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41)화 (41/138)

부에르노에 디무스의 이름이 퍼진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그래, 그게 벌써 몇 년째이니 어떤 식으로든 소문을 들었겠지. 그러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디무스가 피로한 미간을 문질렀다.

무심코 내딛던 걸음은 복도를 지나 롱 갤러리에 다다랐다. 다른 저택이라면 가족화나 초상화를 걸어 두었을 만한 장소였으나, 디무스는 이 롱 갤러리를 무기로 가득 채웠다. 온갖 종류와 총, 칼이 벽에 걸리거나 유리관에 들어 있었다.

어떤 것은 무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화려해서, 장식품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또 다른 것은 보관하고 있는 게 의아할 정도로 낡고 허름했다. 닦아 내지 않은 핏자국이 섬뜩하게 엉겨 붙은 것도 있었다.

차곡차곡 내걸린 총과 칼을 눈에 담으며 롱 갤러리를 가로지르던 디무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가늘고 긴 검신이 아름답게 빛나는 예장 검 앞이었다.

이 검을 하사받은 날은, 그가 진급하던 날이었다. 모든 게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날. 앞으로 제 앞에 남은 게 눈부신 명예와 영광뿐이라고 여겼던 때.

그때의 디무스는 순진하고 어리석은 청년이었다. 과거를 회상하는 디무스의 얼굴에 노골적인 조소가 떠올랐다.

저 번지르르한 예장 검이 불러일으킨 건 쓸모없는 질시뿐이었다.

“젊은 혈기에 휩싸여 상황 판단이 느릴 수도 있지. 하지만 소령, 그런 어리광을 이해해 주는 건 어머니뿐이지 않겠나.”

맞아, 그런 소리도 들었었지.

“아, 소령의 어머니께서는 그만한 소양도 없었다고 했던가? 부랑아로 태어난 주제에, 도대체 소령의 뒷배가 누구인지 궁금하군.”

기억 속에 남은 악질적인 음성들은 이제 디무스에게 어떤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조롱에 분노할 나이는 진즉 지난 까닭이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다고 하여 다시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는 그들이 성가셨고, 몇 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다시 저를 끌어들이려는 모든 수작이 우스웠다.

아무래도 경비를 늘리는 게 좋겠다. 그들이 부에르노를 방문하는 것까진 디무스가 막을 수 없겠으나, 제 저택을 숙박업소로 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예 자리를 비워야 하나.’

방문 기간에 맞춰서 한, 보름이나 한 달 정도.

불쑥 든 충동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과거의 흔적들에 쫓겨 도망치는 듯한 그 모양새가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패배의 치욕감은 한 번이면 족했다.

잠시 멈추었던 디무스의 걸음이 다시 움직였다. 별다른 목적 없이 걷던 조금 전과 달리, 지금은 명확한 목적지를 가진 걸음이었다.

성큼성큼 걸어 도착한 곳은 저택의 지하였다. 지하로 내려서자 한층 더 차가운 공기가 디무스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 차가운 공기를 제외하면, 저택의 다른 공간과 다를 바 없이 아름답게 꾸며진 곳이었다. 디무스가 시선을 들어 벽을 느리게 훑었다.

그간 모아 온 온갖 누드 작품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나체들을 무심하게 훑어보던 디무스가 문득 한 곳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리브 로이데스….”

그가 산 브레드의 첫 번째 그림. 그가 리브 로이데스라는 여자의 뒷모습을 처음 보았던 바로 그 그림이었다.

작품이면 족하던 그가 난생처음 살아 있는 모델을 궁금하게 여겼던, 그 계기.

아직도 디무스는 그때의 감정이 신기했다.

리브 로이데스와 마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가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도록 만들었다. 가장 최근에도 그랬다.

사냥터에 가서 그렇게 빨리 돌아온 적이 있었던가.

딱히 무언가를 기대하고 그녀를 사냥터까지 대동한 건 아니었다. 그냥 눈앞에 보이니 짐짝처럼 챙긴 것에 가까웠다. 아마 그녀도 사냥터에서 본인이 무언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금방 알아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쓸모없는 제 존재를 쓸모 있게 만들었지.

늘 제 두 눈으로 죽어 가는 숨을, 대지를 붉게 적시는 피를, 비린 피 냄새를 보아야 끝나던 그 충동이 황당할 정도로 쉽게 잠들었다. 겨우 그녀와의 대화로 인해서.

그날 디무스는 난생처음 살심을 이기는 성욕에 휩싸였다.

생각만으로도 아래가 다시 뻐근해졌다. 제 몸뚱이에서 느껴지는 즉각적인 반응에 디무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온몸의 흉터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운 느낌도 전부 성적 자극으로 치환되어 가는 듯했다. 감각은 나날이 예민하고 심각해졌다.

‘한번 자면 나아지려나.’

그런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그러나 디무스는 제 성정을 잘 알았다. 이렇게 들끓는 욕망이 겨우 한 번으로 잦아들 리가 없질 않나.

게다가 이 성욕은 울고 거부하는 여자를 억지로 범하는, 그런 야만적인 충동이 아니었다. 그런 종류였다면 진즉 해결했겠지. 이건 그보다는 더, 정신적인 충족감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는 늘 완벽한 승리를 추구해 왔다. 적어도 부당한 권력이 개입하지 않은 상황에서 디무스는 언제나 승리했다. 전투에 임하기 전, 승리할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을 형성해 두는 건 그의 오랜 습성이었다.

누드화를 물끄러미 보던 디무스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어느 날부터인가 목구멍을 태우는 갈증이 그의 신경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참을 만했다.

어차피 그녀는 제 앞에 스스로 무릎 꿇고 굴복할 것이다. 그는 그것을 확신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양 굴던 게 전부 거짓말인 것처럼, 속절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스스로 그의 성기를 입에 물고자 매달릴 것이다.

아, 승리를 상상하는 건 여전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

“선생님! 칼리오페 추기경께서 부에르노에 방문하신다는 소식 들으셨어요?”

오늘도 밀리언은 수업과 전혀 관련이 없는 화제를 끄집어냈다. 흔들림 없이 책을 펼치는 리브의 모습에도, 밀리언은 꿋꿋하게 화제를 이어 갔다.

“어쩌면 이번에 부모님이 추기경님을 모시게 될지도 몰라요!”

이번에는 무시하지 못했다. 절대 반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리브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시선을 들었다.

“펜던스 남작가에서?”

“네! 부에르노에 우리 집만큼 괜찮은 곳은 없으니까요!”

리브의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자신만만하게 턱을 치켜든 밀리언이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곤 멈칫했다. 눈을 도르르 굴려서 시선을 피한 그녀가 새침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물론 디트리언 후작님이 계시지만, 그분은 원래 도시에 누가 방문하든 신경 쓰지 않으시던 분이니까요. 블레즈 가문은 저택이 부에르노 시내와 너무 거리가 멀어서, 추기경님이 오가시기 좋지 않고요.”

“하지만 추기경님의 동행인들이 많지 않나?”

“에이, 그 정도쯤이야 별채를 전부 개방하면 되죠!”

그래, 설사 건물이 부족해도 펜던스 남작가라면 추기경을 모셔야 한다며 없던 건물을 뚝딱 지어 내겠지.

리브는 쓸데없는 걱정을 버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펜던스 남작가는 부에르노 중심가에 있는 것치고 상당히 넓은 부지를 차지했다. 부에르노 인근 마을 쪽에 위치한 블레즈 백작 가문의 저택보다 오가기는 나을 터였다.

“추기경님을 모시게 된다면 큰 영광이겠네.”

“그러니까요!”

“하지만 추기경님이 직접 오신다면, 디트리언 후작님께서도 나설 수밖에 없으시지 않을까?”

그가 아무리 모든 이를 발아래로 보는 오만한 남자라고 해도 말이다.

나라마다 넘쳐흘러서 명예직 취급을 받기까지 하는 온갖 귀족들과 달리 추기경은 사제 중에서도 특별히 선출되는 극소수의 성직자였다. 장차 교단을 이끌 수장이 될 수도 있는, 아주 높은 고위 성직자.

제아무리 대단한 귀족이라도 성직자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국가에 속하지 않고, 교단에 속한 몸이니까. 그리고 대다수 나라가 교단의 종교를 국교로 채택한 상황이고.

“하지만 그동안 디트리언 후작님은 한 번도 손님을 받으신 적이 없댔어요. 아무리 높으신 귀족이 수도에서 와도 소용없었다고요.”

“추기경님은 좀 다르잖아.”

물론 그가 예배당에서 했던 말들을 떠올리면, 그에게 신심이라고는 티끌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리브는 자신이 방문했던 후작의 저택들을 떠올렸다. 기껏해야 두 군데지만, 하나같이 아름답고 거대한 저택들이었다. 그가 본가인 랑제스 저택에 손님을 들이지 않는다더라는 말은 그녀 역시 들었으나 다른 저택들도 충분히 멋지니, 그중 하나만 열어도 충분할 것 같았다.

“사실 제가 이렇게 확신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이유?”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걸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밀리언이 비밀 이야기를 하듯,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추기경님을 모시고 오는 귀족 중에, 카밀 선생님이 아는 분도 있으시대요!”

“…마르셀 선생님이?”

“네!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 집으로 모시겠죠! 원래 아는 사람이 있는 곳이 더 편한 거잖아요!”

이번에는 정말로 예상치 못한 내용이라, 리브는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카밀이 발이 넓은 귀족일 거라고 짐작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추기경을 모실 정도라면 꽤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의 사람일 텐데.

그런 사람과 알고 지낸다니, 카밀은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인 걸까? 그런 사람이 왜 이런 시골 도시에서 미술 선생이나 하고 지내는 거지?

“그것 때문에 요즘 카밀 선생님이 거의 매일 부모님과 만나고 계세요. 이젠 제 수업 시간보다 부모님 뵙는 시간이 훨씬 많다니까요? 아마 지금도 아버지 집무실에 계실걸요?”

“그렇구나.”

신기한 우연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리브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것은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불분명하면서도, 무시하기에는 어딘가 껄끄럽고 거슬리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깊이 고민해 봐야 리브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카밀이 이상하다는 게 그녀와 무슨 연관이 있겠는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따끔거리는 위화감을 애써 무시하며, 리브가 교재로 시선을 돌렸다.

추기경이니 귀족이니, 전부 리브의 인생과는 동떨어진 사람들이었다. 그보다는 조만간 의사의 진찰을 받게 될 코리다를 걱정하는 게 훨씬 생산적인 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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