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테와 지그힐트.
어딘가 익숙한 가문 이름에 리브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리브는 최근 보았던 신문에서 그 이름을 떠올려 냈다.
정작 원하던 신약 소식은 찾지를 못하고, 옆 나라 대귀족의 파혼 소식만 읽었던 바로 그 신문.
말테와 지그힐트는 바로 그 떠들썩한 파혼의 주인공들이었다. 옆 나라 토르스텐의 고명한 대귀족이자, 대대로 유명한 추기경이나 명장, 정치가를 배출했다고 소문이 자자한 가문이었다. 아마 두 가문의 결합 당시에는 워낙 당연하다는 반응이 많아서 크게 화제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만큼 파혼이 충격적이라서 옆 나라인 이곳 베렌의 지방 도시 부에르노까지 퍼졌고.
“토르스텐에 대한 관심이 아주 지대하구나, 밀리언. 네가 이렇게 외교에 관심이 높은 줄 몰랐네. 펜던스 남작 부인께 꼭 이 재능을 잘 키워 달라고 당부드려야겠어.”
펜던스 남작 부인은 언제나 자식의 학업 성취도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어머니였다. 그러니 리브가 밀리언의 ‘새로운 재능’을 알린다면, 기뻐하며 기꺼이 그 재능을 개화시켜 주려 노력할 터였다.
다소 극성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제 어머니의 교육열을 떠올린 밀리언이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꺄악! 선생님! 저는 수업을 더 늘리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제가 관심 있는 건 사랑이지 외교가 아니에요!”
“다행이구나. 그 흥미진진한 사랑이 펼쳐지는 곳이 바로 사교계니까. 어서 그 교재를 읽고 지식을 쌓아야겠지?”
결국 두 사람의 대화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부드럽게 웃으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리브의 모습에 밀리언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투덜거렸다.
“으…. 사교계는 카밀 선생님이 해 주시는 이야기가 훨씬 재밌어요.”
이 책에 써 있는 말은 전부 할머니가 하는 잔소리 같다며, 밀리언이 투덜거렸다.
“마르셀 선생님이 사교계를 잘 아셔?”
“엄청요! 선생님도 들으시면 이런 교재가 얼마나 재미없는지 알게 되실걸요?”
예술가나 그 후원가들에 관해서만 잘 아는 것처럼 굴더니, 실은 좀 더 귀족 사회에 깊숙이 연관된 모양이다.
변변찮은 가문이라더니, 그게 아니었나?
“카밀 선생님은 분명 아가씨들에게 인기도 많으실 거예요.”
“그래, 그러실 것 같네.”
“그렇죠? 다음에는 카밀 선생님에게 사교계의 스캔들에 관해 물어봐야겠어요!”
엉뚱한 곳에 의지를 불태우는 밀리언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준 리브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카밀이 어떤 가문 출신이든, 얼마나 인기가 많든 그녀가 더 알 필요는 없었다. 굳이 약속을 잡지 않고선 그와 만날 일이 없을 테니까.
마주칠 때마다 자신을 눈에 띄게 반가워하는 수려한 청년의 얼굴을 떠올리던 리브가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그가 이따금 조언을 구하겠다며 서신을 보낼 주소를 받아 갔던 게 떠오른 까닭이었다.
‘이사를 했으니 새로운 주소를 알려 주어야 하나?’
잠깐이나마 고민하던 리브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딱히 밀리언을 가르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굳이 알려 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 급하면 밀리언을 통해 무슨 말이라도 전해 오지 않겠는가.
리브는 잠깐 든 상념을 털어 버리고는, 단호하게 교재를 펼쳤다.
이번에야말로 밀리언은 딴짓을 하지 못하고, 자신이 틀린 문제들의 오답 정리를 성실하게 마치고서야 책상 앞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어이 오늘치 진도를 전부 나가고서야 수업을 끝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날이 어둑해지진 않은 상태였다.
리브가 일부러 수업을 일찍 시작한 덕분이었다. 아마도 당분간은 이렇게 일찍 일을 시작해서 해가 지기 전에 귀가해야 할 듯했다.
습관적으로 하늘을 확인한 리브가 아직 밝게 빛나는 햇볕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을 당하자마자 집을 옮길 수 있게 되어 어찌나 다행인지. 그 동네는 정말이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리브는 펜던스 남작가의 정문을 지나쳐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제가 당할 뻔했던 범죄의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나자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얼른 다른 상상을 해야 했다. 아무 연관도 없는, 다른….
그 순간, 그녀는 제 뒤에 바짝 다가온 인기척을 느꼈다.
“헉!”
소스라치게 놀란 리브가 어깨를 움츠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반응에 등 뒤로 다가왔던 사람도 덩달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로이데스 선생님?”
“아…. 마르셀 선생님.”
등 뒤에서는 카밀이 그녀를 향해 어정쩡하게 손을 뻗은 자세로 굳어 있었다. 멋쩍은 얼굴로 손을 내린 카밀이 난처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너무 빨리 걸으셔서 얼른 쫓아온다는 걸, 대뜸 놀라게 해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제가… 과민했어요.”
여전히 놀란 심장은 진정되지 않았고, 창백하게 변한 얼굴색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리브는 애써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이 빈말이라는 걸 눈치챘는지, 카밀은 여전히 미안한 기색이었다.
“그냥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아, 네.”
“저는 펜던스 남작님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그림 몇 작품을 봐 달라고 부탁하셔서요.”
민망함 때문인지, 카밀은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주절 덧붙였다. 본인의 목덜미를 연신 문지르는 그의 손길에서, 지금 그가 느낀 멋쩍음을 엿볼 수 있었다.
저렇게까지 미안하게 생각하니 리브도 딱딱한 태도를 고수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한결 진정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군요. 그럼 어서 들어가 보세요.”
당장 돌아설 기세인 리브의 모습에 카밀이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직 약속 시간에 조금 여유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그보다 이사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정말입니까?”
그걸 카밀이 어떻게 알았을까?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리브가 의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보았다. 그는 리브의 의문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제가 엉뚱한 곳으로 서신을 보내게 되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되네요.”
애초에 그가 리브에게 서신을 보내려던 이유는 밀리언의 지도법 때문이다.
하지만 서신을 보낼 일이 생기기는 할까? 리브는 당장 오늘 수업을 회상했다. 밀리언이 했던 말을 떠올려 보자면, 딱히 카밀의 수업을 싫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리브의 수업보다 더 좋아할 수도 있었다.
“밀리언에게 전해 듣기로는 사이가 아주 좋으신 것 같던데요. 잘 적응하셨으니 제가 드릴 만한 조언은 없을 것 같아요.”
“알고 있는 몇 가지 가십으로 잠깐 흥미를 끈 것뿐입니다. 이러다가 또 언제 막막해질지 모르죠.”
옅은 미소와 함께 튀어나온 대답은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모호한 눈으로 카밀을 응시하던 리브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질문했다.
“…그런데 제가 이사한 건 어떻게 알게 되셨죠?”
“밀리언과 대화하다가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아, 혹시 비밀스러운 일이었나요?”
그는 뒤늦게 끌어 올렸던 입매를 죽 내리며 리브의 눈치를 보았다. 대번에 꼬리를 내린 강아지처럼 저를 보는 그의 모습에 리브도 더는 날카롭게 반응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저 모습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거라면, 카밀은 정말 뛰어난 연기자라고 해야 했다.
리브는 억지로 합리화해 보려 노력했다.
밀리언은 평소 리브와의 수업 시간에서도 곧잘 딴소리했다. 그런 태도가 다른 수업에서라고 다를 리 없으니, 미술 수업에서도 마찬가지로 온갖 잡담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래, 카밀에게도 페몽 거리에 있다는 케이크 가게 이야기를 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리브는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었다. 정확히 그 원인을 짚어 낼 수는 없었지만.
“그다지 비밀스러운 일은 아니에요. 단지 좀 놀라서요.”
“자꾸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하네요. 그런데 갑자기 이사하셨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건 아니시죠?”
난처한 얼굴로 이마를 긁던 카밀이 이내 걱정스러운 눈으로 리브를 응시했다.
“실은 예배당에서 마주쳤을 때도 제대로 에스코트하지 못 해 드려서 마음에 걸렸습니다. 제 눈에는 예배당 인근 동네 분위기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었거든요. 지났으니 하는 말이지만, 이사하시기를 참 잘하셨어요.”
카밀과 예배당에서 마주친 날은 하마터면 강도에게 큰일을 당할 뻔했던 날이기도 했다. 카밀이 그 사실을 알 리 없는데도, 리브는 괜히 찔리는 마음에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날은 별일 없었어요. 이사는 본래 예정했던 일정이고요.”
이사 고민을 안 했던 건 아니니까.
애써 그렇게 자기 위안을 한 리브가 대강 말을 둘러댔다. 그러자 카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럼 제가 어디로 서신을 보내면 될까요?”
이미 에둘러서 주소를 알려 주는 걸 거절했음에도, 카밀은 모른 척하고 있었다. 겨우 부드러워졌던 리브의 얼굴이 다시 어색하게 굳었다.
이건 좀, 너무 집요하지 않나. 보아하니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되도록 좋게 넘어가려 했으나, 더는 표정을 관리하기가 힘들었다. 떨떠름한 눈으로 카밀을 응시하던 리브가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굳이 서신을 주고받을 필요는 이제 없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