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42)화 (42/138)

다시 누드화를 그리기로 한 날이 되어 브레드의 작업실을 찾아갔으나 그는 작업실을 잠그고 자릴 비운 상태였다.

한 주는 그렇다 쳐도 두 번씩이나 연속으로 작업을 하지 않다니….

평소라면 그가 걱정되어서 수소문이라도 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리브는 브레드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작업이 취소된 김에 코리다를 데려오라는 전언을 받았기 때문이다. 진료에 관해서는 아돌프의 이름을 들먹이며 코리다에게 말을 둘러댔다고 했더니, 아돌프가 직접 그들을 데리러 왔다.

그리고 그것이 코리다의 마음을 조금 안심시킨 듯했다. 게다가 아돌프는 말재주가 좋아서,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가벼운 사담으로 코리다의 긴장을 풀어 주기까지 했다.

저택에 도착할 즈음, 긴장으로 굳어 있던 코리다의 얼굴은 완전히 풀어졌다.

“자, 드디어 도착했군요.”

“와….”

눈앞에 펼쳐진 베리워스 저택의 풍경에 코리다가 입을 벌렸다. 리브는 그런 코리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그녀가 충분히 감탄할 수 있도록 그냥 두었다.

두 번째 방문이지만,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니까.

“안녕하십니까, 로이데스 양.”

미리 입구에 나와 있던 필립이 리브와 코리다를 향해 정중한 인사를 건네왔다.

“귀여운 손님도 오셨군요. 베리워스 저택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집사인 필립 필몬드입니다. 편하게 필립이라고 불러 주세요.”

“안녕하세요, 필립 할아버지. 저는 코리다 로이데스라고 합니다. 코리다라고 부르셔도 좋아요.”

거리낌 없이 필립을 부르는 코리다의 모습에 기겁한 리브가 그녀를 만류하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필립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감사합니다, 코리다 양. 저택에 관해서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저에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아, 혹시 과일 타르트 좋아하십니까?”

“좋아해요!”

“다행이군요. 오늘은 딱 맞춰서 준비해 두었답니다.”

마지막 말은 리브를 향해 건네는 말이었다. 필립을 향해 민망한 미소를 지어 보인 리브가 코리다의 손을 잡은 채 저택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돌프는 잠시 보고를 하고 오겠다며 먼저 들어갔기에, 그들을 안내해 주는 건 필립이었다.

응접실로 가는 내내 코리다의 입은 다물어질 일이 없었다. 예전에 리브가 입주 가정 교사로 근무할 때 귀족의 저택을 방문해 본 적이 있다지만, 그때 지냈던 저택은 이렇게 화려하고 크지 않았던 탓이다.

“잠시 이쪽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벽난로를 지펴 두어서 그런지, 응접실 내부는 훈훈했다. 리브와 코리다가 자리에 앉자마자 하녀들이 재빨리 다과를 준비해 주었다. 생전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아 본 적 없는 코리다는 마냥 신기하다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코리다는 하녀들이 물러나자 리브를 향해 슬그머니 상체를 기울이며 속닥거렸다.

“언니, 이 저택 주인이 우리를 돕고 싶다는 그 사람 맞지?”

“응.”

“언니는 만나 봤어? 어떤 분이야?”

“…그냥 마음씨 좋은 분이야.”

리브의 대답에 코리다가 의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우리가 불쌍해서 도와주겠다는 거야? 그런 사람이 있어?”

“안타까우니 그러시는 거지.”

“아니, 아무리 봐도 이상하잖아.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혹시 다른 걸 원하는 게 아닐까?”

화려한 풍경에 홀려 마냥 넋을 놓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내심 의아한 마음을 품은 모양이었다.

“다른 거?”

“응. 언니의 미모를 보고 반했다던가….”

진지하게 궁리하는 코리다의 모습에 리브가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정답은 아니지만 묘하게 핵심에 가까운 소리를 듣자 부정의 말이 단박에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도 리브가 대답하기 전, 응접실 문이 열리며 아돌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아돌프의 뒤로 처음 보는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외알 안경을 쓴 그녀는 다소 깐깐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깡마른 중년 여성이었다. 드문드문 흰머리가 섞인 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깔끔하게 올려 묶은 그녀는 손에 왕진 가방을 들고 있었다.

“이쪽은 티에리 거트루드 박사입니다. 오늘 코리다 양의 진찰을 봐주실 분이죠. 거트루드 박사, 이쪽은 보호자인 리브 로이데스 양, 그리고 그 옆이 환자인 코리다 로이데스 양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티에리는 다소 거만한 얼굴로 리브와 코리다를 보았다. 리브가 얼른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으나, 그녀는 악수를 받는 대신 그 손을 빤히 보기만 했다.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그 태도에 리브는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었다. 다만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훌륭한 실력을 가진 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박사님의 진찰을 받게 되어 영광이에요.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코리다, 양이라고요?”

티에리의 시선이 코리다에게 꽂혔다. 바짝 긴장해서 굳어 있던 코리다가 그 시선을 받고선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리브의 옷자락을 꽉 움켜쥔 코리다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다가 티에리의 손에 들린 왕진 가방을 보고선 훨씬 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 감탄하던 모습이 전부 거짓이었던 양, 코리다는 잔뜩 겁먹은 상태였다. 단순히 티에리의 냉담한 태도 때문은 아니었다.

티에리가 들고 있는 저 왕진 가방은 대체로 의사들이 들고 다니는 보통의 가방과 같은 형태였다. 그러니 저것을 보고선 과거의 일을 떠올린 게 틀림없었다.

소극적인 코리다의 모습에 티에리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그 태도를 본 리브가 코리다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의사에 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습니다. 아이가 겁먹어도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티에리의 표정에 처음으로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눈썹을 치켜올린 티에리가 리브를 마주 보았다.

“어떤 기억이죠?”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던 리브가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과도한 사혈을 시도했어요.”

“그리고요?”

“그 일로 목숨이 위험해지자 절개술을 강요했고요.”

“절개술? 전해 들은 증상으로만 비추어 봤을 때 절개술은 필요 없었을 텐데.”

“그는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머릿속을 확인해 봐야겠다고 했어요.”

코리다가 작게 숨을 되삼켰다. 그러나 리브는 이를 악물고 최대한 침착하게 그때의 상황을 직설적으로 전달했다. 듣기 좋은 단어로 꾸며서 말하는 게 티에리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으리라는 걸 짐작한 까닭이었다.

차라리 코리다가 가진 부담감을 정확하게 알려 주고 최대한 의사로서 전문적인 자세를 가져 주길 기대하는 게 나았다.

리브의 가감 없는 설명에 아돌프는 안쓰럽다는 얼굴로 탄식했고, 티에리는 잠시 침묵했다.

티에리의 시선이 다시금 코리다에게로 향했다. 아까보다는 훨씬 누그러진 시선이었다.

“솔직히 어린 환자는 처음입니다.”

“네?”

“하지만 처음이라는 게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내 실력은 아주 좋아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인간들의 숨을 붙여 놓은 적도 많고. 어딜 가든 나보다 더 실력 좋은 의사를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티에리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거만함도 없었다. 그녀는 정말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것처럼 건조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해 줄 수 있어요. 과거에 만났던 그 돌팔이는 의사가 아니라 자기 호기심에 환자를 이용하려는 미치광이였을 거예요. 나는 미치광이가 아니라, 의사고.”

성큼성큼 리브의 앞으로 다가온 티에리가 왕진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의사가 하는 일은 환자를 살리고 치료하는 것뿐이에요. 그걸 위해 환자는 의사를 신뢰할 필요가 있죠. 나를 신뢰하라고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과거에 만났다는 그 미치광이와 나를 동급으로 취급하는 건 사양합니다.”

티에리의 시선이 리브의 뒤쪽에 숨은 코리다에게로 향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던 코리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티에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내게 진찰을 받을 의향이 있나요, 코리다 로이데스 양?”

멍하게 티에리를 보던 코리다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겁에 질렸던 얼굴은 많이 진정된 상태였다.

그 광경을 보던 리브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뱉었다. 적어도 티에리는 과거에 만났던 그 돌팔이보다는 훨씬 더 멀쩡한 사람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후작의 주치의라더니, 과연 그럴 만했다.

동시에 리브는 무심코 생각했다. 후작을 보고 싶다고. 감사 인사를 해야 하니까….

아니. 감사 인사를 핑계로, 그를 보고 싶다고.

***

리브는 코리다가 이토록 사교성이 좋은 줄은 몰랐다.

아니, 그동안 이웃들과 곧잘 지내던 코리다였으니 어렴풋하게 짐작은 하고 있었다. 아돌프와도 그렇게 단숨에 가까워진 전적이 있고.

그러나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늘 사람들과 적정한 거리를 두고 예의를 지키려 하는 리브와 달리, 코리다는 자신에게 내밀어지는 호의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줄 알았다.

“디저트가 입에 맞아서 다행입니다. 하하.”

넉살 좋은 필립은 별 어려움도 없이 코리다와 친해졌다. 아돌프에게는 그래도 집주인이라는 자각이 있어서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는 것 같았는데, 필립에게는 아예 인심 좋은 동네 할아버지처럼 대하고 있었다.

필립은 그런 코리다의 태도를 오히려 기껍게 여기는 듯했다.

“정말 맛있어요. 시내에 가게를 내면 손님이 끊이지 않을 거예요!”

“이반이 들으면 아주 기뻐하겠군요. 아, 이반은 저택의 총주방장입니다. 다들 그의 요리에 별다른 감상평을 내 주지 않아서, 언제나 아쉬워하고 있지요.”

“저라면 온종일 감상평을 들려드릴 텐데요!”

“하하하, 기회가 된다면 꼭 이반을 소개하고 싶군요. 그는 모든 요리를 다 잘한답니다.”

마치 이 저택에 수십 번은 와 본 사람처럼 긴장을 풀고 있는 코리다를 가만히 보던 리브가 긴 숨을 내쉬었다. 괜히 겁먹고 긴장하느니 차라리 저렇게 편히 있는 게 나을 것이다.

“로이데스 양, 잠시 주인님을 뵙고 오시겠습니까?”

필립과 마찬가지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하고 있던 아돌프가 리브에게 넌지시 말을 걸어 왔다.

그러지 않아도 후작을 만나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리브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코리다를 향해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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