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29)화 (29/138)

친절이라니.

디무스는 저도 모르게 조소를 흘렸다. 자신에게 그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또 있을까.

“계약이 종료되지 않았다고, 아돌프에게 듣지 않았나?”

“설마 이곳을 새로운 근무 장소로 사용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럴 리가.”

이 좁은 집은 디무스의 취향과 아주 거리가 멀었다.

“나는 우리의 계약이 원활하게 이행되길 바라.”

긴 다리를 꼬아 앉은 디무스가 허벅지 위로 깍지낀 손을 올려놓았다.

“굳이 선생과 계약을 체결한 가장 큰 이유는, 그 나신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지. 거기에 흠집이 나지 않기를 원하네. 더불어서 선생이 쓸데없는 것에 일일이 신경 쓰느라 근무에 소홀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고.”

직설적인 디무스의 말에 리브가 얼굴을 붉혔다. 늘 보이던 최소한의 경계심도 지금은 어디론가 벗어 둔 듯 무방비하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녀는 디무스의 말을 듣고 이해하기만도 버거워 보였다. 그리고 디무스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필사적으로 세우던 자존심이 조금씩 무너져 가는 게 눈으로 보여서 꽤 흡족했다.

“그래서 해결해 준 거야.”

“해결….”

“그래. 이 집. 물론 강도는…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 또한 선생의 운이겠지.”

리브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진즉 괜찮다든가, 아니라는 말로 모든 걸 완곡히 사양했을 것이다.

그러나 큰일을 겪고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그녀는 불안정했다. 조금만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여린 꼴이었다. 또한 살짝만 당기면 그대로 끌려올 것처럼 위태로웠고.

“마침 내가 오늘 그 동네를 방문했으니, 꽤 놀라운 타이밍이지 않았나.”

“…오늘 저희 동네는 무슨 일로 방문하신 거죠? 이 집에 관한 이야기라면, 추가 근무 때 하셨어도 되셨을 텐데.”

리브가 가까스로 차분하게 질문했다. 용케 이성을 되찾은 척하고 있었다.

잔뜩 힘이 들어가서 하얗게 질린 리브의 손을 힐끔 본 디무스가 나른한 어조로 대꾸했다.

“글쎄, 선생이 나를 애타게 부르기라도 한 모양이지.”

리브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별다른 말 없이 시선을 내렸다.

지친 얼굴로 생각에 잠긴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던 디무스가 의식적으로 등을 물렸다. 싸구려 소파는 전혀 편하지 않았으나, 그는 일부러 몸을 늘어뜨리며 기대앉았다. 그런 뒤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아직도 예배당에서 신을 찾나?”

때로 적을 처치하기 위해서는 인내를 해야 한다.

사정거리에 도달할 때까지. 총탄이 적의 숨통을 완벽하게 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이는 단지 전장에서만 통용되는 법칙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사로잡으려면 인내해야 한다. 대상이 꼭 적일 필요는 없었다.

그것이 사냥감이든, 다른 무엇이든.

고요하게 내리깔린 푸른 눈동자가 조금 전의 일을 회상했다. 벌벌 떨며 걸음을 빨리하던 여자, 그 뒤를 쫓던 날건달.

“가서 도울까요?”

당장 개입하려는 아돌프를 손짓으로 만류한 건 디무스였다. 어둠 속에 선 디무스는 조용히 숨을 죽였다. 총신을 쥐는 건 오랜만이었지만, 마치 어제까지 총질했던 사람처럼 피가 들끓었다.

그래, 이런 감각이었지.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총구는 흔들림 없이 표적을 겨냥했다. 어둠은 그에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윽!”

여자가 흉하게 바닥을 나뒹굴 때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디무스는 조금 더 기다렸다. 그가 원하는, 완벽한 사정거리에 도달할 때까지.

리브 로이데스가 그의 사정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그녀가 완전하게 제 손에 떨어질 타이밍을 가늠하면서.

그리고 마침내 건달이 위로 손을 치켜들고, 여자의 얼굴에 공포가 서리는 순간.

타앙!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던 여자가 총성이 울리는 순간 고개를 들었다. 제 눈앞에서 벌어진 기적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크게 뜬 눈으로.

그 여자가 지금 그의 눈앞에서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디무스는 그녀가 답을 청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녀는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 이가 저 위에 있는지 없는지 모를 신인지, 아니면….

디무스는 이번에야말로 그녀에게 확답해 주었다.

“총을 쏜 건 나였네.”

여자 얼굴이 무력하게 무너지는 것을 확인한 디무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 좋은 승리감이었다.

***

새로 이사한 집은 이전에 살던 곳과 상당히 떨어진, 조용하고 평범한 주택가였다.

이전 집은 이웃집과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신경 쓰이는 게 많았는데, 이사한 집은 주택 한 채가 통으로 리브의 집이었다. 당연히 이전 집과 비교하면 모든 게 좋았다.

어젯밤에는 정신없이 이곳에 오느라 집을 둘러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긴장이 풀리고 늦잠까지 푹 잔 덕분에, 눈을 뜨니 해가 중천이었다. 결국 리브와 코리다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집을 둘러보기 시작한 건 오후가 되어서였다.

“언니, 정말 우리 이제 여기서 살아?”

“응.”

언제나 좁은 단칸방 신세였던 터라 이렇게나 넓은 집이 신기했던지, 코리다는 연신 내부를 구경하기 바빴다. 그런 코리다를 보며 미소 짓던 리브가 조용히 몸을 돌렸다.

이곳은 모든 게 갖춰진 집이라, 정말 몸만 들어오면 되었다. 그래서인지 리브는 앞으로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는 게 영 실감 나지 않았다. 후작이 이 집에서 살라는 말을 꺼내다니. 집이 이렇게 좋아졌는데 집세는 그대로라니.

게다가 이곳에는 작은 마당까지 딸려 있었다. 번화가까지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고, 펜던스 남작가까지 가는 길도 훨씬 안전해졌다. 이웃집과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오갈 때도 주변 눈치를 덜 보게 될 듯했다. 심지어 근처에 경찰청까지 있었다.

물론 기존에 다니던 예배당과는 너무 멀어졌다지만…. 과연 그곳을 다시 방문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멀어진 거리는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가 멀어 다행이었다. 멀다는 핑계로 가지 않을 수 있으니.

“나 진짜로 이 방 혼자서 쓰는 거야?”

“마음에 들어?”

“당연하지!”

코리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깨질까 봐 애지중지 들고 와서 조심스럽게 꺼낸 오르골을 창틀에 올려 둔 코리다는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즉 방 한 칸을 따로 줄 수 있는 집으로 옮기는 건데.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던 리브는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애초에 후작이 없었으면 방을 고르는 호사는 누리지도 못했을 테니, 조금 전의 생각은 그야말로 헛꿈이었다.

“총을 쏜 건 나였네.”

서늘한 음성이 뇌리에서 되살아났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구해 주었노라 말하는 그를 어떻게 밀어내야 하는지, 리브는 알지 못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과분한 관심을 받고 싶지 않아서 내내 경계심을 곤두세웠으나, 어젯밤 모두 속절없이 무너졌다.

리브는 인정했다. 그녀가 그어 놓은 선을, 후작이 손쉽게 넘어왔음을.

그는 당장 필요한 모든 걸 제공해 줄 수 있는 남자였고, 리브가 그의 관심만 잡아 둘 수 있다면 얼마든지 더한 자비를 베풀 용의가 있어 보였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를 보며 변덕스럽고 예민하며 비사교적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적어도 리브는 그들보다는 후작과 가까워졌다.

‘이상한 취미를 가지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일지도 몰라.’

단지 곁에 두는 이가 소수일 뿐, 정말로 좋은 사람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리브에게는 그랬다.

리브에게는… 신보다도 더 대단한 남자였다.

“그런데 언니, 어제 본 그 아저씨는 누구야?”

“아저씨?”

“응, 나를 여기로 데려와 준 그 아저씨.”

코리다를 이곳까지 데려온 사람은 아돌프였다. 그는 리브가 후작과의 대화를 거의 끝마칠 즈음 코리다를 데리고 이 집에 돌아왔다. 분명 코리다에게 낯선 사람을 조심하라고 당부해 두었던 리브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얼핏 들으니 리브가 넘어지며 다리를 다쳤다는 소식을 코리다에게 전한 듯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 쉽게 코리다를 꾀어내다니.

아돌프는 어처구니없어서 우두커니 선 리브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떠났다. 코리다는 아돌프와는 무슨 대화를 한 건지 퍽 인상 깊게 그를 기억했다.

“이 집을 구하면서 알게 된 분이야.”

“집주인?”

“집주인은 아니고… 그냥 중개인.”

후작은 코리다와 마주치기 전에 먼저 나갔다. 그가 홀연히 떠난 뒤, 리브는 갑자기 얻게 된 이 새로운 집에서 한참이나 멍하게 앉아 있었다.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아니었다면 몇 시간 동안 겪은 일을 전부 환상으로 치부해 버렸을 것이다.

“그 아저씨는 포멜 아저씨보다 훨씬 멋진 것 같아.”

“그래?”

“응!”

적어도 아돌프가 리브에게 나쁘게 대한 건 아닌 듯하니 다행이었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아돌프는 첫 만남 때도 리브에게 신사적으로 대해 주었다. 후작도… 말을 좀 험하게 하지만 행동은 늘 괜찮았고 말이다. 손수건을 빌려주었을 때도, 강도에게서 그녀를 구해 주었을 때도.

그러고 보니 어제 총에 맞은 그 강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후작이 뒤처리를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행여 강도가 살아서 보복이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강도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꼴을 두 눈으로 본 리브는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확률인지 알았다. 그러나 한번 가능성을 떠올리고 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코리다. 언니는 잠깐 밖에 나갔다 올 테니까 집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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