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37)화 (37/138)

사뭇 단호한 리브의 대답에 아돌프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일자로 입술을 꾹 다문 아돌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 그렇군요. 보기 좋은 우애입니다. 동생분이 아주 좋은 언니를 두어 다행이에요.”

아돌프는 그에 관해 더 묻지 않았다.

아돌프와의 대화는 리브의 마음에 가시처럼 박혀서 수시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단지 코리다의 병과 관련해서 후작에게 도움을 청해 보라는 조언뿐만이 아니라, 그 외의 이야기들까지 전부 말이다.

‘코리다의 독립….’

코리다가 여덟 살일 때부터 쭉 그녀를 돌보았던 리브는, 도통 성인이 되어 독립하는 코리다를 상상할 수 없었다. 아니, 성인이 된 코리다는 상상할 수 있지만 코리다가 제 손을 떠나 홀로 살아가는 모습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르지 않는 것인지, 떠올리기 싫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리브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코리다가 건강해지면, 그 애의 성격상 분명 홀로 서려 할 것이다.

이미 코리다는 리타에게 바느질감을 받거나, 아돌프의 담장 수리를 돕는 등 자발적인 의지를 내비치고 있었다. 지금이야 코리다의 병 때문에 행동을 제지한다지만 건강을 회복하게 된다면….

물론 리브는 코리다가 건강해지길 바랐다. 왜 아니겠는가? 다만 만약에라도 코리다와 떨어져 살게 되면 혼자가 될 저 자신이 어색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저 자신의 두려움이기도 했다.

코리다가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는 만큼이나, 그녀 역시 코리다에게 의지하고 있으므로.

“계십니까?”

멍하게 앉아 있던 리브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문밖에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집까지 찾아올만한 사람은 없는데.

의아한 얼굴로 몸을 일으킨 리브가 문득 카밀을 떠올리곤 표정을 굳혔다. 가장 최근에 그녀의 주소지를 알고 싶어 하던 남자였다. 설마 어디에서든 정보를 구해서 이곳까지 쫓아온 게 아닐까? 리브의 행적을 묻는 그의 태도는 이상할 정도로 집요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의심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다가간 리브가 문고리를 꽉 쥔 채 대답했다.

“누구세요?”

“마부입니다. 모시러 왔습니다.”

마부?

눈을 깜빡이던 리브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 앞에 단정히 선 상대는 리브가 매번 후작의 작업실을 찾아갈 때 신세를 진 마차의 마부였다.

…하지만 작업실이라면 이미 다녀왔는데?

“오늘 작업이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요.”

“주인님께서 모시고 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바쁘십니까?”

리브의 표정이 얼떨떨하게 변했다. 마부의 뒤로는 그녀가 늘 타고 다니던 바로 그 검은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후작이 그녀를 데려오라고 했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후작을 만나고 온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도대체 무슨 볼일인지 짐작되는 게 없었다.

“바쁘시면 억지로 모시지 말라는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마부는 리브가 거절하면 아무 미련 없이 몸을 돌릴 기세였다. 마른침을 삼키며 고민하던 리브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코리다는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편지를 써 두고 잠시 다녀와도 괜찮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후작의 부름을 거절할 엄두 같은 건 전혀 나지 않았다.

“곧 나갈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평소처럼 마차에서 내린 리브는 곧 도착한 곳이 낯설다는 걸 깨달았다.

이곳은 그녀가 매번 누드화 작업을 위해 찾았던 그 외딴 저택이 아니었다. 물론 눈앞의 저택 또한 충분히 외딴 느낌이긴 하나… 무언가 확실히 달랐다. 우선 저택의 외형이 그러했고, 주변 풍경이 그랬다.

설마 자신을 부른 게 후작이 아니었을까?

뒤늦게 그러한 가능성을 떠올린 리브가 불안한 눈으로 마부를 돌아보았다. 마부는 별다른 동요 없이 말을 달래고 있었다.

이대로 저 눈앞에 보이는 저택에 들어가야 하는 건가? 하지만 저 안에 무엇이, 누가 있을 줄 알고? 리브의 불안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려는 순간, 누군가 저택 입구 쪽에서부터 그녀에게 다가왔다.

“로이데스 양 되십니까?”

백발이 성한 그는 퍽 인자한 얼굴을 한 노인이었다. 점잖은 차림을 한 그가 리브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베리워스 저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집사 필립 필몬드라고 합니다. 편하게 필립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필립의 부드러운 음성은 흠잡을 곳 없는 그의 태도와 맞물려 상대에게 깊은 신뢰감을 선사했다. 그러나 리브는 경계심을 조금도 풀지 않은 채 조심스러운 얼굴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반갑습니다, 필몬드 씨.”

명백히 거리감을 드러내는 리브의 말에도 필립은 놀라지 않았다. 대신 그는 푸근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안내를 자처했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오시는 길은 편안하셨습니까?”

“그 전에, 필몬드 씨.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요.”

“편히 말씀하십시오.”

엉거주춤 서서 마차와 저택을 번갈아 보던 리브가 넌지시 질문했다.

“저를 만나고자 하시는 분이 혹시….”

“디트리언 후작님이십니다.”

필립이 명료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 대답을 듣자 불안하던 마음이 물에 씻긴 양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뱉은 리브가 뒤늦게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아, 제가 이곳에서 후작님을 뵙는 게 처음이라….”

“괜찮습니다. 그럼, 이제 안쪽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네.”

필립이 앞장서서 저택으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연스럽게 리브에게 말을 걸어왔다.

“혹 기피하는 음식 재료가 있으시다면 참고하겠습니다.”

“딱히 없어요.”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특별히 선호하는 음식 재료는 어떤 게 있으실까요?”

“아…. 제가 음식에 딱히 호불호를 가지진 않아서요.”

정확히는 그만한 여유가 없다고 하는 게 맞았다. 그간 음식 투정을 할 정도로 그녀의 식탁 사정이 넉넉하지는 않았으니까. 멋쩍은 얼굴로 헛기침을 한 리브가 슬쩍, 앞서 걷는 필립을 보았다.

“친절하시네요.”

“베리워스 저택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게 오랜만이라, 조금 들떴답니다.”

필립은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꽤 상기된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인상이 부드러운 노인이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신사적인 태도를 보이니, 점점 더 긴장이 풀렸다. 겨우 몇 마디의 대화만으로 이렇게까지 긴장을 풀리게 하다니, 정말 대단한 능력이었다. 눈빛 하나로 사람의 긴장감을 최고조에 다다르게 하는 후작과 비교하면 더욱더 대단하고.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들은 금방 저택으로 들어갔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리브는 무심코 탄성을 뱉었다. 고풍스럽게 꾸며진 저택 내부를 보니 감탄이 저절로 나온 것이다.

당장 그들이 선 로비 중앙만 해도 넓은 공간에 두껍고 화려한 무늬의 카펫이 깔렸고, 높은 천장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반짝이며 불을 밝히고 있었다.

로비 중앙에 위치한 목조 계단은 양 갈래로 나선을 그리며 자리 잡고 있었는데, 난간을 어찌나 잘 관리했는지 멀리서 보아도 윤기가 흘렀다.

“주인님께서는?”

“서재에 계십니다.”

현관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는 리브의 모자나 외투를 받아들려는 눈치였으나, 리브가 그에게 딱히 무언가를 건넬 의사가 없어 보이자 순순히 물러났다.

뒤늦게 그에게 모자라도 맡겼어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리브는 이내 미련을 버리고 필립의 뒤를 따라갔다.

발을 딛기도 부담스러운 계단을 올라가자, 커다랗고 깨끗한 창문이 일정하게 자리 잡은 복도가 나타났다. 커튼을 전부 묶어둔 까닭에 창문 너머로 햇살이 한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햇살은 복도를 밝게 비출 뿐 아니라, 은은한 온기도 만들어 냈다. 그래서인지 리브는 이 크고 고풍스러운 저택에 점점 더 호감을 품었다. 그간 누드화 작업을 하러 방문했던 저택과 달리 이곳은 사람이 산다는 느낌을 주었다.

“저택 뒤편에는 아주 큰 수목원이 있습니다. 산책하기 아주 좋은 장소지요.”

리브의 호감을 눈치챘다는 듯, 필립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정신없이 저택 내부를 구경하던 리브가 그 말에 놀라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렇군요.”

“수목원 내부에는 유리 온실도 있습니다.”

“멋지겠네요.”

“이 늙은이의 자랑거리지요.”

리브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름다운 유리 온실이라고 한들, 그녀가 볼 일이나 있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와 별개로 호의적인 필립의 태도는 나쁘지 않았다.

“서재는 이곳입니다.”

긴 복도를 쭉 걷던 필립이 어느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조각이 새겨진 커다란 문이었다.

가볍게 노크를 한 필립이 안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주인님, 로이데스 양을 모셔왔습니다.”

잠시 후,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리브가 마음의 준비를 할 사이도 없이,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필립이 리브에게 길을 비켜 주며 들어가라는 듯 눈짓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건 파도처럼 밀려드는 종이 냄새였다. 시야로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천장을 터서 위층까지 높게 치솟은 내부는 공간 자체만으로도 컸는데,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책 덕분에 더욱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책장만 가득한 건 아니었다. 위쪽으로 큰 창이 나 있어서 빛도 부족함 없이 들어왔고, 두꺼운 적색 벨벳 커튼도 단정하게 걸려 있었다. 단단해 보이는 적갈색 목재 책장과 잘 어울리는 백색 벽난로도 보였다.

클레망스 기숙 학교 재학 시절 자주 찾았던 학교 도서관이 떠올랐다. 그곳도 크긴 했으나, 이렇게 탁 트인 개방감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단지 눈에 보이는 곳뿐 아니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더 많은 공간이 존재할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구석구석 구경해 보고 싶었지만, 리브는 제 욕구를 꾹 참으며 자신을 부른 이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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