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드의 작업 속도가 빨라졌다.
후작이 참관을 중단한 뒤부터였다. 후작의 방해 없이, 필요한 만큼 작업실을 사용하게 되자 그간의 부진을 만회하겠다는 듯 브레드는 열심히 작업에 몰두했다.
분명 바라던 일이었음에도 리브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후작의 참관이 중단된 이후, 리브의 추가 근무 역시 기약 없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아돌프는 당분간 후작이 자리를 비워서 추가 근무를 할 필요가 없다고 전해 왔다. 계약이 종료된 것은 아니며, 단지 잠깐 멈춘 것뿐이라는 설명과 함께.
계약이 종료되지 않았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추가 근무를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처지는 영 좋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브레드의 작업 속도가 빨라지니 마음이 더욱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브레드가 그림을 다 그리고 난 뒤에도 이 추가 근무가 이어질까?
잠깐이나마 맛보았던 두둑한 돈주머니를 잊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리브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게다가….
추가 근무가 갑자기 중단되고서야 리브는, 자신이 생각보다 후작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리브의 입장에서는 불가항력이었다. 생각보다 그와 보낸 시간이 길었고, 자주 얼굴을 본 덕에 심리적 거리감이 줄어든 상태였다. 물론 후작의 외적 요소도 무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결벽적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그런 취미가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오직 저만 그 대단한 남자의 비밀을 안다는 사실은 못내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단지 저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그 남자도 그녀를 아주 조금쯤은 남들과 다르게 대했던 것 같다.
“그래 봤자….”
리브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변덕으로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지난 대화가 그의 심사를 뒤틀었으니 전부 글러 먹었다.
추가 근무가 없는 덕분에 날이 저물기도 전에 귀가할 수 있게 된 리브는 기운 없이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그녀를 불안에 떨게 했던 정체불명의 눈초리가 없어졌다는 게 그나마 이 상황에서 그녀가 얻은 유일한 위안이었다. 밤늦게 비싼 마차를 타고 퇴근하는 일이 없어졌으니, 동네에 돌던 그 이상한 소문도 사라졌을 것이다.
그녀는 습관처럼 예배당 쪽으로 향했다. 한동안 추가 근무니 뭐니 정신없이 지내느라 예배당을 찾는 건 오랜만이었다.
가까워지는 예배당 건물 앞에는 익숙한 사람이 빗자루를 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리브 양!”
“안녕하세요, 베트릴.”
오랜만에 만난 베트릴은 여전한 모습이었다. 그를 보니, 요 몇 주간 그녀가 겪었던 모든 일이 한바탕 꿈처럼 느껴졌다. 사실 지금이 현실이고, 그동안 후작과 얽혔던 모든 일은 환상이 아닐까 싶었다.
리브를 향해 반갑게 인사한 베트릴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늘따라 신의 품을 찾는 분들이 많으시네요.”
그의 말에 리브의 눈동자가 예배당의 낡은 입구로 향했다. 손님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녀는 이곳에서 종종 마주쳤던 뜻밖의 인물을 떠올렸다.
혹시 후작이 저 안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느낌이었다. 까닭을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등허리가 뻣뻣해졌다.
마른침을 삼킨 리브가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베트릴의 말대로, 예배 시간도 아닌데 장의자에는 많은 이들이 앉아 있었다. 리브의 눈동자가 빠르게 그 뒤통수를 훑었다.
백금발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실망한 표정으로 멈춰서 있던 리브가, 뒤늦게 제 꼴을 인식하고 퍼뜩 놀랐다. 실망?
‘정신 차려.’
스스로에게 매서운 질책을 건넨 리브가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마침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몇몇 사람이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리브의 걸음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빈자리에 가까워졌을 때, 리브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맞은편에서 나오던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 로이데스 선생님?”
“마르셀 선생님?”
“와, 선생님을 이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아.”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향해 인사하는 이는 카밀이었다. 그는 활짝 웃으며 말을 하다 말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문득 표정을 굳혔다.
“선생님께서도 이곳에 오실 정도라니, 그가 확실히 대단하긴 하군요.”
카밀은 조금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 실망한 것 같기도 했다.
사정은 모르겠으나 그가 멋대로 어떠한 결론을 내렸다는 건 알아챌 수 있었다. 리브가 눈살을 찌푸리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신지 모르겠는데요.”
“괜찮습니다. 부에르노에서 그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카밀이 애써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 영문 모를 태도에 리브가 더욱 딱딱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죄송하지만 마르셀 선생님. 저는 이 예배당을 오래 다녔어요.”
“…그를 보러 오신 게 아니라는 말씀이세요?”
“도대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디트리언 후작이요.”
리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반응을 확인한 카밀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모르셨나 보네요.”
들고 있던 모자를 눌러쓴 카밀이 힐끗, 예배당 내부를 돌아보았다. 그들과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몇 사람이 대화 소리에 반응하듯 뒤를 힐끔거리며 돌아보는 게 보였다. 리브 역시 조금씩 모이는 시선을 느끼곤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대화하기에 적절한 장소는 아니네요. 나가서 이야기할까요?”
잠시 고민하던 리브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배당 근처에서 따뜻한 차도 없이, 야외 의자에 앉아 카밀과 나눈 대화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결국 본래 하려던 기도는 하지도 못하고 예배당을 나섰다. 그러나 기도가 아쉽지는 않았다. 그보다 아쉬운 건, 이 예배당이 더는 한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었다.
“이곳을 다니시는 줄 알았으면 저도 진작 와 볼 걸 그랬습니다.”
“앞으로 다니시면 되죠.”
“이런, 곧 이 한 몸 앉을 자리도 없어질 것 같은걸요.”
엄살 같은 말을 내뱉은 카밀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마침 예배당으로 늦은 발걸음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을 힐끗 본 카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소문이 더 퍼질 것 같으니까요.”
그의 말에 리브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지금 저 예배당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전부 어떠한 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이었다.
…디트리언 후작이 이 예배당을 다닌다는 소문.
카밀도 그 소문을 듣고 이 예배당을 방문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대단하신 디트리언 후작께서 다니시는 예배당이라니, 혹시 남다른 기운이라도 흐르나 싶어서 와 봤다’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던 와중 밀리언의 생일 파티 때 ‘후작에게 관심이 있다’고 말했던 리브가 예배당에 나타나니, 그녀도 소문에 이끌려 후작의 얼굴을 보러 온 것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리브가 작고 낡은 예배당 건물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카밀이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그래도 다들 그게 헛소문이라는 걸 금방 알아챌 겁니다.”
“헛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물론이죠.”
카밀이 어깨를 으쓱하며 리브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후작이 이런 낡은 예배당을 다닐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라면 저택 내부에 예배실을 따로 마련하고도 남을 텐데.”
“…그러게요.”
카밀의 말을 들으니 새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왜 이곳에 찾아왔던 걸까?
“어, 혹시 로이데스 선생님께서는 이곳에서 후작을 보신 적 있으신 겁니까?”
“그럴 리가요. 후작님이 이곳에 왜 나타나시겠어요.”
리브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돌이켜 보면 후작과 마주칠 때마다 그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켰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앞으로도 굳이 알려서 좋을 게 없을 인연이었다.
“하긴, 그렇죠?”
가볍게 웃는 카밀을 태연하게 바라보던 리브가 어두워진 하늘을 확인하고선 몸을 돌렸다.
“이만 저는 가 봐야겠어요. 너무 늦었네요.”
“댁이 어디세요? 근처까지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멀지 않은 곳이라 괜찮아요. 늦었으니 어서 가 보세요.”
카밀은 재차 권유했으나, 리브의 거절을 확인하고는 더 묻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괜찮은 사내였다. 어쩌다 저런 사내가 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리브가 털레털레 걸음을 옮겼다.
날은 금방 어두워졌다.
북적거리던 예배당을 빠져나와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서니 괴리감이 더욱 심하게 느껴져서, 리브는 괜히 발소리를 크게 냈다. 오늘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행인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어둡고 적막한 분위기가 골목을 더욱 스산하게 만들었다.
리브는 괜히 느껴지는 쌀쌀함을 지우고자 한껏 몸을 웅크렸다. 팔짱을 낀 채 종종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불현듯 제 걸음 소리에 섞인 미세한 소리를 감지했다.
저벅.
한껏 소리를 죽인 그것은 낯설고 묵직한 발소리였다.
등줄기부터 목덜미까지 소름이 쭈뼛 솟았다. 당황한 얼굴로 멈춰 선 리브가 뒤를 확, 돌아보았으나 어두운 골목 그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괜한 착각일 거야.’
애써 그렇게 스스로를 달랜 리브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한번 곤두선 신경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아까보다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걷던 리브가 숨소리를 죽이며 제 뒤로 귀를 기울였다.
저벅, 저벅.
착각이 아닌 것 같았다. 제 발소리와 겹쳐서 나는 저 소리는 그녀의 것보다 더 무겁고 조심스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카밀의 친절을 마다하지 말 걸 그랬다.
뒤늦게 밀려드는 후회와 함께 공포심이 온몸을 잠식했다. 만약 저 발소리의 주인이 며칠간 그녀가 느꼈던 눈초리의 주인공이라면 어쩌지? 사라진 줄 알았는데, 사실 내내 저를 지켜보다 오늘 강도질을 하려는 거라면?
지금 그녀는 헌금으로 내려던 돈 몇 푼이 전부였다. 이거라도 던져 주면 도망칠 수 있을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와중 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그에 따라 뒤따라오는 소리도 속도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