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38)화 (38/138)

후작은 벽난로 근처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편하게 몸을 늘어뜨리고 앉은 그는 한 손으로 책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턱을 괴고 있었다. 오뚝하고 날카롭게 선 콧대에는 투명한 안경이 느슨하게 걸쳐져 있었다.

리브를 가장 놀라게 한 건 그의 차림이었다. 늘 딱딱한 외출복 차림이었던 그는 느슨한 실내복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목 끝까지 단추를 꽉 채우지도 않았고, 장갑을 끼지도 않았다.

“책을 좋아하나?”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후작이 무심한 음성으로 질문했다. 리브는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대답했다.

“좋아하는 편입니다.”

사실 아주 좋아한다고 봐야 했다. 그녀는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배우는 걸 좋아했고, 책은 모르는 지식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므로.

리브의 대답에 후작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는 보고 있던 책을 덮어 가까이 있는 탁자 위로 툭 올려 두었다. 그런 뒤 안경을 벗어 책 표지 위로 대충 던졌다. 일상적이고 작은 행동에 불과한데도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근사했다.

“얼떨떨한 얼굴이군.”

“늘 뵙던 저택으로 부르신 줄 알았습니다.”

“오늘은 작업하는 날이 아니니까. 그 저택은 그림 작업을 하는 날에만 여는 저택이거든.”

리브는 어딘가 삭막하게 느껴지던 작업실 저택을 떠올렸다.

겨우 누드화 작업만을 위해 열기엔 너무 크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또 그 외에 다른 이유로 열릴 만한가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화려하지만 어딘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비하면 이곳은 정말 푸근했다.

“그럼 여기는….”

“그냥 사적으로 사용하는 곳이지. 쓸만한 사냥터도 딸려 있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후작이 턱짓으로 제 맞은편을 가리켰다.

“앉게.”

때마침 서재 문이 열리고, 필립이 이동식 트레이를 밀면서 들어왔다.

본래 집사가 이런 일까지 도맡아서 하나?

리브의 의아한 시선은 느껴지지도 않는 건지, 직접 다과를 준비해 주는 필립의 얼굴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홍차입니다. 바로 어제 좋은 물건이 들어왔는데,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군요. 혹시 몰라 데운 우유도 챙겨왔으니 필요하시다면 말씀하십시오. 그리고 이 스콘은 저희 요리사가 가장 자신 있게 선보이는 디저트입니다. 그 옆의 초콜릿은 수제로 만든 것이라 너무 달지 않고 딱 곁들이기 좋으실 겁니다.”

리브는 친절하게 이어지는 필립의 설명에 저도 모르게 집중했다.

선이 곱고 깔끔한 도자기 찻잔에 붉은 홍차가 쪼르르 담기고, 향긋한 스콘과 초콜릿이 담긴 접시가 놓였다. 스콘에 발라 먹을 크림과 버터, 잼까지 종류별로 준비되었다.

“실은 저희 요리사가 타르트도 아주 잘 만듭니다. 급히 만드느라 미처 준비하지 못하게 되어 아쉽군요. 다음에라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기회는 리브가 만드는 게 아니었기에, 그녀는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트레이로 가져온 다과를 전부 내려놓으니 테이블이 가득 찼다. 자신이 차린 다과를 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은 필립이 후작을 돌아보았다. 턱을 괸 채로 필립의 행동을 가만히 보던 후작이 심드렁한 음성으로 질문했다.

“어쩐 일로 직접 나섰나?”

“나이를 먹을수록 몸을 움직여야지요. 안 그러면 녹슨답니다.”

유들유들한 필립의 대답에 후작이 검지로 미간을 꾹 눌렀다.

“적당히 정리하고 나가 보도록.”

필립은 서재에 남아 좀 더 시중을 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대놓고 아쉽다는 표정을 짓던 필립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인사했다.

“그럼,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디저트를 설명하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가던 필립이 나가 버리자, 서재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찻잔을 드는 것도 조심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무거운 적막이었다. 선뜻 다과에 손을 대지 못하는 리브를 눈치챘는지, 후작이 먼저 잔을 들었다.

“들지. 요리사 솜씨가 나쁘지 않아. 선생 입맛에도 아마 그럴 거고.”

굳이 그런 설명이 아니어도, 그냥 풍기는 냄새만으로도 이미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펜던스 남작가에서 선물로 받았던 고급 과자 같은 건 비교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리브는 디저트의 맛보다는, 당장 자신이 이 자리에 앉게 된 이유가 더 궁금했다.

예의상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리브가 먼저 운을 띄웠다.

“오늘 저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너무 작게 말한 걸까? 후작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리브가 재차 입을 열었다.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우아하게 잔을 내려놓은 후작이 리브를 힐끗 보며 대답했다.

“할 말이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선생일 것 같은데.”

“네?”

“아돌프를 찾아갔다고.”

“아….”

아돌프와의 이야기를 들었구나. 생각해 보면 후작에게 이야기가 전해질 법도 했다. 집주인이 후작이니, 집을 보수했다는 보고야 당연히 올라가겠지.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을 수 있고 말이다.

“처지가 곤혹스러워 보였다고 하더군.”

어디까지 들었을까.

리브는 입술을 물어뜯으며 잠시 침묵했다.

후작에게 도움을 청해 보라고 조언한 건 아돌프였다. 그러니 아마도, 후작이 그녀를 불쌍하게 여길 수 있을 정도의 정보를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불러낸 걸 보면 아돌프가 전한 말이 나름대로 동정을 불러일으킨 걸지도 몰랐다. 만약 그런 거라면….

지금이 후작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기회인가.

“집에 아픈… 여동생이 있습니다. 아마 그 이야기를 하신 모양이지요.”

힘겹게 말문을 열자, 후작이 더 이야기해 보라는 듯 고갯짓했다. 고민하던 리브가 마침내 결심한 듯 조금 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을 먹으면서 버티고 있는데, 이번에 도미니안 의학 연구소에서 신약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약이 어쩌면 제 여동생의 병을 호전시킬 수도 있을 거라는 말을 들었는데…. 제가 달리 알아볼 만한 곳이 없어서요. 만약 정보라도 알 수 있다면….”

“약이라….”

말끝을 늘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후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게 돈이 필요한 이유였나.”

돈이 궁하다는 사정이야 이제 후작 앞에서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내보이는 것이었다. 리브의 침묵을 긍정으로 이해한 후작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까운 가정사군.”

그런 것치고, 후작의 어조는 무척이나 무미건조했다.

“그런데 약에 관해 알아보기 전에, 그 여동생을 의사에게 내보이는 게 먼저 아닌가?”

그는 아돌프와 같은 말을 했다. 그러나 리브에게는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그 어린애가 피를 쏟으며 죽어 가는 걸 보면, 누구라도 이렇게 되지 않을까?

“진찰은 물론 받았습니다. 별다른 성과가 없었을 뿐이죠.”

“제대로 된 진찰이 맞나?”

“네?”

“선생의 형편을 미루어 짐작건대, 찾아간 의사도 썩 괜찮은 자는 아니었을 것 같아서.”

뜻밖에도 정곡을 찌른 후작의 말에 리브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리브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후작이 잠시 놓았던 잔을 집어 들었다.

그는 제 할 말을 다했다는 듯,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지는 건 리브였다. 그녀는 이미 후작에게 바라는 걸 말했고, 후작은 선행되어야 할 점을 지적했다.

그건 아마도 리브가 다른 걸 요청하길 바란다는 뜻이리라.

의사를 소개해 달라고 말하길 바라는 걸까?

입술을 벙긋거리던 리브가 결국 쥐어짜듯 다시 목소리를 냈다.

“혹시, 여동생을 돌보는 일에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시다면.”

“있다면?”

“제가, 뭐든 더 하겠습니다.”

이런 불명확한 장담은 위험한 법이다.

리브는 제 말이 얼마나 무모하고 겁이 없는 것인지 잘 알았다. 그러나 그녀로서는 이 외의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후작의 도움에 보답할만한 대가로 제시할 수 있는 물질적인 건 없으니까.

리브의 말에 후작이 미묘한 침음을 뱉었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단언했다.

“선생이 나에게 줄 수 있는 것 중 가치 있는 건 없어.”

퍼뜩 고개를 든 리브가 후작을 바라보았다. 리브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그녀의 절박한 표정을 확인한 후작이 입매를 비스듬하게 끌어 올렸다.

“왜, 나에게 줄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나?”

그 말을 듣자 저절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리브는 저 자신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아주 깊이 숨겨져 있던 상상을 후작이 먼저 알아챘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후작이 그녀를 그의 침상에 올리고 싶은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그 주제넘은 상상을.

“그래. 다시 생각해 보니 괜찮은 게 있군.”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후작이 등을 뒤로 물렸다. 그 말을 듣자 리브의 어깨가 긴장으로 인해 바짝 굳었다.

“선생은 재미있어.”

어려운 말도 아닌데, 리브는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그녀의 어느 부분이 재미있다는 건가.

“그러니 계속 나를 재미있게 만들어 보도록 해.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선생의 집 앞에는 매일 행운이 찾아갈 테니.”

그게 정말 행운일까? 행운이라는 달콤한 말로 포장하기에는, 너무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지 않나?

리브는 막연한 불안감과 함께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여동생을 데려오게. 괜찮은 의사를 소개해 주지.”

“의사요?”

“예전부터 내 건강을 돌보던 주치의니 실력은 의심하지 않아도 돼.”

후작의 주치의라면 적어도 옛날에 만났던 그 돌팔이보다는 낫겠지. 애초에 그 정도의 신분이라면 리브의 처지로는 마주칠 수도 없을 사람이었다. 그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이 행운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앞에 행운을 던져 놓은 후작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추가 근무는 앞으로 그림 작업과 별개로 진행하지. 마차를 따로 보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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