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32)화 (32/138)

아까보다 명확한 거절이었다. 그 말에 카밀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짐짓 우는 소리를 냈다.

“오, 제가 로이데스 선생님의 미움을 산 건 아니죠?”

“일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그런 감정을 가질 정도로 저희가 오래 알고 지내진 않았죠.”

명백하게 선을 긋는 리브의 태도에 카밀도 더는 뻔뻔하게 묻지 못했다.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매를 매만지던 그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기어이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타지에서 제가 사귄 지인이 선생님뿐이라, 조금 서운하네요. 가끔 이렇게 뵈면 잡담이라도 어울려주세요. 제가 이래 봬도 사교계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으니, 대화가 심심하진 않을 겁니다. 아주 사소한 가십부터, 후작 같은 거물의 뒷이야기 같은 것까지요.”

다소 짓궂은 어조로 말을 맺은 카밀이 장난스럽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의 말을 들으며 잠깐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던 리브가 마침내 천천히 입술을 뗐다.

“네, 그러죠.”

카밀이 말하는 후작이란 아마도 디무스 디트리언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카밀이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해 봐야 진위를 알 수 없는 가십일 게 뻔하지만….

그래도 내심 궁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밀리언보다는 신빙성 있는 이야기를 해 주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라도, 그녀는 후작에 관해 조금 더 많은 걸 알고 싶었다.

***

한동안 평화로운 날이 이어졌다.

여전히 저녁에는 집 밖을 나가지 못했으나, 코리다의 약은 넉넉하게 비축해두었고 밀리언의 수업은 해가 지기 전에 마쳤으니 괜찮았다.

곧 있을, 누드화 작업이나 추가 근무 후 저녁에 귀가할 일이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그때는 마차를 제공해 주니까 괜찮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대책 없는 믿음이긴 했으나, 이미 후작은 그녀를 위해 강도를 처리해 준 적이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위험에 처하는 걸 방관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리브는 다음 작업 날짜를 차분하게 기다릴 수 있었다.

…당일이 되어서 이런 소식을 듣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이번 주는 작업을 못 한다고요?”

한 시간 뒤에, 정해진 장소로 마차가 그들을 데리러 올 것이다. 그래서 브레드를 만나러 작업실에 왔는데, 그는 평소와 다르게 출발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채였다.

그러고서는 한다는 소리가, 오늘은 작업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그래.”

“그걸 후작님께서 허락하셨어요?”

경악 어린 리브의 얼굴을 확인한 브레드가 어정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일단 서신은 전했어. 도착했는지 모르겠지만.”

리브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브레드를 꽤 오래 보아왔고, 덕분에 그가 지금 딴생각에 빠져 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브레드, 이 작업은 평범한 그림 작업이 아니잖아요. 요즘 성실하게 그리더니, 갑자기 왜 이래요?”

바로 지난주만 해도 브레드는 곧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 거라며 자신만만했었다.

그뿐인가? 그림을 완성한 뒤에는 후작을 공식적 후원자로 업은 본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혼자 행복한 망상에 젖어 들기 일쑤였다. 리브가 뭐라고 하든 귓등으로 안 듣고 말이다.

“무슨 일 있는 거죠?”

“오늘은 몸이 안 좋아.”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브레드는 한겨울에 홑겹만 입어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는 제 건강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니까.

“거짓말하지 말아요.”

브레드는 대답 대신 꼬질꼬질한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그러고도 모자라 손수건을 두 손으로 연신 만지작거리며 불안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그 모습이 어느 날의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그가 리브와의 약속을 어기고, 옆얼굴이 들어간 누드화를 그린 바로 그날의 풍경 말이다.

“브레드.”

“…혹시 마차가 오면 대신 말 좀 전해 줘. 내가 앓아누웠다고 말이야.”

“최소한 저에게는 사실대로 말해 줘야죠.”

“리브….”

브레드는 더 묻지 말라는 표정으로 리브를 애처롭게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리브도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디트리언 후작에게 줄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심지어 일반적인 의뢰도 아니고, 그가 사간 그림을 되찾기 위해서 대신 줄 그림을 그리는 작업.

원활한 작업을 위한 모든 편의까지 받는 마당에 이런 식으로 멋대로 굴어서 좋을 게 없었다.

어떻게든 사유를 듣고야 말겠다는 리브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브레드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실 내가 그림을 빨리 완성하면 좀, 곤란해.”

“곤란하다고요?”

“그래.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 후원 계약서를 작성해야 해서….”

“후원 계약서?”

리브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어렴풋이, 그가 또 무슨 사고를 쳤다는 예감을 했다.

“그 보좌관이라는 사람한테 슬쩍 말을 꺼냈는데 영 소식이 없어. 이대로 그림을 완성하면 후작님과 연이 끊어질 거라고.”

메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브레드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후작님을 계속 뵐 기회가 있으니까 말이야, 어떻게든 남은 기간 동안 그분 눈에 들면 후원 계약서를 써 주시지 않겠어?”

그러니까 브레드의 말은 후작에게 후원을 받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는데 무시당했고, 이 와중에 그림을 완성하면 후작을 만날 명분이 사라지니까 곤란하다는 소리였다.

어떻게든 작업이 끝나기 전에 후작의 후원을 받아 내겠다고.

리브의 얼굴에 떠오른 황당함을 본 브레드가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꼭 후작님의 후원이 아니어도 내 재능을 알아봐 주셨으니까 좋은 후원자와 연결해 주실지도 몰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할 거야!”

아무래도 브레드는 후작의 후원을 노리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는 ‘후원 계약서’ 자체를 구하는 게 목적으로 보였다.

“후원 계약서가 왜 필요한 거예요?”

횡설수설 말을 이어가던 브레드가 리브의 물음에 입을 딱 다물었다. 브레드의 이마에 다시 한번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 반응을 찬찬히 살펴보던 리브가 눈매를 가늘게 접었다.

“또 도박이에요?”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브레드가 단숨에 부정했다. 격렬하게 손을 내젓는 그의 얼굴에 진심이 가득해서, 일단 도박이 아니라는 말은 사실로 보였다.

“그럼 뭐예요?”

도박은 아니지만 다른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리브가 재차 추궁하자, 곤란하다는 얼굴로 고민하던 브레드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사실… 내가 최근에 알게 된 아주 유명한 사업가가 있는데 말이지. 그 사람이 수도에서 활동하거든. 원하면 내 그림을 팔아 줄 수도 있고, 수도에서 개인 전시회를 열어 줄 수도 있는 사람이야!”

처음엔 주저하더니,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잔뜩 상기된 목소리였다. 브레드는 눈을 빛내며 리브의 반응을 보았다. 리브가 깜짝 놀라거나 감탄하기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안타깝게도 리브는 전혀 감탄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놀랍기는 했다. 단지 그 놀라움이 브레드가 기대한 그런 종류가 아니라는 게 문제일 뿐. 리브가 ‘사업가’라는 단어를 듣고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사기꾼’이었다.

설마….

그러나 사정도 모르고 대뜸 사람을 매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리브는 일단 차분하게 질문했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랑 어떻게 알게 된 건데요.”

“그야….”

브레드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리브가 다시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설마 우리 작업에 관해서…?”

“절대 아니야! 아무리 내가 입이 가벼워도, 비밀을 꼭 지켜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아!”

아무렴, 브레드가 아무리 사리 구분을 못 해도 설마하니 후작을 직접 언급하고 다녔으려고. 그런 짓을 했다면 후작이 진즉 알아채고 무언가 조처를 했을 것이다.

“그저 좀, 부유한 귀족 눈에 들어서 조만간 후원을 받게 될 것 같다고 술김에 몇 번 말한 적이 있어. 그런데 그 사람이 마침 투자할만한 화가를 찾다가 내 이야기를 들은 거지!”

그러고 보니 카밀이 그런 소리를 하긴 했었지. 분명 브레드가 요즘 엄청난 후원자를 만났다며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닌다고 했다.

브레드와 전혀 친분이 없는 카밀이 알 정도라면, 적어도 동종 업계에서는 어느 정도 소문이 났다는 의미일 터였다.

브레드가 어떤 꼴로 돌아다녔을지 너무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리브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노골적인 한숨에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짓던 브레드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런데 그, 내가 데뷔를 못 했잖아? 그러니까 실력을 증명할 만한 그런… 보증서 같은 게 필요하다는 거야.”

“…그림을 팔아줄 건데 후원자가 있는 화가를 찾는다고요? 앞뒤가 안 맞잖아요.”

애초에 후원자가 왜 후원자인데.

리브의 지적에도 브레드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후작을 후원자로 삼겠다며 목을 매던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태세전환이었다.

“요즘은 후원자에게 모든 걸 의지하지 않는다고. 옛날처럼 후원자에게 의지했다가는 큰일 나! 게다가 수도에서 전시회를 열 수 있다잖아! 대관 비용도 벌써 냈…!”

“대관 비용이요? 전시회를 열어 준다면서 대관 비용을 왜 브레드가 내는 건데요? 아니, 그전에. 그만한 돈이 있긴 했어요?”

돈이 생기는 족족 도박장과 술집에서 써 버리는 사람이?

어처구니없다는 어조로 묻는 리브의 모습에 브레드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버럭 언성을 높였다.

“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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