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지만 명료한 음성으로 대답한 리브가 눈을 들었다.
후작의 얼굴에 이제 미소는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리브를 바라보는 시선은 언뜻 냉담하고 차가웠으며, 어딘가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끊기자, 그 사이를 숲의 새소리와 벌레 울음소리가 채우기 시작했다. 몇 방의 총성으로 인해 소란스러워졌던 게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평화롭고 일상적인 소리였다.
“다들 돌아오라고 신호해. 끝내지.”
불현듯 후작이 들고 있던 총을 하인에게 건넸다. 그 모습을 본 리브가 의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냥은….”
아직 제대로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리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후작이 빠르게 대꾸했다.
“방금 선생이 말하지 않았나. 벗으라 하면 벗겠다고.”
냉담한 벽안이 리브를 똑바로 직시했다.
“아니면, 야외가 좋나?”
새빨개진 얼굴의 리브는 조용히 말고삐를 쥐었다.
***
리브는 이번에야말로 그가 저에게 다른 행위를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그녀의 나신을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다만 이따금 초조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탁자를 빠르게 두드리거나 시가 끝을 이로 짓씹었다. 무언가를 고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리브는 늘 그렇듯 온전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언니!”
나갈 때까지만 해도 곤히 자고 있었던 코리다는 말똥말똥한 얼굴로 리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귀가한 리브를 본 코리다가 미간을 좁히며 득달같이 다가왔다.
“뭐야, 오늘은 수업 없는 날이잖아. 갑자기 어딜 다녀온 거야? 자고 일어나니까 언니가 없어서 얼마나 놀랐는데!”
“미안, 코리다. 요즘 하는 추가 근무 때문에 급히 가 볼 일이 있었어.”
입술을 삐죽거리며 잔소리를 더 늘어놓으려던 코리다에게, 리브는 대뜸 들고 온 것을 안겨 주었다. 저택을 나오기 전 필립이 챙겨 준 바구니였다.
바구니에서 풍기는 달콤한 냄새에 코리다는 화내던 것도 잊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상에, 이게 뭐야?”
“이야기가 잘 풀려서, 업무가 좀 늘어나게 됐어. 앞으로 출근하는 날이 더 잦아질 거야.”
“그래서 지금 나 혼자 있어야 한다고 미리 이런 뇌물을 주는 거야?”
투덜거리면서도 바구니를 여는 코리다의 얼굴은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바구니 안에는 리브가 다과 때 먹었던 스콘과 초콜릿, 그리고 갓 만들었다는 타르트가 가득 들어 있었다.
“대화를 나누시느라 다과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신 것 같아 챙겼습니다. 부담 가지지 마시고, 또 방문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필립은 그렇게 말하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리브가 아니면 달리 먹을 사람이 없으니 꼭 받아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는 그에게 휩쓸려 얼결에 바구니를 들고 온 그녀는, 탄성을 뱉는 코리다를 보며 내심 안도했다.
그래, 어차피 자신에게 주겠다며 만든 것이니 맛있게 먹어 주면 될 일이지.
“그리고 코리다, 먹으면서 들어.”
“응, 뭔데?”
“그, 어떤 분이 우리 사정을 듣고 도움을 좀 주고 싶어 하셔.”
“도움?”
타르트를 입 안 가득 넣고 오물거리던 코리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코리다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손으로 털어 주며, 리브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력 좋은 의사를 소개해 주시겠대.”
힘차게 움직이던 입이 뚝 멈추었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던 코리다가 힘겹게 타르트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러나 그러고도 무언가 말을 뱉지는 못했다.
복잡한 얼굴을 한 코리다를 이해한다는 듯, 리브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싫으면 거절할 거야. 다른 방법으로도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거든.”
어린 나이에 돌팔이 의사를 만나 목숨이 위태로웠던 코리다다. 당연히 리브보다 더한 거부감을 마음속 깊은 곳에 지니고 있을 터였다.
리브는 돌팔이의 치료가 끝나고도 한동안 그와 비슷한 사람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며 숨던 코리다를 기억했다.
시간이 꽤 지났고, 코리다도 많이 성장했다지만 그 두려움까지 사라졌을까? 리브는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언니가 나에게 이 말을 꺼내는 건, 그분이 그렇게 도와주겠다고 했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눈치 빠른 코리다의 말에 리브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불퉁한 얼굴로 잠시 침묵하던 코리다가 불쑥 질문했다.
“우리를 도와주고 싶어 한다는 그분은 누군데?”
후작의 정체를 그대로 말할 수 없어서, 리브는 잠시 그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래서 리브는 그나마 안면을 익혔던 아돌프의 핑계를 대기로 했다.
“이 집 중개인인 아돌프 씨 기억하지? 그분이 소개해 준 분이야.”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소개해 준다는 의사는 아마도 실력이 정말 좋을 것 같아. 다른 건 안 하고 그냥 진찰만 받는 거고. 네 상태를 다시 확인하려는 거야.”
아마 코리다가 ‘믿을 수 있느냐’고 물은 건 의사가 아니라 그 도와주겠다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리브는 교묘하게 대답을 바꾸었다.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코리다는 이상한 점도 모르고 순순히 넘어갔다.
먹던 것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긴 코리다의 안색을 세심하게 살피던 리브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괜찮겠니?”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무언가 할 필요는 없어. 네가 괜찮다고 하면, 언니와 함께 의사를 만나러 갈 거야.”
코리다는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진찰을 꼭… 해야 해? 그런 거 안 해도 내 상태는 알아서 설명할 수 있는데.”
“네 상태를 정확히 진단해야, 나을 방법도 찾지.”
“이미 먹고 있는 약이 있는데?”
“말했잖아, 신약이 나왔다고. 지금처럼 약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정말 다른 아이들처럼 건강해질 수도 있는 거야. 그걸 위해서 먼저 진찰해서 네 몸 상태를 알아보는 거고.”
리브의 긴 설명을 잠자코 듣던 코리다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코리다가 거절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리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
“언니가 괜찮다고 생각했으면, 괜찮은 거니까.”
그건 리브를 신뢰하기 때문에 진찰을 받겠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리브가 자신에게 나쁠 일을 권유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어쩐지 마음이 찡하게 울려서, 리브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급작스럽게 치민 감정을 내리누른 리브가 코리다를 꽉 끌어안았다.
“응, 다 괜찮을 거야. 언니가 널 지켜 줄 테니까.”
모든 게 좋아지고 있으니까, 코리다의 건강도 분명 좋아질 것이다. 리브는 간절하게 기도했다.
부디 이 선택이 옳은 것이기를.
***
디무스 디트리언 후작은 여러 채의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크고 거대한 건 그가 지내는 본가, 랑제스 저택이었다. 부에르노 시내에서 외곽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사유지에 자리한 커다란 석조 저택이었는데, 성이라고 해도 아깝지 않을 규모였으며 이제껏 어떤 손님도 정문 안으로 들인 적이 없었다. 정문은커녕, 누구든 사유지 근방만 가도 경비들에 의해 저지당하기 일쑤였다.
드넓은 사유지와 숲으로 인해 저택의 외관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덕에 말도 무성했다. 랑제스 저택은 디무스에 관한 온갖 흉흉한 소문의 주된 배경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누구나 한 번쯤 방문해 보고 싶어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 서신의 주인공 역시 그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본래 이렇게 집요하게 구는 사람이 아닌데, 똑같은 소리를 또 하는 걸 보니.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서신을 무시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방문하겠다는 서신을 이렇게 직접 보내온 걸 보면,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웠다는 소리일 텐데. 그 계획 속에 디무스의 의사 같은 건 전혀 반영되지 않았을 테고.
디무스는 조금 성가셔졌다.
“답은….”
“전과 같이.”
필립이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물러났다. 디무스는 그런 그를 힐끗 본 뒤, 들고 있던 서신을 벽난로로 던져 넣었다. 불길에 휩싸인 종이를 무심하게 응시하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긴 복도는 잘 관리되어 아름답고 깨끗했다. 그러나 어딘가 전체적으로 냉기가 감돌았다. 태피스트리나 카펫으로 막히지 않는 그런 차가운 공기가 저택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아무리 벽난로를 지피고 햇볕을 듬뿍 받아도 소용없었다. 이 서늘한 기운은 저택을 구성하고 있는 돌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이곳은 이따금 차가운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를 구속하는 것이 무엇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상 감옥과 다르지 않았다. 이곳에 올 때 그의 몰골이 유배되는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는 걸 상기하자면 더욱.
이곳에 온 지 몇 년이 되었더라.
디무스는 새삼스럽게 시간을 헤아렸다.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세 번째 해는 확실히 넘긴 게 틀림없었다.
첫해에는 분노와 무력감에 사로잡혀 사느라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게 흘렀고, 두 번째 해가 되어서야 겨우 바깥 걸음을 시작했다. 그나마도 그리 활발하지 않은 걸음이었다.
그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부에르노는 특색 없는 시골 도시에 불과했다. 첫해에 그랬듯,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지냈다면 아직까지도 부에르노는 과거의 그 꼴 그대로였으리라.
부에르노가 활발해진 건, 디무스가 미친 사람처럼 미술품을 사들이면서부터였다.
엄청난 수집가가 이곳에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도시로 예술가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대부호의 정체를 궁금하게 여긴 정치가들이 부에르노에서 행사를 열고, 미술관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누구도 ‘디트리언 후작 가문’을 몰랐기에 다들 디무스가 진짜 신분을 숨긴 어느 왕족의 핏줄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