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23)화 (23/138)

“…이게 뭐야?”

당연히 먼지만 가득해야 할 침대 아래에는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이 작은 집에서 자신이 모르는 물건이 있을 리 없는 터라, 리브는 주저하지 않고 바구니를 끌어냈다.

뒤에 덮여 있는 얇은 천을 들추자 안쪽에 천과 바늘, 실타래 등이 담겨 있는 게 보였다. 사정이 급할 때 몇 번이나 삯바느질에 도전했던 리브는 이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챘다. 다만 의아한 것은, 이게 왜 침대 밑에 있느냐는 사실이었다.

당혹스러운 눈으로 바구니를 내려다보던 리브가 가장 위에 놓인 천을 집어 들었다. 서툴게 보이는 바느질 자국을 확인한 리브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코리다를 돌아보았다.

“네가 한 거야?”

“그, 그게….”

“새로운 취미야?”

온종일 집에 혼자 있으려니 심심해서, 뒤늦게 이런 것에 취미를 붙인 것이겠지.

애써 그렇게 이해하려는 리브의 눈에 우물쭈물 선 코리다의 모습이 보였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 코리다가 발치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그 반응을 보고 있으려니 모를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 이런 걸 배웠어?”

리브는 한 번도 코리다에게 바늘을 쥐여 준 적이 없었다. 바늘뿐만 아니라, 식칼 같은 것도 그렇다. 가급적 위험한 도구는 꼭 필요할 때가 아니고서는 건드리지 말라고 가르쳐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에 코리다가 다쳤을 때, 피가 쉽게 멈추지 않아 크게 고생했기 때문이다.

코리다 본인도 상처를 입으면 남들보다 피가 더 많이, 오래 난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스스로 충분히 주의하며 지내고 있고.

아니, 주의하며 지낸다고 생각해 왔다. 이 바구니를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 어려운 건 아니라서 그냥.”

“코리다. 누가 너에게 이런 걸 가져다준 거냐고.”

바깥 걸음을 하지 않는 코리다가 갑자기 이런 바느질감을 얻어 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설마 포멜이 집세를 들먹이며 코리다에게 쓸데없는 바람이라도 불어넣은 건 아닐까? 이를 악문 리브가 바구니를 내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포멜 씨지? 너에게 이런 일이라도 해서 집세를 충당하라고 그래?”

당장이라도 그를 찾아가 따질 기세인 리브의 모습에, 코리다가 황급히 말했다.

“아니야! 그, 그냥 리타 언니가…!”

“리타?”

“리타… 언니한테 배웠어. 바느질 같은 건 집에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옆집 사는 리타는 리브와 코리다를 제법 애틋하게 여기는 이웃이었다. 리브의 또래이기도 한 그녀는 손재주가 몹시 뛰어나서, 자수로 가족을 먹여 살릴 정도였다. 집에서 일하다 보니 가끔 혼자 있는 코리다도 챙겨 주어서 리브가 고맙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걸 가르치는 줄 알았다면 진즉 당부해 두었을 것이다.

리브의 표정을 본 코리다가 울상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 내가 알려 달라고 졸랐어! 나도 이제 일을 할 나이잖아!”

물론 코리다는 열다섯이고, 집안 사정에 따라 생활 전선에 뛰어들기도 하는 나이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건강한 열다섯 소녀에게나 해당할 소리다.

“네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코리다. 누가 너에게 일을 하라고 했어? 언니가 분명히 말했잖아. 추가 근무를 하게 되어서 이제 급여가 넉넉하다고.”

“하지만 언니가 저녁도 못 먹고 늦게까지 일을 하니까….”

그 순간 리브는 저녁도 못 먹고 하는 ‘추가 근무’의 구체적인 광경을 떠올렸다. 헐벗은 몸으로 사내의 안줏거리가 되는 그 은밀한 근무를.

코리다는 리브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늦게까지 책과 서류에 시달리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외간 남자 앞에서 옷을 벗고 돈을 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적은 돈이라도 벌어서 어떻게든 가세에 도움이 되려 했겠지.

리브의 얼굴이 부끄러움과 민망함으로 인해 붉게 달아올랐다. 떳떳하지 못한 추가 근무로 인해 치민 화가 엉뚱하게도 코리다를 향했다.

“괜히 일하다 무리해서 쓰러지면, 누가 널 돌보는데?”

“나 바보 아니야! 내 몸 정도는 충분히…!”

“그러지 않아도 혼자 집에 있는데 이런 거 만지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피도 잘 안 멎으면서 어떻게 감당하려고?”

“난 그냥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너는 안 다치고 안 아픈 게 도와주는 거야!”

높아진 리브의 언성을 끝으로, 집 안에 적막감이 맴돌았다.

하얗게 질린 코리다의 얼굴을 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리브가 이를 악물었다. 곧장 치미는 자괴감에 뒤통수가 뻐근할 지경이었다.

“미안해. 언니가 말이 너무 심했어.”

이마를 짚은 리브가 기운 빠진 목소리로 사과했다. 멍하게 리브를 보던 코리다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선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언니가 걱정하는 게 당연한데.”

“나는….”

입술을 벙긋거리던 리브가 차마 코리다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나는 그냥 네가 너무 걱정돼서 그래. 나 없을 때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언니, 내가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던 코리다가 발을 동동 구르며 사과했다. 그 행동이 리브를 더욱 부끄럽게 만들어서, 그녀는 더욱 얼굴을 들지 못했다.

“언니 요즘 돈 많이 벌어. 그러니까 이런 짓 하지 마. 알았지? 네가 일하지 않아도 내 급여로 우리 사는 거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한 리브가 슬쩍 눈을 들었다. 코리다는 여전히 시무룩하게 기가 죽은 얼굴이었다.

“내가 건강했으면 좋았을 텐데.”

“곧 건강해질 거야. 이제까지 잘 버텼잖아. 사실 약을 사러 갔다가 들었는데, 이번에 새로운 신약이 개발됐대.”

약방 주인의 말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되었다. 그 약으로 완치할 거라고 확답할 수는 없었으나, 리브는 최대한 코리다가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그들의 장밋빛 미래를 두루뭉술하게 묘사했다.

코리다는 전부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처음보다 훨씬 안정된 얼굴이었다. 리브는 내심 안도하며 코리다에게 한껏 평온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어쩌면 정말로, 새롭게 만들어졌다는 그 약이 코리다의 건강을 되찾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좀 더 우수한 의사에게 코리다의 진료를 부탁할 수만 있다면.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에 골몰해야 하는 이 처지만 아니었어도 모든 게 더 좋아졌을 터였다.

만약 밀리언이 코리다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펜던스 남작가는 그 부유함으로 진즉 방도를 찾아냈겠지?

“리브는 귀족가에서 일하니까, 잘하면 연줄을 이용해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천진하기까지 했던 약방 주인의 말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연줄을 이용해서 신약을 구하라고? 그런 행운이 그녀에게 일어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제껏 신은 그녀의 사소한 기도조차 제대로 이루어 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혹시 아나? 기적이 일어날지.”

후작은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건 인간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었지.

당장의 곤궁함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감격해 감히 다른 무언가를 기대할 상상 따위는 해 본 적도 없었던 리브는 무심코 생각했다.

그라면 다시 기적을 일으켜 줄 수 있을까?

그라면….

거기까지 생각하던 리브는 거세게 고개를 내저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에게 기도하라고? 신약을 구해다 달라고? 코리다를 치료해 달라고? 그건 겨우 돈 몇 푼 벌게 해 준 것과는 차원이 다른 부탁이었다. 그가 그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고.

리브는 헛된 생각을 떨쳐 버리고자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집안일은 그녀가 처한 현실을 일깨우기에 더없이 좋은 수단이었다.

***

부에르노에서 가장 큰 거리는 도시 중앙을 가로지르는 대로변이다.

대로변 중앙에는 광장이 있었다. 광장 가운데 뾰족하게 선 시계탑 꼭대기에는 정각마다 울리는 종이 달려 있었는데, 부에르노 곳곳으로 퍼지는 맑은 종소리 때문에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장소이기도 했다.

시계탑 양옆으로는 쌍둥이처럼 꼭 닮은 분수대 두 개가 있었다. 그 또한 보기 좋은 풍경이라, 행인들이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곤 했다.

신문팔이 소년은 바로 그 분수대 중 한 곳 앞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외투를 움켜쥔 채 조심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리브가 신문팔이 소년을 발견하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중앙 대로는 그녀가 평소 자주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생활 반경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고, 이 대로에 자리 잡은 커다랗고 호화스러운 상점들 또한 방문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차와 말, 그리고 드물게 보이는 자동차만으로도 정신이 없어 보이는 거리였다. 거기에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인도 가득 지나다니고 있으니,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리브는 볼일만 보고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자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신문이요, 신문!”

북적이는 사람들 틈을 요리조리 지나 겨우 소년 앞에 선 리브가 동전을 꺼냈다. 곧 버석한 질감의 신문이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

사실 꼭 중앙 대로가 아니어도, 신문을 구할 수 있는 거리는 더 많이 있었다. 당장 리브가 주로 지나다니는 길에서도 몇 명의 신문팔이 소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만 그녀가 굳이 이곳까지 온 건 중앙 대로에서 파는 신문이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신문사에서 발간한, 가끔은 해외 소식까지 전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한 소식지이기 때문이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피해 길 귀퉁이로 걸음을 옮긴 그녀가 선 자리에서 신문을 펼쳤다. 관심 없는 기사들을 휙휙 넘기며 종이를 훑어보던 리브의 시선이 뚝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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