간 입매는 지극히 오만했으나,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리브는 손안에서 느껴지는 알사탕을 꽉 움켜쥐었다. 그것이 마치 유일한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사탕이라도 쥐고 있으면 이 늪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처럼,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