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을 왜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후작의 얼굴에는 무료함이 가득했다.
리브가 말문을 잃고 그런 후작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무리 곱씹어도 그녀가 조금 전 들은 말에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말로, 밀리언의 생일 파티에 온 게 자신을 보기 위해서였다고?
“그럴 리가….”
“그럴 리가?”
후작이 리브의 말을 그대로 곱씹었다.
“반응이 영 박하군. 이걸 확인하고 싶었던 거 아닌가?”
멍하게 저를 보는 리브의 반응에 후작이 실소를 흘렸다.
“선생에 대한 나의 관심 말이야.”
그야말로 직격타였다.
입술을 벙긋거리던 리브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자꾸 입 안이 말라서 찬물이라도 들이켜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마실 게 없었다. 하다못해 와인이라도 있었으면 당장 한잔 달라고 했을 텐데.
어쩔 수 없이 마른침만 연신 삼키며 할 말을 고르던 리브가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다.
“후작님의 그 관심을…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려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글쎄. 딱히 그런 걸 생각해 보진 않았네만.”
시큰둥한 얼굴로 리브에게서 시선을 거둔 후작이 품에서 시가 케이스를 꺼냈다.
“선생이 고민해 보게.”
평소와 같은 냉담한 태도로 돌아온 후작이 리브를 보지도 않으며 툭, 말을 던졌다.
“연주해.”
리브가 뻣뻣하게 굳은 몸을 돌려 다시 피아노를 마주했다. 그러나 무엇을 연주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머릿속의 악보가 뒤죽박죽되어버려서, 그녀의 피아노 연주는 아주 형편없어졌다.
그러나 후작은 연주를 끊지 않았다.
***
그가 나를 좋아하나?
전이라면 망상이라며 웃어넘겼을 텐데, 안타깝게도 지금의 리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물론 남녀 간의 순수한 애정을 후작과 저 사이에 논하기에는 과정이 아주 이상하지만….
그는 ‘관심’이라고 표현했으나, 보통 관심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하나?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후작의 행동은 과했고, 이례적이었다. 리브는 이제 그가 예배당에 나타났던 것도 전부 자신을 만나러 온 게 틀림없다는 근거 없는 확신에 사로잡히기까지 했다. 솔직히 그게 아니고서야 그가 그 좁고 허름한 예배당에 나타날 까닭이 없으니까!
당연히 브레드의 그림을 자꾸 가져가는 것도, 그림 모델이 자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브레드가 철석같이 믿던 후원은 아마도 평생 없겠지.
그는 강도에게서 목숨도 구해 줬으며, 아주 적은 집세로 이 집을 내주었고, 돈이 필요하다는 그녀에게 추가 근무를 제안하기까지 했다.
나아가 앞으로도 자신에게 기도하라고 했지.
“하지만 도대체….”
후작이 자신에게 해 준 것들을 하나하나 곱씹어보던 리브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의 태도가 특별하다는 건 이제 충분히 알겠는데, 그 관심이 무엇에서 비롯된 건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정말 그저 그녀의 몸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그런 단순한 이유로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준다고?
모르긴 몰라도 후작의 주변에는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나신을 가진 여성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아마 후작의 손짓 하나에 옷을 벗을 사람이 천지에서 대기하고 있겠지.
내로라하는 미인들보다 제 몸뚱이가 낫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자신이 모르는 엄청난 매력이 전신에서 풍기나?
“언니, 언니.”
“어, 응.”
넋을 놓은 채 식탁에 앉아 있던 리브가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것 봐, 언니!”
코리다가 눈을 빛내며 양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는 나무 오르골이 놓여 있었다.
가세를 돕겠다며 몰래 바느질감을 받아 왔던 코리다를 호되게 질책한 이후, 리브는 그녀를 위해 몇 가지 흥밋거리를 사다 주었다. 저 손에 들린 나무 오르골은 그중 하나였다.
“다 만든 거야?”
“응!”
모든 부품이 들어 있어서 설명서대로 조립만 하면 완성되는 오르골이었다. 요즘 인기 있다고 하기에 하나 사 와 봤는데, 코리다의 마음에 아주 쏙 든 모양이었다.
리브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후작을 저 멀리 미뤄두고 코리다에게 집중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더라고. 금방 만들었어.”
코리다가 우쭐거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대단하네.”
리브가 웃으며 나무 오르골을 받아 들었다. 포장지 겉면에 그려져 있던 완성본과 똑같은 모양의 오르골이었다.
아무리 설명서가 있다고는 해도 이렇게나 그럴듯한 완성품이라니. 리브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손재주가 너무 좋다!”
“그냥 제대로 된 구멍에 끼워 맞추기만 하면 되는걸.”
코리다가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 뭔가 만드는 데에 재주가 있는 것 같아.”
“오르골 완성했다고 아주 의기양양해졌네?”
“아니야! 오르골만 그런 게 아니라, 담장…!”
발끈해서 반박하려던 코리다가 멈칫했다. 그러나 이미 리브의 만면에 가득 차 있던 미소는 사라지고 난 뒤였다.
들고 있던 나무 오르골을 식탁 한쪽에 내려놓은 리브가 팔짱을 낀 채 코리다를 응시했다.
“담장?”
“아니, 그게….”
“너 언니 없는 사이에 또 뭘 한 거야?”
울상을 지으며 눈을 굴리던 코리다가 리브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입술을 뗐다.
“그… 사실, 엊그제 이 집 중개인 아저씨가 담장 보수해 주러 왔었거든. 근데 혼자서 일하신다잖아.”
코리다의 설명에 따르면 이랬다. 리브가 출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돌프가 찾아와 잠깐 담장 보수를 진행해도 괜찮겠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이사가 다소 갑작스럽게 진행된 터라 미처 확인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서.
이미 아돌프와 안면을 익힌 코리다는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나중에 보니 아돌프가 혼자 일을 하고 있어서 아주 조금 도와줬다는 내용이었다.
“코리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옆에서 달라는 물건 몇 개만 건네드렸을 뿐이라고!”
“알아서 해 준다는데 네가 왜 나서? 그러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리브의 눈에 바깥은 온통 위험한 것 투성이었다.
아돌프야 뭘 모르니까 코리다의 도움을 대수롭지 않게 받았겠지만, 담장을 보수하는 일이라면 얼마나 위험한 연장을 사용했겠는가. 괜히 파편이 튀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딱딱하게 굳은 리브의 얼굴을 본 코리다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저씨가 그러는데, 너무 집 안에만 있으면 몸이 더 약해진다고 했어. 담장을 튼튼하게 보수했으니까 마당이라도 나와 있으라고 했단 말이야!”
“그 사람은 의사가 아니야. 네 상태도 모르고.”
“옛날에 나를 진찰했던 의사보다는 아저씨 말이 훨씬 더 믿음직했어!”
버럭 내지른 코리다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리브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을 확인한 코리다가 뒤늦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 나는 그러니까…. 옛날보다 더 건강해졌다는 말을 하려던 거였어. 그 의사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라. 그, 그리고 그건 그 할아버지가 나빴던 거지 언니는 아무 잘못도 없는걸!”
초조하게 두 손을 맞잡은 코리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물론 언니 눈에는 내가 옛날이랑 똑같아 보이겠지만… 벌써 몇 년 전이잖아. 이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약 먹으면 어쨌든 막 쓰러지고 그러지 않으니까. 언니가 돈도 많이 벌어오는 덕분에, 좋은 것도 많이 먹고 있잖아?”
리브가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에 눈치를 보던 코리다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덧붙였다.
“언니, 화난 거 아니지?”
리브는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쓴 물을 되삼키며 부드럽게 웃었다.
“화가 왜 나겠어. 언니는 그냥 너를 걱정하고 있는 건데.”
다행히도 리브의 웃음이 꽤 진실해 보였던지, 코리다가 한결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모른 척 화제를 돌렸다. 리브 또한 순순히 코리다의 뜻대로 이야기를 전환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큼지막한 추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
부모님이 돌아가신 건 리브가 열여덟 살이었던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빙판길에 미끄러진 마차가 쓰러지면서 부모님을 덮쳤다. 부모님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리브는 순식간에 여덟 살짜리 동생과 단둘이 남겨졌다.
리브가 졸업하고 집에 돌아온 지 1년이 채 못되었을 때였다.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하게 정하지도 못했던 때. 아직 소녀의 꿈이 남아 있던 시기.
그때 리브는 제 미래를 고민하기만도 바빴다. 당연히 아픈 코리다는 부모님이 돌보고 있었다. 리브 역시 귀동냥으로 코리다의 상태를 듣기야 했으나, 정확한 상태는 줄곧 코리다를 보살펴온 부모님이 훨씬 잘 알았다.
그런 부모님이 하루아침에 부재하게 된 상황에서, 리브는 일단 코리다의 몸 상태부터 정확하게 알아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거액을 주고 의사를 불렀다. 경력이 아주 길다는, 백발의 노의사였다. 사회생활이라고 부를 만한 걸 해 본 적 없는 리브는 자신만만한 의사의 모습에 신뢰를 느꼈다.
그 돌팔이 같은 놈을.
그자는 코리다의 피를 뽑다가 오히려 과다 출혈로 생사를 오가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게다가 몸을 조종하는 건 머리이니 원인을 알기 위해 두개골을 열어 보자는 미친 소리까지 했다. 요즘은 몸을 갈라 진단하는 치료법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면서.
그 돌팔이 덕분에 코리다는 피가 잘 멈추지 않는다는 걸 여실히 알게 되었으니, 그것 하나는 도움이 되었다.
아무튼 그 돌팔이 같은 놈에게 크게 덴 이후, 리브는 의사를 믿지 않았다. 물론 실력 좋은 의사도 어딘가에 있겠으나, 그들은 전부 귀족들의 주치의였다. 거리를 떠도는 의사치고 제대로 된 정신머리를 가진 자는 없어 보였다.
대신 그녀가 믿는 건 약이었다. 실질적으로 눈에 띄는 성과를 본 건 약뿐이니까.
부모님이 줄곧 코리다를 위해 샀던 약을 똑같이 사면 되는 일이었다. 불확실한 진단에 의지해 코리다의 몸에 실험을 가하는 것보다야 훨씬 안정적이었다.
잊고 있던 과거를 떠올리며 시름에 잠겨 있던 리브가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들어오시랍니다.”
안내인의 부름에 리브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