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30)화 (30/138)

“언니 발목은 괜찮겠어? 오늘은 집에서 쉬는 게 낫지 않을까?”

“큰 부상 아니라고 어제 말했잖아. 금방 다녀올게.”

리브의 말에 코리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리브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네왔다.

어제 조금만 움직여도 찌릿하던 발목은, 푹 자고 일어난 다음 약간 나아진 상태였다. 자세히 보면 절뚝거리는 걸음이 티가 날 테지만, 이 정도라면 외출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리브는 낯설기만 한 현관문을 지나 마당을 가로질렀다.

집 주변 지리는 미리 머릿속에 집어넣은 상태였다. 친절하게도 아돌프가 동네 지도를 챙겨 준 덕분이었다. 지도에는 근방에 위치한 가게며 소소한 편의 시설까지 전부 표시되어 있었다. 시중에 유통되는 지도와 다르게, 따로 정보를 더 추가해서 제작한 듯했다.

덕분에 리브는 헤매지 않고 신문팔이 소년을 찾아냈다.

대체로 신문팔이 소년들은 소식이 빠르다. 아무래도 신문을 팔며 이런저런 소식을 미리 주워듣는 까닭이었다. 게다가 자기들만의 유대 관계를 만들어 나가기 때문에, 종종 소문의 온상지로 활동하는 경우가 있었다.

“신문이요!”

“신문은 괜찮아. 대신 뭐 하나 묻고 싶은데.”

리브가 소년에게 동전을 쥐여 주었다. 소년은 해맑게 웃으며 리브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어젯밤 살인 사건 소식 같은 건 없었니?”

“비공식적으로요?”

비공식적인 살인이라는 게 존재한단 말이야?

상상도 못 했던 사실을 알게 된 리브가 어정쩡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어…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어휴, 그런 일이야 많죠.”

소년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부에르노의 뒷골목에서는 평범한 아가씨들께서는 상상도 못 할 무서운 일들이 일어난답니다!”

어디서 본 건 있는지, 소년이 어설픈 신사 흉내를 내며 과장되게 말했다.

“하지만 어젯밤의 부에르노는 아주 평화로웠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리브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동전을 하나 더 쥐여 준 뒤 몸을 돌렸다.

평화로웠다고. 그렇게나 큰 총성이 울려 퍼졌는데 평화로웠다니.

만약 그녀가 꼼짝없이 강도에게 당했다면, 그러고도 평화로웠다는 말이 나왔을까? 상상만으로도 오싹했다.

아무튼 한밤중에 총성이 울린 것도, 그 총에 맞아 사람이 쓰러진 것도 알려지지 않은 걸 보면 후작이 알아서 잘 해결한 듯했다. 그라면 아마도 모든 문제를 말끔하게 수습할 능력이 있을 테니까. 하물며 그가 직접 사람을 쏜 일이니, 당연히 탈 없이 무마되도록 정리했을 것이다.

리브는 총에 맞은 그 강도를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후작을 걱정한다고 하는 게 옳았다. 행여나 그가 그녀 때문에 불필요한 사건에 휘말리면, 재정적으로 그에게 의지하게 된 리브 역시 난처할 테니까.

물론 꼭 재정적인 문제 때문은 아니고….

아니고….

“아직도 예배당에서 신을 찾나?”

리브가 자신의 가슴께를 지그시 눌렀다.

빠르게 뛰는 심장의 고동이 어째서인지 그녀의 기분을 조금, 참담하게 만들었다.

***

발목을 조금 접질린 것으로 밀리언의 수업을 빼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리브는 피멍이 든 제 다리가 치마로 가려진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펜던스 남작가에 도착했다.

“선생님, 선생님!”

“응, 밀리언. 듣고 있어.”

“페몽 거리 근처로 이사하셨다면서요!”

오늘도 밀리언은 수업보다 잡담에 집중했다. 리브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밀리언의 시험지를 채점했다. 빗금이 많아질수록 리브의 이마에 잡히는 주름도 덩달아 늘었다.

“거기에 진짜 맛있는 케이크점이 있어요!”

입맛이 까탈스러운 밀리언이 맛있다고 할 정도라면 정말로 훌륭하다는 의미였다. 리브가 밀리언의 말에 반응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밀리언이 한층 더 생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페몽 거리 중심가에 있는 보석상 골목 맞은편이요! 거기 생크림 케이크가 정말 맛있거든요.”

“오, 그렇구나. 그런데 밀리언. 분명 복습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많이 틀렸지?”

절반은 틀린 것 같은데. 아니, 절반보다 더 틀렸나?

아무래도 밀리언은 복습하라는 그녀의 당부를 전혀 지키지 않은 게 분명했다.

“케이크와 함께, 과일 주스도 팔아요. 그 자리에서 과즙을 내는 모습도 볼 수 있어요!”

“성인식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이렇게 많이 틀려서야, 선생님이 펜던스 남작 부인을 뵐 면목이 안 서네.”

리브가 이마를 짚었다. 펜던스 남작 부인이 이 시험지를 보면 정색하며 수업 방식을 바꿔 달라고 상담해 올지 몰랐다.

“제 성인식은 아직 2년이나 남았어요. 그보다 선생님!”

“밀리언, 네가 해야 할 공부가 예절 교육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선생님을 더 근심스럽게 하고 있다는 걸 아니?”

“으, 선생님….”

꿋꿋하게 딴소리를 하던 밀리언이 결국 어깨를 늘어뜨리며 백기를 들었다. 리브에게서 얌전히 시험지를 받아 든 밀리언이 시무룩한 얼굴로 틀린 문제를 확인했다.

밀리언이 배우고 있는 건 사교계 예절이었다. 요즘 어린 영애들이 배우기에는 다소 고리타분하나, 펜던스 남작 부인과 사전에 수업 과정을 상의했던 리브로서는 제외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밀리언이 장차 사교계 활동을 하려면 꼭 익혀야 하기도 할 테고.

“솔직히 이런 거 다 옛날에나 통하던 거잖아요.”

시험지를 팔랑거리던 밀리언이 입을 삐죽거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리브도 사실 완전히 장담하지는 못했다. 정작 그녀는 사교계 활동을 하지 않으니 당연했다.

다만 지금 가르치고 있는 내용은 그녀가 클레망스 기숙 학교에 재학할 당시 배웠던 것으로, 다른 모든 귀족 동기들도 필수로 익혔던 과목이었다. 그러니 밀리언도 최소한 지식은 익혀야겠지.

“제가 사교계 활동을 할 때쯤이 되면, 전부 다 바뀔걸요?”

“네 희망 사항은 잘 알겠지만, 사교계는 생각보다 더 보수적이란다.”

밀리언은 전혀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나 내내 뻗대며 외면할 수는 없었는지 마지못해 교재를 펼쳤다.

“그런데 선생님, 정말로 옛날에는 태어나자마자 약혼을 했어요?”

안타깝게도 밀리언의 집중력은 채 3분을 넘기지 못했다. 턱을 괴고 꽃받침을 만든 밀리언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리브를 보았다.

“그건 또 어디에서 읽었어?”

“제가 어제 읽은 책에서 여자 주인공이, 태어나자마자 얼굴도 모르는 남자랑 약혼했어요!”

“아하, 새로운 로맨스 소설이구나.”

어쩐지, 왜 복습을 안 했나 했더니 소설을 읽느라 바빠서 그랬나 보다. 아무리 공부를 싫어해도 평소에는 이 정도로 복습을 안 해 오지 않았는데.

리브는 굳이 듣지 않아도 밀리언이 어제 얼마나 늦은 시간 잠들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밤을 새웠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성인식 때 운명 같은 사랑에 빠져서,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약혼을 깨요!”

“진취적이고 저돌적인 주인공이네.”

심지어 주인공이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약혼을 깨기까지.

아무래도 이번에 읽은 소설 때문에 고리타분한 사교계의 생리에 거부감이 생긴 모양이지. 리브는 밀리언의 이 비협조적인 수업 태도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비로소 그 원흉을 찾아냈다.

밀리언은 소설에 열심히 몰입하는 독자였다. 그리고 보통 그 몰입도는 소설이 얼마나 재밌느냐에 따라 깊이가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밀리언의 반응을 보건대 어제 읽은 소설에는 그야말로 중증 몰입 상태이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치 자신이 그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두 손을 가슴께로 모은 밀리언이 과장된 어조로 외쳤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남자 주인공이 왕의 사생아였던 거예요!”

“오, 놀랍네.”

무미건조한 리브의 대꾸에도 밀리언의 감정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두 주먹을 불끈 쥔 밀리언이 허공에 대고 두 팔을 힘차게 세웠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 위기가 닥치는데, 결국 사랑으로 극복해 내요!”

“그래, 정말 엄청난 소설이야.”

소설은 소설이구나. 무심하게 생각하며 리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중 약혼을 할 정도면 어지간히도 유서 깊은 가문일 텐데 그걸 뒤엎었다는 것부터 비현실적이고, 하필 왕의 사생아와 정분이 났는데 그 상황을 사랑으로 극복했다는 것도 황당하다. 왕의 사생아라면 단두대에서 목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을 텐데.

확실히 소설이라서 현실성을 많이 배제하고 낭만적인 사랑에 집중한 게 틀림없었다.

리브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 없는 밀리언은 소설의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로 다시금 눈을 빛냈다.

“그래서 선생님, 진짜로 옛날에는 막 태어나자마자 약혼했어요?”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어.”

“으악, 거짓말!”

낭만적이고 진취적인 사랑의 신봉자가 된 밀리언이 질색하며 몸을 떨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랑 어떻게 약혼을 해요?”

“유서 깊은 가문 간의 결합이지. 분명 밀리언 너도 전에 가문 간의 협력 관계에 관해서는 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건 어디까지나 협력 관계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약혼이라니! 그런 게 무슨 협력이에요!”

“혼인만큼 확실한 동맹은 없는 법이거든.”

제 낭만적인 상상을 가차 없이 깨 버리는 리브를 원망스럽게 보던 밀리언이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이제 달라질 거예요. 말테 가문이랑 지그힐트 가문도 파혼했다는데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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