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제 존재감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리브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눈치를 보며 치마를 움켜쥔 그녀가 이를 악물고 달음박질쳤다.
탁탁탁!
그녀를 쫓아 덩달아 달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야말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평소에는 그래도 한두 명의 사람이 지나다니던 길인데, 왜 오늘따라 누구 하나 나와 있지 않은 걸까.
도움을 청할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으나 딱히 눈에 띄는 곳이 없었다. 집들은 굳게 닫혀 있고, 창문들은 커튼이 쳐져 있었다.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말이다.
비명을 지르면, 누군가 나와 주기는 할까?
이 동네 사람들은 다들 본인이 앞가림하기만도 바쁜 사람들이었다. 행여 남의 분쟁에 잘못 휘말려서 다치기라도 하면, 생계에 직접적으로 지장이 생길 사람들.
당장 리브가 그들의 입장이라고 해도, 밖에서 비명이 들리면 나와 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가 나간다 한들 도움이 되지도 않을 테고, 괜히 잘못 휘말리면 코리다까지 위험해질 테니까 말이다.
오히려 문을 더 단단히 잠그지 않을….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달음박질치던 발목이 크게 꺾였다. 질척한 진흙탕을 밟고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다.
“윽!”
퍽!
몸이 휘청거리며 앞으로 기울었다. 반사적으로 땅을 짚어서 얼굴이 쓸리는 건 겨우 막았지만, 무릎이 크게 부딪쳤다. 흙에 뒤섞인 오물 냄새가 얼굴로 확 끼쳤다.
아픔을 느낄 정신 같은 건 없었다. 리브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마음처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녀를 쫓아오던 기척이 등 뒤까지 따라붙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리브가 넘어진 상태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두운 가운데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가까이 온 그에게서 불쾌한 악취가 났다.
“사, 사람 살….”
벌벌 떨며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목구멍이 무언가에 콱 막힌 것처럼 목소리가 나지 않았다.
사내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 손에 몽둥이 같은 게 들려 있는 것을 확인한 리브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타앙!
날카로운 총성이 적막하던 골목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리브의 얼굴에 무언가 뜨거운 액체가 확 끼얹어졌다. 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리브가 입술을 떨며 천천히 눈을 떴다.
“컥….”
피 끓는 소리와 함께, 피를 토한 거구의 몸이 옆으로 기우뚱 무너졌다.
“하아, 하아….”
눈앞에서 쓰러진 이를 멍하게 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던 리브가 뒤늦게 뺨을 문질렀다. 기분 나쁜 감촉의 액체가 손등에 묻어났다. 어두운 와중에도 그것이 피라는 건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피가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 정도로 줄줄 흘러나왔다. 하지만 죽은 건 아닌지, 사내의 몸이 꿈틀거리며 조금씩 경련하는 게 보였다. 덜덜 떨던 리브가 주저앉은 채로 몸을 뒤로 물렸다. 팔이며 다리며 자꾸 힘이 빠져서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어떻게든 사내와 멀어지기 위해 발버둥 치는 리브의 머리 위로, 갑작스럽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십니까?”
“히익!”
놀라서 목을 움츠린 리브가 위를 휙 올려다보았다. 상대는 하얗게 질린 리브의 얼굴을 확인하고서는 안쓰럽다는 듯 탄식했다.
“…아돌프 씨?”
“많이 놀라신 것 같군요.”
아돌프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정신이 없는 와중 가까스로 그것을 받아 든 리브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내에게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으며, 아돌프가 친절한 어조로 말했다.
“일단 그걸로 피를 닦으시죠.”
“아, 아돌프 씨가 왜 여기에…?”
아돌프가 힐끗, 골목을 둘러보았다.
그리도 크게 총성이 울려 퍼졌는데, 밖을 나와 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불이 켜져 있던 집에서는 아예 불을 끄고 사람이 없는 것처럼 숨을 죽였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지면 누군가 내다볼 것이다. 혹은 벌써 두꺼운 커튼 뒤에서 그러고 있을지도 모르고.
“일단 자리를 옮길까요?”
“…네?”
아돌프가 모자를 조금 더 깊게 눌러쓰며 빙긋 웃었다.
“후작님께서 기다리십니다.”
***
디무스에게는 몇 개의 건물이 있었다. 어떤 것은 대외적으로 내보이는 것이고, 어떤 것은 차명으로 소유 중인 것.
지금 이 작은 집은 후자였다. 차명으로 사 두기는 했지만, 딱히 쓸모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아마도 오늘 이 집의 쓸모를 결정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한없이 좁은 집 내부를 둘러보았다. 딱히 구경하려는 목적은 아니라서, 의미 없이 던지는 시선이 무료하기만 했다.
“로이데스 양을 모셔왔습니다.”
시큰둥한 눈으로 벽난로를 응시하던 디무스가 힐끗, 문가를 돌아보았다. 열린 문 너머로는 창백한 얼굴의 여자가 서 있었다.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기는 했으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안색이 조금 전의 광경을 떠올리게 했다.
제 것이 아닌 피를 뒤집어쓰고, 엉망진창으로 얼룩진 차림을 한 채 벌벌 떨던 여자.
“늦었군.”
벽난로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확인한 디무스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그 말에 리브가 희게 질린 입술을 천천히 달싹였다.
“치료를 받다 보니.”
“치료?”
디무스의 시선이 리브의 뒤쪽에 선 아돌프에게로 향했다.
“가벼운 타박상입니다.”
늦지 않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는데.
“흠집이 났다고….”
디무스가 언짢은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냈음에도 리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디무스의 기분 같은 걸 신경 쓸 여유도 없어 보였다.
하기야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의 눈치를 볼 수는 없겠지. 웬 놈에게 습격받을 뻔했고, 눈앞에서 그놈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걸 보았으니. 그것도 피를 뒤집어쓸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디무스는 턱짓으로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일단 앉지.”
“이쪽에 앉으시면 됩니다, 로이데스 양.”
아돌프가 리브의 팔을 부축해서 소파로 이끌었다. 조심스럽게 걷는 리브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디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가벼운 타박상이라고 하지 않았나?”
“넘어지면서 발목을 접질리셨다고 합니다. 충분히 쉬면 나으실 수준입니다.”
디무스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밑단 아래로 얇은 발목이 살짝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리브를 조심스럽게 부축한 아돌프가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물러났다. 넋을 반쯤 빼놓은 채 아돌프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던 리브가 뒤늦게 그를 돌아보았다. 흔들리는 시선 속에 미약한 걱정과 애원이 깃들었다. 잠깐 사이에 아돌프에게 꽤 많은 심적 의지를 했다는 의미일 터다.
디무스는 그런 리브를 그저 조용히 응시했다. 아돌프를 애처롭게 보던 리브는, 여지없이 꽉 닫히는 문을 보고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나, 선생?”
“아, 네.”
“안색이 좋지 않은데.”
“좋지 않은 일을 겪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리브의 두 손이 잘게 떨렸다. 그녀는 떨림을 참으려는 듯,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평소 그녀가 보여 주던 의연한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뜻밖의 사건이긴 했지.”
“…신세를 졌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리브의 감사 인사는 진심이라기보다는, 거의 미리 머릿속으로 준비했던 말을 쏟아 내는 수준이었다. 횡설수설 말을 뱉는 와중에도 불안해하는 감정이 온몸에서 드러났다.
저 움츠러든 어깨나, 분주하게 발치를 살피는 눈동자나, 핏기없는 입술 따위에서.
“선생이 다칠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빨리 움직일 걸 그랬어.”
두서없고 상투적인 감사의 말을 늘어놓던 리브가 멈칫했다. 이 방에 들어온 이후 내내 바닥만 보고 있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크게 뜬 녹색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혹시 총을 쏜 게 후작님이셨나요?”
상상도 못 했다는 듯 경악하는 그녀의 모습에 후작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누구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당연히 아돌프 씨가….”
더듬거리며 말을 하던 리브가 조금씩 냉정함을 되찾았다. 단순히 놀라기만 했던 시선에 희미한 의혹이 섞였다. 설마하니 디무스가 나서서 무언가를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물론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서 디무스가 손수 나섰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확답을 원하는 듯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오는 리브를 모른 척 외면하며, 디무스가 방을 쓱 둘러보았다.
“치안이 상당히 나쁜 동네더군. 오늘 일이 단발성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던데, 나의 억측인가?”
그 말에 리브의 얼굴에 수심이 서렸다.
“오늘 일은 드문 경우입니다. 원래 이렇게까지 험한 골목이 아니었는데….”
“문제는 선생이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이지.”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리브가 입을 다물었다.
“선생은 그 길로 편하게 다닐 수 있겠나?”
당연하게도,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조금만 날이 어두워져도 길을 지나가기가 꺼림칙하겠지. 핏자국도 남지 않은 골목을 지나갈 때마다 그때의 공포를 되살릴 것이다. 그 위협적인 그림자와 어디 하나 도움 청할 곳 없던 삭막한 주변, 서늘하고 어두운 공기까지.
당장 지금만 해도 어떠한가. 그 길을 지나다닐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리브의 표정은 단박에 얼어붙은 상태였다.
디무스는 그런 그녀를 향해 짐짓 관대한 어조로 말했다.
“이 집에서 살게. 집세는 그간 선생이 내고 있던 만큼만 받지.”
“…이 집이요?”
리브가 뒤늦게 방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그제야 이곳이 늘 찾던 외딴 저택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오히려 이 집은 평범한 가정집에 가까웠다. 그간 사람이 살지 않아서 생활감이 없고 어딘가 삭막하긴 하지만.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흔들리는 눈으로 집 안을 돌아본 리브가 미간을 좁혔다. 당혹스러운 어조에는 그녀가 지금 느끼고 있는 혼란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제게는 너무 과분한 도움이십니다. 왜 이런… 친절을 베푸시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