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안.’
그녀가 찾던 이름이었다. 도미니안 학술원은 상류층 귀족 자제들만 입학 가능한 곳이라 신문사의 단골 가십거리로도 곧잘 소모되었다. 당연히 오늘 신문에서도 그 이름은 여지없이 등장했다.
안타까운 점은 도미니안 학술원의 이야기만 있을 뿐, 의학 연구소 소식은 없다는 점이었다.
역시 신문으로 신약 소식을 알아보는 건 불가능한 방법이었을까?
리브의 시선이 우울하게 변했다. 코리다에게 애꿎은 화를 낸 뒤, 그녀는 그 신약이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고자 하는 참이었다. 신약이 성공적으로 개발되었다면 신문에서도 연일 떠들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일부러 가장 큰 신문사의 신문을 확인한 것인데.
그대로 신문을 덮어 버리려던 리브는, 기왕 돈을 주고 샀으니 다른 내용이라도 대강 훑어보자는 심정으로 종이를 넘겼다. 과연 대형 신문사에서 발간한 신문답게, 온갖 소식들이 항목별로 나뉘어 실려 있었다.
심지어는 국내 소식뿐 아니라, 해외 소식까지 있었다. 옆 나라의 대귀족들이 파혼했다는 소식이라든가, 누구 추기경이 곧 이 나라를 순방할 예정이라는 둥 소식이었다.
그런 일들은 리브와 전혀 상관이 없다 못해, 너무 까마득하게 멀어서 가십으로도 소모할 마음이 나지 않는 이야기였다. 심드렁하게 글자를 읽던 리브가 한숨과 함께 종이를 접었다.
그녀의 다음 목적지는 중앙 대로에 있는 약방 하이롭이었다. 부에르노에서 가장 큰 약방이자, 귀족가에 직접 약재를 납품하기로도 유명한 곳.
단골 약방 주인은 때때로 하이롭에서 다루는 엄청난 약재들의 양과 어마어마하게 많은 거래처를 부러워했었다. 신약에 관한 정보를 묻는 리브에게, 하이롭에서라면 아마 더 많은 소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해 주기도 했다.
중앙 대로에 있는 상점답게 하이롭의 외관은 그야말로 휘황찬란했다. 겉으로 봐서는 약방이라기보다는 의상실이나 보석상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였다.
저도 모르게 거리를 두고 멈춰 선 리브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런 뒤 결연한 표정으로 가게를 향해 걸었다.
그러나 그녀가 출입문 손잡이를 잡기도 전, 누군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네?”
눈을 동그랗게 뜬 리브가 눈앞의 남자를 보았다. 그는 리브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 들고 있던 종이를 확인하고서는 다시 물었다.
“혹시 포인 자작가에서 나오셨나요?”
“…아.”
도대체 얼마나 규모가 크면 출입문 앞에 문지기가 상주하고 있는 거지?
순간적으로 리브의 얼굴에 스친 당황을 확인한 문지기가 친절하게 웃던 얼굴을 조금 굳혔다.
“예약은 되셨습니까?”
“예약은 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죄송하지만 신분을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어느 가문의 소속이신지 밝혀 주시겠습니까?”
“…저는 가문 소속의 고용인이 아니에요.”
문지기의 얼굴에서는 이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방문 목적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문지기는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 사무적인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물론 여전히 리브의 앞을 가로막은 상태였다.
잠깐 주눅이 들 뻔한 리브는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약방을 방문하는 손님의 목적이라면 다들 같지 않나요?”
“아, 손님.”
문지기의 시선이 조금 묘해졌다. 리브가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을 깨닫는 순간, 문지기가 먼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하이롭에서는 다루기에 예민한 약재를 다수 보관하고 있어서, 가게 내부를 구경하는 일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구경하러 온 게 아니라….”
“구매를 원하는 상품이 희귀한 약재라면 예약을 하고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곳이 아니라도 ‘손님’이 방문하기 편한 다른 곳을 찾는 게 현명하시겠군요.”
설마하니 가게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할 줄은 몰랐던 리브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생각지도 않게 닥친 모욕감을 겨우 억누른 리브가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상담도 할 수 없는 건가요?”
“이용 안내는 이미 해 드렸습니다.”
“예약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리브의 물음에 문지기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종이를 힐끗, 내려다본 그가 짐짓 안타깝다는 듯 탄식했다.
“죄송하지만 당분간 예약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미 꽉 찼네요.”
예약조차 안 된다니. 리브는 이제 노기를 느꼈다. 문지기는 애초부터 그녀를 이 가게 안으로 들여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구매력이 전혀 없는, 그저 구경이나 하러 온 시답잖은 뜨내기로 여기는 게 틀림없었다.
이 무례함을 어떻게 따져야 할까.
잠깐 가게 문을 노려보던 리브는 어금니를 꾹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알겠어요.”
그녀가 순순히 물러나자, 문지기가 시큰둥한 얼굴로 관심을 거두었다. 그 모습이 얄미워서 어떻게든 가게에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치밀었다.
그러나 그 분한 마음은 잠시였다.
문지기의 판단대로, 리브가 하이롭의 중요한 손님이 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하이롭을 방문한 건 신약 소식을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지, 비싼 약재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부당한 모욕에 항의해서 하이롭의 문턱을 넘어 봐야 그저 리브의 자존심이나 세우는 게 전부겠지.
코리다에게 신약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으니만큼,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보를 얻고 싶었는데.
별다른 소득 없이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 힘들었다. 이렇게 빈손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리브는 아쉬운 대로 과자점에 들렀다. 일전에 펜던스 남작 부인이 선물했던 바로 그 과자를 파는 가게였다.
그때 선물 받았던 것처럼 비싼 과자는 아니지만, 적당히 괜찮은 과자를 살 정도의 여유는 되었다. 리브는 남은 돈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걸음을 옮겼다.
들어가기 전에 포멜에게 미리 다음 달 집세를 내 두는 게 좋겠다. 돈 문제로 포멜과 코리다를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리브!”
생각에 잠겨 걷던 리브가 그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멀리 저를 향해 반갑게 달려오는 여성을 의아하게 보던 리브가 낮게 탄성을 뱉었다.
“리타.”
그래, 그러고 보니 리타와도 할 이야기가 있었지.
“뭐야, 요즘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리타는 아직 코리다에게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듯했다. 한쪽 옆구리에 바구니를 낀 채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던 그녀가 리브의 손에 들린 과자 봉투를 보고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그거 비싼 과자 아니야?”
“저기, 리타.”
“세상에. 그 신문은 중앙 대로에서 파는 거지? 너 중앙 대로 다녀왔어?”
리브의 말을 듣지도 않고, 리타가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중앙 대로에 갈 일이 뭐가 있… 설마! 단골 약방을 바꾸기로 했어?”
리타는 단숨에 하이롭을 떠올렸다. 평소 코리다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리브를 자주 보아 온 덕분인 듯했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저를 보는 리타의 모습에 리브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냥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신문만 사러 간 거야. 그보다 리타.”
리브가 재차 차분하게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리타는 잔뜩 흥분해서 자기 할 말을 쏟아 내기 바빴다.
“세상에, 요즘 네 형편이 나아졌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막 짜증을 낼 뻔했던 리브가 그 말에 멈칫했다.
“아니, 리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소문이라니?”
“응? 요즘 네가 비싼 마차를 타고 퇴근하는 걸 누가 봤다던데?”
“내가 비싼 마차를 타고 퇴근한다는 게 무슨….”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던 리브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순간 그녀의 뇌리에 새카만 마차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는 장소는 가스등이 거의 없다시피 한 골목이고, 시간도 한밤중이라 인적이 없다시피 했다. 게다가 검은 마차라 눈에도 잘 띄지 않았을 텐데.
누군가 그 모습을 보았으리라 생각하자 순간 등골이 오싹했으나, 리브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 마차 겉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으니, 그녀와 디트리언 후작을 연결 지을 수는 없을 터였다. 검은 마차를 사용하는 게 후작만 있는 것도 아닐 테고 말이다.
“그건 단기로 잡은 일이야. 그보다 리타. 너 코리다에게 바느질을 가르쳤어?”
리브는 마차에 관해 구구절절 해명하는 대신, 화제를 돌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리브가 코리다를 얼마나 끔찍하게 챙기는지 알고 있는 리타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리며 우는 소리를 냈다.
“오, 리브. 설마 그 일로 화를 내려는 건 아니지? 코리다는 벌써 열다섯이야.”
“그 애는 아파. 환자라고.”
“하지만 온종일 그 좁은 집을 지키며 아무것도 안 하기에 코리다는 너무 성장했어. 소소한 바느질은 코리다에게도 좋은 기분 전환이 될 거야. 늘 너 혼자 생활비를 감당하는 걸 힘들어했잖아. 요즘 네 귀가 시간이 늦어져서 코리다가 얼마나 걱정이 많은 줄 알아?”
“나는 코리다에게 일을 시킬 생각이 없어. 코리다가 심심하다면, 읽을 만한 책을 사다 주면 되고. 그편이 그 애에게도 훨씬 나을 테지.”
생활비를 충당하기만으로도 바빴을 때야 엄두도 못 냈지만, 이대로만 돈을 벌 수 있다면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책을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코리다의 체력만 괜찮다면, 집에서 간단한 수업을 진행해도 좋고 말이다.
리브의 말에 리타가 입을 떡 벌렸다.
“책을 살 여유도 생겼어?”
리브의 입이 다시금 다물어졌다. 원치 않는 화제가 도로 튀어나와 버렸다. 떨떠름한 리브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리타가 걱정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속삭였다.
“어쩜, 리브. 너 위험한 일을 하는 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