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34)화 (34/138)

방이 달라졌다.

당연히 가장 위층으로 갈 줄 알았는데, 후작은 응접실과 같은 층에 있는 휴게실로 그녀를 데려갔다. 침대가 없는 대신, 성인 둘이 누워도 넉넉할 정도로 커다란 소파가 있는 방이었다.

아마도 준비되어 있던 건 아닌 듯했다. 뒤늦게 따라온 하인이 급하게 창문의 커튼을 치고 테이블과 소파를 정돈하는 걸 보면 말이다. 늘 미리 놓여 있던 와인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깨끗해서 얼굴이 비칠 것 같은 탁자를 연신 다시 닦는 하인을 가만히 보던 리브가 시선을 돌렸다.

평소 그녀가 옷을 벗던 방은 하얗기만 한 공간이었는데, 이곳은 여느 저택의 휴게실처럼 다채롭고 화려한 색감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 와중 휴게실 한쪽에 놓인 큰 피아노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크기로 보나 형태로 보나 보통 고급이 아니었다.

리브의 시선이 피아노에 닿았음을 확인한 후작이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칠 줄 아나?”

“조금은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리브는 어쩐지 못내 의기소침했다.

졸업할 때만 해도 어디 가서 체면치레할 수준은 된다고 자부했는데, 하도 오랫동안 손을 놓아서 아직도 그 실력이 그대로인지는 모르겠다.

자신 없는 얼굴로 선 리브를 향해, 후작이 쳐 보라는 듯 턱짓했다. 부산스럽게 휴게실을 정리한 하인은 어느새 나가고 없었다.

마지못해 앉은 리브가 흰 건반 위로 손끝을 올렸다. 매끈한 감촉을 문지르며 기억을 더듬던 그녀가 어깨에 힘을 풀며 양손을 들었다.

피아노 위에는 따로 악보 같은 게 없어서, 그녀는 기억하는 몇 안 되는 곡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교양으로 배우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작곡가는 딸에게 들려주기 위한 자장가로 이 곡을 썼지만, 정작 자장가라기에는 너무 완성도가 높아서 종종 음악회에서도 연주되는 곡이었다.

댕, 댕.

피아노는 완벽하게 조율되어 있어서, 건반을 누를 때마다 맑은 소리를 냈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좋은 피아노의 상태에 놀란 리브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의 힘을 뺐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 톡톡 두드리는 손길을 따라 조심스럽고 수줍은 선율이 휴게실을 울렸다.

몇 년 전 기억에 의지한 연주라 자신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차피 후작도 그녀에게 전문가 수준의 연주를 기대하지 않았을 테니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만 무난하게 연주하면 되겠지.

리브가 그런 생각으로 조금씩 연주를 이어가는 순간이었다.

사락.

리브의 등 뒤에서 목덜미를 가로로 죽, 긋는 손가락 끝의 감촉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천의 촉감으로 보아 분명 후작의 손길이었다.

그 손길을 따라 목덜미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이 모여 한쪽 어깨를 타고 넘어갔다. 제 어깨를 타고 앞쪽으로 넘어온 한 뭉텅이의 긴 적갈색 머리카락이 리브의 시야에 들어왔다.

“무슨…?”

외운 대로 건반을 누르던 손가락이 점점 느려졌다. 그러나 등 뒤의 기척은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툭.

작은 소리와 함께 목을 조이던 힘이 사라졌다. 뒤이어 툭, 툭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 가슴을 조이던 옷이 점점 느슨하게 변했다. 벌어진 옷감 사이로 구겨진 속옷과 살결이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느리게 이어지던 연주가 완전히 끊어졌다.

등허리까지 일자로 길게 이어진 단추를 일정한 속도로 톡톡 푸르던 손길도 우뚝 멈추었다. 어째서인지 돌아볼 수가 없어서, 리브는 앉은 채로 곤두선 신경을 온통 등 뒤로 집중했다.

“내가 계속 벗겨 주어야 하나?”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침묵을 깬 건 후작이었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리브가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반쯤 벗겨진 상의가 그 움직임으로 인해 살짝 흘러내렸다.

가슴께의 옷자락을 움켜쥔 리브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마 그녀의 지척에 서 있었을 후작은, 언제 다가왔냐는 듯 몸을 돌려 멀어지고 있었다.

여태껏 후작은 단 한 번도 그녀의 몸에 손 댄 적이 없었다. 꽤 많은 추가 근무를 하는 동안, 한 번도.

오늘은 직접 손을 댈 정도로 마음이 급했나? 아니면 뭔가 잘못된 게 있었나?

설마 맨몸으로 피아노를 치라는 의미였나. …그건 또 무슨 취미지?

폭풍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몰아쳤으나, 사실 전부 의미 없는 의문이었다.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요구를 많이 해 오던 후작이라, 리브는 새삼스럽게 그의 행동 속에서 거창한 의미를 찾아내길 포기했다. 대신 조금 빠른 손길로 옷을 벗었다.

몇 겹 없는 옷자락은 금방 사라지고, 그녀는 나신으로 후작의 앞에 서게 되었다.

방이 달라져서일까? 리브는 새삼스럽게 옷을 벗은 게 부끄러워졌다. 차라리 피아노를 친다는 핑계로 앉는 게 우두커니 있는 것보다는 덜 민망할지도 모르겠다.

리브가 후작을 힐끔거렸다. 소파에 걸터앉은 그는 검은 잿가루가 묻은 본인의 장갑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연주를… 계속할까요?”

엄지와 검지를 문지르며 무언가를 고민하는가 싶던 후작이 그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후작은 리브의 드러난 다리를 보았다.

넘어졌을 때 가장 크게 다친 부위이자, 지금은 멍과 딱지로 엉망이 되어 있는 곳이었다.

후작의 시선이 닿자 갑자기 상처 부위가 간지러워졌다. 리브가 괜스레 헛기침했다.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그 모습을 보던 후작이 손을 들었다.

“실은 말이지, 선생.”

느리게 입술을 떼며, 그가 장갑의 끄트머리를 잡고 천천히 당겼다.

“나는 깨끗한 몸이 좋아.”

장갑이 매끄럽게 벗겨지고, 사내의 긴 손가락이 드러났다. 장갑을 낀 생김새만 보아서는 곱고 미끈하고 새하얀, 꽤 예쁠 것 같은 손이었는데 정작 드러난 손은 의외로 크고 다부진 사내의 것이었다.

총을 쥔다면 아주… 잘 어울릴 것도 같다.

“그런데 이상하지. 선생의 몸은 조금, 더럽혀져도 괜찮을 것 같거든.”

후작의 손을 멍하게 보던 리브는 문득, 저 손이 그동안 숨겨져 있던 그의 맨살 일부라는 걸 깨달았다. 결벽적으로 온몸을 싸매던 후작이 처음으로 그녀 앞에서 장갑을 벗은 것이다.

그걸 알아채자 심장이 크게 뛰었다. 온몸에 피가 빨리 돌고, 조금 전 그의 손길이 닿았던 목덜미가 오싹해졌다.

제 반응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리브는 애써 입매에 힘을 주었다.

“더럽혀져도 괜찮다는 게 무슨, 무얼 말씀하시는 건지….”

“무엇으로든.”

후작은 벗은 장갑을 소파 아래로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다시 사용할 생각은 아예 없어 보였다.

“기왕이면 내가 원하는 것으로.”

리브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리브는 이 추가 근무의 계약서를 작성할 때 아돌프의 반응을 기억했다. 계약서에 적히지 않은, 부도덕하고 음탕한 무언가를 요구하면 어쩌냐는 물음에 노골적으로 웃던 그의 반응을.

아돌프는 그녀가 후작과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리브는 애가 아니었고, 후작과 저 사이에 흐르는 이 긴장감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순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걸 굳이 입 밖으로 낼 정도로 바보도 아니었다.

모른 척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가 직접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그를 갈구해서 몸을 던지는 여인 취급 받고 싶지는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후작의 저런 반응을 이끌어 낸 건지 모르겠지만.

리브가 다시 한번 피아노 연주에 관해 묻고자 입술을 뗐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입술을 타고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펜던스 남작 영애의 생일 파티에 오셨었죠.”

갑자기 튀어나온 화제에 후작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런데?”

“…후작님의 짧은 인사만으로 많은 사람이 다양한 추측을 했습니다. 아시겠지만.”

후작이 턱을 괴며 몸을 뒤로 기댔다. 그는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리브의 말에 반응해 주었다.

“그래서?”

“저는 후작님을 잘 모르지만, 평소 귀족들과 친밀하게 교류하지 않는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펜던스 남작가에는 왜 그러시는 건지….”

밀리언의 생일 파티 이후 후작이 다시 펜던스 남작가를 방문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작과 남작 부인은 그림을 사들이고,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후작을 맞이하기 위해 저택을 공들여 꾸미는 중이었다.

수업을 갈 때마다 그 모습을 보게 되는 리브로서는 묘한 기분이었다. 정말 후작이 펜던스 남작가와의 친분을 유지할까? 첫 방문이야 그림 거래 때문이다고 해도, 생일 파티에 얼굴을 비친 게 정말 친분을 위한 일이었다고?

후작을 만나고, 그와 마주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리브의 머릿속에는 펜던스 남작가에서의 일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맴돌았다.

적어도 생일 파티 때의 그는…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게 왜 궁금하지?”

리브의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후작이 직설적으로 반문했다. 리브는 자신의 추측을 전부 뒤로 미뤄 둔 채 공손한 어조로 설명했다.

“제가 펜던스 남작 영애의 가정 교사니까요. 후작님께서 생일 파티에 참석하신 이후로, 그 애의 생활에도 소란이 있었던 터라.”

“아, 학생을 걱정하는 교사의 마음이라는 거군.”

리브의 대답 어디가 그리도 우스웠는지, 후작의 목소리에 옅은 냉소가 서렸다.

괜히 지레 뜨끔한 리브가 좀 더 정당하게 느껴질 법한 이유를 고심했다. 그러나 그녀가 추가적인 설명을 하기도 전, 후작이 짤막하게 답했다.

“선생을 보러.”

발치를 방황하던 리브의 시선이 퍼뜩, 위로 올라왔다. 크게 뜬 리브의 시야로 태연하게 다리를 꼬는 후작의 모습이 가득 찼다.

“그곳에서는 내가 아는 모습과는 다를 테니까. 그래서 보러 갔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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