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드.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리브는 새삼스럽게 브레드와의 첫 만남이 어땠는지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같은 사기 피해자로 만났던 바로 그 첫 만남 말이다.
이쯤 되니 온갖 그럴듯한 단어들에 홀려 있던 브레드도 슬슬 무언가 불안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듯했다. 한풀 기세가 꺾인 브레드가 어물거리며 말했다.
“하, 하지만 벌써 그 사업가가 대납해 줬어…. 대신 후원 계약서만 가져가면 전부 무상으로 전환된다고 했다고.”
“도대체….”
할 말을 잃은 리브가 입을 벌렸다. 브레드는 리브의 반응에 조금 주눅이 든 것 같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고집스러움을 버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 사업가가 어지간히도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은 모양이었다.
아마 그림을 팔아 준다는 말이나 수도에서 개인 전시회를 열어 줄 수 있다는 말들이 브레드의 마음을 특히나 흔들었겠지. 그런 일들은 보통 데뷔한 화가들이나 가능한 일들이니까. 미술전에서 낙방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큰 자괴감을 느꼈을 브레드가 혹할 만도 했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리브는 그 사업가가 정말 브레드의 실력을 높이 샀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브레드가 정말 그런 대단한 사업가가 접근할 정도 뛰어난 실력이었다면 진즉 미술전에서 입상했을 테니까.
대납이라고? 저러다가 갑자기 빚을 받으러 왔다며 험상궂은 깡패들이 쫓아오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어제 서신을 보냈다니, 오늘은 몸이 아프다고 전할게요. 그러니까 다음 작업 날짜 전까지 당장 수습해요. 후원 계약서요? 정말 후작이 그런 걸 써 줄 거라고 생각해요?”
“후작님이 왜 굳이 내게 그림을 계속 그리라고 하시겠어? 당연히 마음에 드니까 그러시겠지! 그렇게 좋은 환경을 지원해 주시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고!”
정색하는 리브의 반응에 브레드가 조금 언짢은 표정으로 반박했다. 그는 후작이 제 그림을 좋아한다고, 정말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뭐? 후작님은 잘못 판 그림의 대가로 다시 그림을 달라고 하셨어! 내 그림을 원하고 계시다는 의미잖아!”
그가 마음에 든 건 브레드의 그림이 아니라 그 속의 모델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반박하려던 리브가 멈칫했다.
후작이 브레드의 그림을 원하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세상에! 그건 곧 후원을 받을 거라는 브레드의 저 허황한 상상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망상이었다.
멈칫하는 리브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브레드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너도 내가 데뷔하지 못했다고 무시하는 거야?”
브레드가 화를 내며 언성을 높였다. 그 반응에서, 그가 평소에 데뷔하지 못한 제 처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랫입술을 깨문 리브가 애써 그를 달랬다.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요. 저는 그냥….”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리브는 쉽게 포기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오랜 시간 봐 온 사람인데, 누가 봐도 수상쩍은 일에 휘말려서 큰돈을 잃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아무튼 알았어요. 그러니까 그 사업가와는 당장 정리해요. 아무리 들어도 사기꾼이에요.”
“네가 그분을 못 봐서 그래!”
“우리 만났던 그 커피 하우스. 거기 왔던 동행인 아니에요?”
리브의 물음에 브레드가 멈칫했다. 그녀가 단박에 특정 인물을 지목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브레드의 반응을 통해 제 추측이 맞았다는 걸 확인한 리브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래, 그날 마주쳤을 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도통 어울리는 상대가 아닌데 어쩐 일인가 싶었지. 설마하니 사기꾼에게 홀리는 중이었을 줄이야!
“브레드. 이건 정말 순수한 걱정이에요. 설사 후작이 후원 계약서를 적어 준다고 해도, 그걸 거래 물품으로 삼는 건 너무 위험해요. 심지어 그걸 담보로 돈을 빌려요? 늦기 전에 얼른 수습하는 게 현명한 일이에요.”
수습이 되는 상황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하려는 노력이라도 해야겠지.
리브의 당부에 브레드가 손을 내저었다. 리브의 어깨를 두드리는 브레드의 얼굴에 억지로 만들어 낸 미소가 걸렸다.
“걱정 마. 너무 시간을 끌지 않을 거야. 단지 후작님을 설득할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해서, 시간을 벌려는 것뿐이야. 내가 다음 작업 전까지 후작님의 시선을 사로잡을 획기적인 미술 기법을 개발할게.”
무언가 더 말하려던 리브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 이상 간섭하는 건 불가능하니, 브레드가 알아서 정신을 차리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
늘 브레드와 함께 오던 저택을 혼자 와서일까?
어쩐지 평소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저택의 규모를 새삼스럽게 인식하며, 리브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보통은 저택에 오자마자 작업실로 바로 이동했지만, 오늘은 브레드가 없으니 작업실로 갈 필요가 없었다.
대신 리브는 다른 방으로 안내되었다. 일전에 후작과 함께 추가 근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응접실이었다.
후작이 작업을 참관하지 않기로 한 뒤로 이 저택에서 후작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안내해 준 하인이 조용히 물러간 뒤 홀로 후작을 마주하게 된 리브가 긴장감 어린 눈으로 그를 보았다.
심드렁한 얼굴로 앉아 몇 개의 서신을 들추고 있던 후작이 시선을 들지 않은 채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늘 작업을 하지 못한다고?”
“네, 브레드의 몸이 좋지 않아서….”
차분한 리브의 음성 위로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서신의 내용이 영 탐탁잖았는지, 못마땅한 눈으로 종이를 훑어보던 후작이 짧게 혀를 찼다. 그는 가까이 놓여 있던 촛대 위에 서신의 끝을 가져다 댔다. 종이가 까맣게 오그라들며 불길이 확 번졌다.
검은 재가 탁자 위로 바스스 떨어졌다.
“그럼 선생은 그의 말을 전해 주기 위해 심부름을 온 건가?”
신경질적으로 검은 재를 털어 내던 후작이 무심한 눈으로 리브를 보았다. 당황한 리브가 대답하기 위해 입술을 뗐으나, 그보다 먼저 후작의 말이 이어졌다.
“그림 그릴 화가가 안 온다니, 그림 모델 또한 올 필요가 없었을 텐데.”
저를 빤히 응시하는 후작의 시선에, 리브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의 시선은 마치 그녀의 속을 전부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굳이 이 먼 저택까지 와서 후작을 마주하고 있는지.
“저는… 브레드의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오기도 했지만, 제게 주셨던 도움에 감사드린다는 인사도 드리고 싶어서….”
“인사라면 당일 받았던 기억이 나는군.”
후작의 눈빛에 미묘한 지루함이 서렸다. 마른침을 삼키며 그런 후작을 바라보던 리브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낮고 뜨거운 숨을 뱉은 그녀가 최대한 덤덤한 어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서 말했다.
“…제 추가 근무는 그림 작업과 별개니까요. 계속 중단되는 건지 들은 바가 없어서 일단 왔습니다.”
리브의 명료한 대답이 끝나자 응접실에 적막이 감돌았다.
발치를 내려다보며 후작의 대답을 기다리던 리브는 생각보다 더 길어지는 침묵에, 의아한 마음으로 눈을 들었다.
남은 서신을 태우고 있을 줄 알았던 후작이 리브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리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리둥절한 시선을 한 리브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후작이 입매를 미세하게 끌어 올렸다. 아주 희미한 웃음이었다.
“성실하군.”
그 말투가 마치 수업을 빼먹지 않는 학생을 칭찬하는 뉘앙스였다. 기특하다고 칭찬이라도 하는 듯 구는 그의 모습에 리브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차라리 돈독이 올라 추가 근무 횟수를 한 번이라도 더 늘리려는 거냐고 비웃었으면 의연하게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애 취급은 정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통 가늠되지 않았다.
리브의 당황이 가시기도 전에 후작이 연이어 말을 던졌다.
“다친 곳은?”
“낫고 있는 중… 아.”
민망함을 억누르며 대답하던 리브가 멈칫했다. 그제야 그녀는 제 다리에 아직 시퍼런 멍이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후작이 그녀를 나신으로 앉혀 두는 이유는, 그녀의 깨끗한 몸을 보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멍 자국과 딱지가 앉은 상처로 얼룩덜룩한 몸은 보고 싶지 않으리라.
애초에 이렇게 올 필요도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리브는 저의 어리석은 판단에 탄식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곧 이어질 후작의 축객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뜻밖의 질문이었다.
“발목은?”
후작의 시선이 치맛단으로 향했다. 리브는 무심코 그 시선을 피해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곧장 제 행동을 인식하고선 얼른 자리에 멈춰 섰다.
“괜찮, 괜찮습니다.”
밀리언의 수업 외에는 크게 외출할 일이 없었다. 심하게 뛰지 않으면 그녀도 다쳤다는 걸 까먹고 생활할 정도로 나아진 참이었다.
리브의 대답에 후작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남은 서신을 한꺼번에 태워 버린 그가 거뭇하게 얼룩진 장갑을 탁탁 털며 리브를 지나쳤다.
“오늘은 추가 근무를 일찍 시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