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부에르노의 외곽 쪽에 있는 평범한 사무소였다. 간판도 없는, 얼핏 보기에는 대단해 보이지 않는 그런 사무소.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아예 짐작도 되지 않았다.
아마 리브도 이번 기회가 아니었으면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안내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낯익은 이가 그녀를 향해 반가운 미소를 건넸다. 리브가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안녕하세요, 아돌프 씨.”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로이데스 양.”
리브는 아돌프의 연락처를 알기 위해 브레드를 찾아갔었다. 브레드가 그림 작업을 못 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고 했던 말을 떠올린 덕분이었다. 그를 통해 알게 된 게 이 사무소의 주소였고, 아돌프는 심부름꾼을 통해 곧장 답신을 보내 주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사무소를 찾아오게 된 것이다.
“바쁘실 텐데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로이데스 양은 중요한 계약자이신걸요.”
시원하게 웃으며 로이데스를 의자로 안내한 아돌프가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능숙하게 차를 내는 아돌프를 빤히 보던 리브가 오는 내내 머릿속으로 정리한 말의 서두를 침착하게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집 담장을 보수하러 와 주셨다고 들었어요.”
“아, 그랬죠.”
아돌프가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인부를 쓸 일입니다만, 로이데스 양의 주거지는 좀 더… 신경 써야 하는 장소니까요. 가급적 타인에게 노출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직접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리브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 그녀를 힐끗 본 아돌프가 찻잔을 채웠다.
“하고 싶은 말씀은 그게 아니신 것 같습니다만.”
웃는 낯으로 차를 권유하며, 아돌프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 말에 뜨끔한 표정을 지은 리브가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찻잔 속에서 출렁이는 물결에 리브의 얼굴이 일그러져 비쳤다.
“담장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제 여동생과 마주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아, 그랬죠.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참 착한 소녀입니다.”
“실은 그 애가 많이 아파요. 그래서… 혹시 앞으로 마주칠 일이 있으시다면 조금 신경 써 주셨으면 해서요. 이 부탁을 드리려고 왔어요.”
리브의 말에 아돌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말입니까?”
찻잔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리브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저는 제 동생이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지 않았으면 해요. 가령 이번에 담장 보수를 도왔다고 들었는데…. 그 애가 다치면 잘 낫지 않아서요. 많이 주의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가급적 그런 일에 끼지 않도록 집으로 적당히 들여보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아하….”
아돌프가 낮은 침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턱을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아돌프가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주제넘은 참견이라면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겠습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사과를 한 아돌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동생분의 상태를 정확히 모르지만, 가벼운 활동 정도는 충분히 가능해 보였습니다.”
“그야 지금은 약을 잘 챙겨 먹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게도 동생분 또래의 아픈 딸이 있어서, 병든 가족을 부양하는 문제에 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아돌프의 말에 리브가 멈칫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돌프가 얼른 말을 이어나갔다.
“대신 아파 줄 수 없으니 더욱 신경 쓰이고, 그저 애지중지하게 되지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나이가 좀 있는 것 같지만 코리다만큼 장성한 딸이 있어 보이진 않았는데.
리브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다물었다. 정말 그에게 아픈 딸이 있다면 코리다에게 그토록 호의적으로 굴었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자신의 딸이 생각난 거라면 아마 코리다에게도 비슷하게 대해 주었겠지.
살짝 누그러진 리브의 모습을 확인한 아돌프가 넌지시 질문했다.
“혹시 동생분께서 의사의 정확한 진단을 받으셨습니까?”
“…예전에요.”
아돌프는 리브가 말하는 ‘예전’이 꽤 먼 옛날이라는 걸 눈치챈 듯했다.
“의술은 매해 발전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다양한 연구를 통해서 크게 나아지고 있죠. 저도 여러모로 알아보며 깨달았습니다. 어떤 병은 이제 치료할 수 있다는 걸요.”
리브의 눈꺼풀이 가볍게 떨렸다. 마른침을 삼킨 그녀가 아돌프를 힐끗 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가요?”
“이렇게 저를 찾아오실 정도로 동생분을 아끼시는 거라면, 동생분을 무작정 감싸고 보호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 또한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리브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말씀대로 주제넘은 참견이시네요.”
“그저 같은 처지에서 드리는 조언입니다. 검진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면, 이번 기회에 몸 상태를 다시 살피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저도 그랬고요.”
그가 다시 아픈 딸을 운운하자 리브의 말문이 도로 막혔다. 입술을 깨물며 침묵하는 리브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던 아돌프가 점잖은 어조로 말했다.
“부에르노에 실력 좋은 의사가 있다는 소문은 못 들어봤지만… 아마 후작님이라면 충분히 걸맞은 자를 찾아내 주실 수 있을 겁니다.”
“후작님이요?”
설마하니 아돌프가 후작을 언급할 줄은 몰랐던 터라, 리브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리브에게서 불신을 발견한 아돌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분은 이미 로이데스 양께 거주지를 제공하셨습니다. 다른 호의 또한 충분히 베풀어 주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입술을 벙긋거리던 리브는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후작의 보좌관이기도 한 아돌프가 저렇게 말할 정도로 후작이 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다면, 조금 더 도움을 얻어도 좋지 않을까. 사실 이런 일은 후작에게 아무것도 아닐 텐데.
훌륭한 의사를 소개해 주는 것 정도는, 후작이라면 아주 쉽게 해 줄 수 있을 텐데.
리브는 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것을 깨달았다. 이대로라면 아돌프에게 지금 당장 후작과 만나게 해 달라고 말을 꺼낼 것 같았다.
들불처럼 번지는 희망과 함께, 오랜 시간 묵은 공포 역시 꿈틀거리며 솟아났다.
하지만 옛날처럼 이상한 의사를 만나게 되면? 찰나의 실수로 코리다가 위험해지기라도 하면?
“조언 감사드려요.”
이건 충동적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리브는 겨우 마음을 다잡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아돌프 씨의 사무실이 이런 곳에 있을 줄은 몰랐어요. 아돌프 씨는 후작님의 보좌관이시니까, 당연히 그분 곁에서 일하실 줄 알았는데.”
“아, 사무실이 조금 허름하지요?”
아돌프가 허허롭게 웃으며 제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후작님께서는 여러 명의 보좌관을 곁에 두고 계시지요. 저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분에게 필요한 다양한 법적 문제를 처리하고 있습니다. 워낙 다방면으로 활동하다 보니, 이렇게 따로 법률 사무소를 만들어 두었지요.”
리브는 그제야 아돌프가 왜 추가 근무 계약서를 들고 나타났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중에 전달받은 집 계약서도 아돌프가 주었던 것 같다.
“대단하시네요.”
“대단한 건 후작님이시죠. 저 같은 인재를 이런 먼지 쌓인 사무소에 보내 놓으셨으니 말입니다.”
껄껄 웃으며 농담처럼 받아친 아돌프 덕분에 딱딱하던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리브는 한결 진정된 얼굴로 차를 마셨다.
“그나저나 로이데스 양은 동생분을 무척 아끼시는군요. 인상 깊은 우애입니다.”
“유일한 가족이라서요.”
부모님의 죽음은 딱히 숨길 사안이 아니었다. 선뜻 아돌프의 말에 대답한 리브가 한숨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 애가 없었으면 이렇게 열심히 살진 않았을 거예요.”
아돌프가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의미가 크다는 소리시군요. 그리 감싸신 까닭을 알겠습니다.”
“아픈 딸이 있다고 하셨으니 아시겠네요. 그 애가 건강해질 수 있다면, 저는 정말 심장이라도 내어줄 거예요.”
“그렇지요. 가족의 마음이 다 같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코리다의 병수발은 힘들지만, 그래도 코리다가 없었으면 이렇게 악착같이 살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코리다는 리브의 족쇄이기도 했지만, 삶의 유일한 목표이기도 했다. 코리다가 없으면 제 삶에 다른 의미가 있을까.
이제 와서는 상상할 수도,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잔잔하게 웃는 리브를 가만히 보던 아돌프가 문득 낮게 탄식했다.
“그래도 좀 안타깝습니다. 로이데스 양도 하고 싶은 일이 많을 텐데요.”
하고 싶은 일이라니. 그런 낭만적인 소리를 들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듣는 낯간지러운 물음이 신기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리브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그냥, 코리다가 지금처럼 곁에 있어 준다면 충분히 만족해요.”
피를 토하지도 않고, 쓰러지지도 않고, 그냥 지금처럼 행복하게 웃어 준다면. 그것이면 리브는 충분했다.
리브의 대답에 아돌프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가 인자하면서도 사심 없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동생분이 건강해진다면요?”
“네?”
리브가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런 리브를 물끄러미 보던 아돌프가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동생분이 건강해져서 로이데스 양의 곁을 떠날 시기가 온다면 말입니다.”
“그 애는 제가 곁에서 돌봐 주어야 하는 아이예요.”
“하지만 언제까지 아이로 남진 않을 겁니다. 게다가 건강해진다면 곁에서 돌봐 줄 필요도 없어질 테고요. 로이데스 양은 동생분이 건강해지길 원하시니, 이러한 상황도 염두에 두셔야 하지 않습니까.”
건강해진 코리다가 자신을 떠난다고?
리브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가능성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코리다가 떠나는 미래라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녀가 느낀 당황은 잠시였다. 리브는 곧 평정심을 되찾고 덤덤하게 대답했다.
“코리다는 건강해져도 제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