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25)화 (25/138)

“…그냥 간단한 보조 업무야. 사무직.”

기어이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리브는 차마 리타를 마주 보기 어려워, 머리를 쓸어 올리는 척 시선을 피했다.

“하기야, 너는 학력이 좋으니까 그런 업무가 가능하겠구나.”

다행히도 리타는 별다른 의심 없이 리브의 거짓말을 받아들였다.

제 학력이 거짓말할 때도 쓸모가 있구나.

쓰게 웃은 리브가 다시금 단호한 목소리로 리타에게 당부했다.

“아무튼 리타. 네 의도는 알겠지만 코리다에게 삯바느질감을 전해 주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럴 바에는 내 일을 더 늘리는 게 나아.”

“그래, 그래. 알았어.”

코리다가 바늘 하나로 어디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지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을 작정이었는데, 리타는 그러한 리브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얼른 백기를 들었다. 그러고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은근한 말투로 질문했다.

“그런데 리브, 정말 하이롭을 다녀온 거 아니야?”

“아니야.”

“아, 드디어 우리 동네에서도 하이롭을 구경해 본 사람이 생기나 했는데.”

리타가 아쉽다는 듯 탄식하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기야, 우리는 가 봤자 좋은 꼴 못 볼 거야. 이런 차림으로는 입장조차 못 할 테니까.”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리브는 제 차림을 새삼스럽게 되돌아보았다. 낡은 외투와 너덜너덜한 모자 끈, 진흙이 말라붙은 구두까지.

아, 차림이 문제였구나.

문지기의 시선을 보고 대충 짐작하기는 했다지만 생각보다 더 처참한 제 모습에 리브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꼴로 그 으리으리한 가게를 찾아가서 손님이라고 주장했으니, 귀족가의 심부름꾼만 상대하던 문지기가 그리 무시를 할 수밖에.

그녀가 가진 옷 중 가장 깨끗하고 점잖은 옷은 밀리언의 수업을 하러 갈 때만 입고 있었다. 아마 펜던스 남작가에 출근할 때처럼만 입었어도 오늘 같은 수모는 덜었을지 모르겠으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럴듯하게 차려입고 가게에 들어갔어도 큰 수확은 없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뭐, 나는 이 바구니를 반납하러 가야 해서 이만 가 볼게.”

“그래.”

하늘을 힐끗 올려다본 리타가 바쁘다는 듯 인사를 건네고 몸을 돌렸다. 부산스럽게 멀어지는 리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리브도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옮겼다. 당장 포멜을 만나러 가려던 리브는 문득 제 손에 들린 과자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형편이 나아졌다는 소문이 돈다고 했던가.

포멜이 이 과자 봉투의 출처를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리브는 일단 집으로 방향을 돌렸다. 우선 봉투는 두고 나와야지.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는 집에 도착하기 직전, 옆구리에 가방을 낀 포멜과 마주치고 말았다.

“아니, 이게 누구야!”

누가 보아도 과장된 얼굴로 반가워하는 포멜의 모습에 리브가 떨떠름한 얼굴로 입술을 다물었다.

집세를 못 내고 있을 때는 그리도 날카롭게 노려보더니, 돈을 냈다고 저렇게 순식간에 태도를 돌변한다. 달리 이사할 곳이 없어서 계속 살고는 있지만 참 정이 안 가는 집주인이었다.

“리브!”

“안녕하세요, 포멜 씨.”

마지못해 아는 척을 하자 포멜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

“집세를 냈으니까요.”

“에이, 야박하게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집세 아니면 뭐 볼일이 없나? 동네 이웃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수상할 정도로 친근하게 구는 포멜의 모습에 리브가 경계심을 키웠다. 돈을 내기 전과 낸 다음의 태도가 달라지는 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딴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돌변하는 건 미심쩍었다.

리브의 눈초리에 서린 감정을 알아챘을 텐데, 포멜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친한 척 리브의 팔을 툭 쳤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포멜 씨가 신경을 안 써 주신다면 덜 힘들 것 같네요.”

떨떠름한 리브의 대꾸에 포멜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가까이 다가와서 슬쩍 손을 들었다.

“에이, 리브. 그래도 내가 이 동네에서는 그나마 이것 좀 만져 본 처지잖아.”

엄지와 검지를 비비며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포멜의 모습에 리브가 눈살을 찡그렸다.

“사람이 갑자기 돈을 많이 벌게 되면, 관리하는 법도 모르고 막 쓰거든. 내가 이런 쪽으로 투자하는 방법을 잘 알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리브, 요즘 생활 폈다며.”

“죄송한데 포멜 씨,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전혀 아니에요. 생활이 나아졌으면 당장 이사부터 했겠죠.”

리브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포멜은 눈을 가늘게 뜨며 능청스럽게 떠보는 말을 던져 왔다. 그러나 리브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고개를 내젓고는 그를 지나쳤다. 등 뒤로 포멜의 진득한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도대체 동네에 무슨 소문이 돌고 있기에 포멜까지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걸까. 리브의 마음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늘 지나다녀서 익숙하던 귀갓길이 어쩐지, 유독 낯설었다.

***

리브가 중앙 대로에 다녀온 뒤, 두 번의 추가 근무가 더 있었다. 그리고 그 두 번, 검은 마차에서 내릴 때 리브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어쩌면 신경이 예민해진 까닭에 괜히 있지도 않은 눈초리를 감지한 걸지도 몰랐다. 차라리 과민 반응하는 거면 다행일 텐데.

하지만 한번 피어오른 불안감은 차츰차츰 크기를 부풀렸다.

추가 근무 수당을 매일 당일 지급받는다는 것만 들켜도 누군가 그녀를 범죄의 표적으로 삼을 것이다. 아니, 차라리 그녀가 표적이 된다면 다행이다. 아픈 코리다는 그녀를 기다리며 늦은 저녁까지 홀로 집을 지키고 있질 않나.

리브는 당장 집의 보안을 점검했다. 현관 잠금쇠를 늘리고, 창문을 더 단단하게 잠갔다. 코리다에게도 낯선 사람을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하지만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돈을 많이 벌어서 마냥 기쁘기만 했는데, 이런 뜻밖의 애로 사항이 생기다니.

며칠 새 리브의 얼굴은 새카맣게 그늘졌다. 심지어 펜던스 남작 부인은 리브에게 ‘아프면 부담 가지지 말고 쉬라’며 걱정스럽게 조언을 해 올 정도였다. 리브는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대답했으나 남작 부인에게는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은 눈치였다.

차라리 이사를 갈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이사 갈 장소를 떠올려 보니 마땅한 곳이 없었다.

지금 생활에 여유가 생긴 건, 어디까지나 부에르노에서 가장 싼 동네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안전한 동네로 이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생활비가 필요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추가 근무만 믿고 고정 생활비를 늘리는 건 너무 위험했다.

만약 이사하자마자 추가 근무가 끝나 버리면?

생각을 거듭할수록 답은 보이지 않고 마음만 답답했다. 리브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오늘, 돌아가는 길에 또 누군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지는 않을까? 만약 제 품에 두둑한 돈 봉투가 있다는 걸 눈치채기라도 하면….

“선생.”

“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아….”

멍하게 앉아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었던 리브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던 리브는 이곳이 후작의 방이며, 자신이 추가 근무를 하는 중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오늘의 후작은 와인을 마시지 않고 있었다. 대신 불붙인 시가가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 방에 들어온 뒤로 한숨이 끊이질 않는군. 일이 지겨워졌나?”

마치 그녀가 바라면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게 해 주겠다는 듯한 어투였다. 순간 리브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닙니다.”

근래 그녀를 대하는 후작의 태도가 꽤 부드러워졌다. 정확히는 와인을 마셨던 바로 그날부터였다. 그러나 그건 기껏해야 얼마 되지 않았고, 후작은 얼마든지 태도를 돌변할 수 있는 예민한 남자였다.

그래서 리브는 티끌만큼 가까워진 거리감에 기대어 고민을 털어놓기보다는, 긴장감을 바짝 조이는 쪽을 택했다.

“신경 쓰이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녀의 선택은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후작에게는, 그녀의 사연을 캐물을 정도의 호기심이 전혀 없어 보였으니까.

그는 단지 리브가 추가 근무에 제대로 집중하지 않는 게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그냥 앉아 있는 것에 도대체 무슨 집중이 더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이 들었으면 그 앞에 상자 좀 열어 보겠나?”

후작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침대 옆에 자리한 작은 사이드 테이블 위에 웬 상자가 하나 있었다. 화려한 색에 커다란 리본까지, 상자 자체만으로도 아주 값비쌀 게 분명했다.

평소에 볼 수 없었던 물건인데 한참이나 모르고 있었던 걸 보면, 자신이 정말 정신을 쏙 빼놓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리브는 몰려드는 피로감을 애써 무시하며 몸을 일으켰다.

상자를 열기 위해서는 리본을 풀어야 했다.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해 포장된 것처럼 보이는 그 모습을 확인한 리브가 멈칫했다.

부드러운 청록색 공단을 어색하게 매만지던 그녀가 리본 끝을 잡아당겼다. 끈은 걸림 하나 없이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이건….”

열린 상자 안을 내려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는 리브의 뒤로, 무심한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착용해 보지?”

상자 안에 있는 것은 목걸이였다.

반짝이지 않으면 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얇은 줄에는 물방울 모양의 루비만 덩그러니 달려 있었다. 루비는 정교한 모양으로 커팅되어 있었는데, 색이 얼마나 선명하고 맑은지 손대기도 무서울 정도였다.

리브가 무심코 후작을 돌아보았다. 덤덤한 얼굴로 시가를 피우던 후작이 주저하는 리브를 보며 눈살을 찡그렸다.

그 반응은 리브의 등을 떠미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리브가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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