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39)화 (39/138)

“그 말씀은… 횟수가 늘어날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필요하다면.”

의사를 소개받은 것도 모자라, 돈을 더 벌 수 있는 상황까지 마련되었다. 이 저택에 온 지 한 시간도 안 되어서 리브를 괴롭히는 문제들이 거짓말처럼 해결되고 있었다.

심지어 그 해결이라는 것도 후작의 몇 마디 말로 인한 것이었다. 너무 쉬운 나머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리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침묵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후작이 선심 쓰듯 말을 덧붙였다.

“펜던스 남작가에 가는 날은 빼 주도록 하지.”

마치 대단한 양보를 해 준다는 어투였다.

“디저트도 먹어. 남기면 요리사가 무척 서운하게 여길 테니.”

그의 말에 리브가 뻣뻣한 손을 들어 식기를 쥐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잡생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모든 혼란을 밀어내고 점점 존재감을 키우는 건, 깊은 안도감과 감사함, 그리고 희미한 설렘이었다.

후작은 그녀의 생활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남자이고, 그녀는 그런 그의 관심을 샀다.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점점 실감이 났다.

부모님이 죽고 난 뒤, 리브는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의지해 본 적이 없었다. 부양해야 할 여동생이 있는 이상, 그녀는 언제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이어야 했다.

하지만 후작의 곁에 있으면, 그와 계속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주인님.”

생각에 잠겨 있던 리브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노크를 하고 들어온 필립이 후작의 곁으로 다가섰다. 신중한 그의 태도를 보아하니, 리브가 동석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듯했다.

리브는 의식적으로 후작과 필립을 피해 디저트만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귀가 기울여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필립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짤막하게 보고를 했기에, 실상 리브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리브가 괜스레 더 피어오르는 호기심을 꾹 억누르고 있는데, 후작의 신경질적이 중얼거림이 들렸다.

“직접?”

눈에 띄게 예민해진 후작의 얼굴만큼이나, 필립의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걸까. 그렇다면 눈치껏 이 자리에서 비켜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고민에 빠진 리브가 조용히 포크를 놓았다. 요리사의 노고를 생각하면 조금 미안하지만 이 상황에서 한가롭게 스콘을 먹고 있기에는 영 분위기가 나빴다.

“쯧.”

“어떻게 할까요?”

“거절해.”

“하지만….”

필립이 곤혹스럽다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후작은 의사를 철회할 생각이 없다는 듯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내가 그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필립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후작은 입맛이 떨어졌는지, 아예 몸을 일으켰다. 눈치를 보던 리브도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이제 그만 가보겠노라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떠나겠다는 말을 하기 전, 후작이 먼저 그녀를 보지도 않고 말을 건네왔다.

“승마를 배운 적 있나?”

“네? 잠깐 배우기는 했습니다만….”

어리둥절한 얼굴로 선 리브를 힐끗 본 후작이 먼저 서재를 나서며 말했다.

“온 김에 함께 사냥터나 가지.”

그것은 권유가 아니었으므로, 리브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리브의 승마 실력은, 솔직히 형편없었다.

그녀는 운동 신경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학교에 다닐 때 몸을 쓰는 수업에서는 번번이 낮은 점수를 받기도 했다. 덕분에 하마터면 장학금을 놓칠 뻔하기도 했고.

단지 운동이나 승마 같은 것뿐 아니라, 춤 같은 종류에서도 그랬다. 어차피 살면서 대단한 춤 실력을 보여 줘야 할 일이 얼마나 있겠나 싶어서, 당시 학생이었던 리브는 춤을 포기하고 다른 공부에 더 시간을 투자했었다.

지금도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진 않았다.

다만… 승마 정도는 좀 더 열심히 배워 둘 걸 그랬나, 싶은 아쉬움이 들었다.

능숙하게 말을 타는 후작과 비교하면 리브의 말은 거의 기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속도로 걸었다. 그나마도 동행한 하인이 그녀의 말고삐를 잡아 준 덕분에 안정적으로 가고 있는 것이지, 홀로 말을 탔다면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곤욕을 치른다고 해서 후작이 사정을 봐줬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지금 기분이 아주 나빠 보이니까.

후작의 갑작스러운 사냥 선언에 저택 하인들은 신속하게 준비를 마쳤다. 다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어 본 게 아닌 듯했다.

그들은 빠르게 엽총을 준비했고, 몰이꾼을 대기시켰으며, 사냥개도 준비했다. 정식으로 사냥에 나선 게 아니라 부족한 게 많기야 하겠으나, 이만하면 구색은 갖춘 셈이었다.

“이쯤이 좋겠군.”

후작의 말에 몰이꾼과 추적꾼이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아마도 후작이 직접 사냥터 안쪽으로 이동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애초에 리브가 동행한 이상, 사냥감을 직접 쫓기는 수월하지 않겠지만.

그러고 보면 참 이상했다. 리브는 이 사냥에서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였다. 오히려 지금처럼 사냥에 방해가 되는 쪽에 가까웠다.

왜 저를 데리고 왔을까.

조용히 고민하던 리브는, 그나마 가장 가능성 큰 이유가 ‘말 상대’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 사냥터에서 리브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무슨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던 리브는 가장 쉬운 화제를 선택하기로 했다.

“사냥을 좋아하시나요?”

몰이꾼들의 신호를 기다리느라 먼 하늘을 응시하던 후작이 힐끗, 옆을 보았다.

“전혀.”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나온 대답에 리브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냥터가 딸린 저택을 가지고 있을 정도이니 당연히 좋아할 거라고 상정한 터였다. 하물며 기분이 안 좋아지자마자 사냥을 나오지 않았나.

보통 기분이 나쁠 때는 좋아하는 취미 생활 같은 것으로 해소하려 들지 않나?

예상치 못한 답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미처 결정하지 못한 리브가 주춤한 사이, 후작이 짤막하게 덧붙였다.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해야 하니까요?”

“때로는 불가피하게 저질러야 하는 살생이라는 게 있는 법이네, 선생.”

그 순간, 멀리서 푸드덕거리는 소리와 함께한 무리의 새 떼가 날아올랐다. 후작이 늘어뜨리고 있던 총을 들어 단박에 하늘을 겨누었다. 긴 총신은 주저 없이 목표물을 조준했다.

타앙!

가까이에 들려온 총성에 리브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탕, 탕!

연달아 두 발의 총성이 더 울렸다. 매캐한 화약 냄새가 확 풍겨 와서, 리브가 반사적으로 코를 막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총성에 놀란 새 떼가 사방으로 퍼져 날아가는 게 보였다. 문외한인 리브로서는 사냥에 성공했는지 알 수 없었다.

불시에 총을 쏜 후작은 덤덤하게 총구를 내렸다. 그는 나뒹구는 탄피를 힐끔 보고는, 아무렇지 않게 재장전했다.

“총을 쏘는 건 처음 보나?”

“볼 일이… 없으니까요.”

“곱게 컸군.”

이따금 보이던, 애 취급하는 말투였다. 리브는 저도 모르게 발끈해서 곧장 반박했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희미하게 비틀린 입매를 보아하니, 리브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 눈치였다.

딱히 그에게 제 삶의 고달픔을 설명하고 인정받을 필요는 없었다. 말해 봐야 이해나 하겠는가.

그러나 리브는 저를 철모르는 아가씨처럼 단정하는 후작의 태도에 괜히 못마땅해졌다.

“곱게 자랐다면 이런 식으로 후작님과 연을 맺게 될 일도 없었겠죠.”

총신을 재정비하고 있던 후작이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리브의 경직된 표정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면 선생은 그 불행에 감사해야겠군. 덕분에 이 자리에 있게 되었으니.”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을 기뻐하리라고 생각하시나요?”

“응.”

리브가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다물었다.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작이 총으로 관심을 돌렸다.

“아니라면 부정해도 좋아.”

그렇게 말하는 후작은, 본인의 확신이 틀렸다는 생각 자체를 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조금 얄미워서 당장 부정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리브는 입술을 뗄 수 없었다.

단순히 그와 얽힌 여러 가지 이해관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녀는 그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처지이지만 그보다는….

후작의 말은 사실이었다. 리브는 이 자리, 누가 보아도 그와 특별하다고 부를 법한 관계가 되어 가는 지금이 내심 기뻤다.

“후작님 말씀이 맞습니다.”

리브가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던지, 후작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의외라는 듯 저를 보는 후작을 가만히 응시하며, 리브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저로서는 불가항력이라는 걸 후작님께서도 아실 텐데, 굳이 제가 아닌 척해 봐야 소용없겠죠.”

“생각보다 인정이 빠르군.”

“고민은 이미 충분히 했으니까요.”

“고민이라…. 무엇에 관한 고민 말인가?”

“후작님의 관심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관한 고민이요.”

후작은 이제 재미있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흥미롭다는 눈으로 리브를 바라보던 그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받아들이기로 했나?”

“있는 그대로요.”

리브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사실 리브에게는 그것 말고 다른 방도가 없었다.

후작의 관심은 끝없이 거대한 파도였고, 그 앞에 선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휩쓸릴 수밖에 없는 조각배에 불과하니까. 설사 그 파도에 휩쓸려 배가 뒤집히고, 조각나서 깊은 심해로 가라앉게 된다고 한들 소용없었다.

너무 강대한 힘에는 맞서 봐야 부서지기나 할 뿐이다. 때로는 그저 온몸을 맡기는 게 생존 확률을 높이는 방법이었다.

“오라 하시면 오고, 가라 하시면 가고, 도움을 주신다고 하면 도움을 받고….”

“옷을 벗으라 하면.”

“…벗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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