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22)화 (22/138)

사방으로 튀는 총탄, 괴로움에 찬 비명, 새빨간 피, 나뒹구는 사지와 신체의 일부들.

죽음, 죽음, 그리고 또 죽음….

엉망진창으로 조각난 파편 속에서 누군가 신을 부르짖었다. 아니, 모두가 신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남자는 알았다. 곧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세상이 적막해지리라는 것을.

새카맣게 불탄 땅 위에 남는 건 피비린내와 탄내, 그리고 홀로 우뚝 선 남자뿐이리라는 것을.

신은 인간을 구하지 않는다. 인간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이었다.

“주인님.”

하인의 부름은 아주 작아서 누군가를 깨우기 위한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디무스는 그 작은 목소리에 반응해 눈을 떴다. 애초에 잠이 들지도 못했으니 당연했다. 아마도 한두 시간 정도는 잠깐 눈을 붙였던 것도 같은데….

“씻을 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말한 하인이 종종걸음으로 물러났다. 넓은 침실에는 이제 디무스만 홀로 남았다.

하인이 조용히 정돈해 둔 커튼 너머로 희미하게 밝아진 새벽하늘이 보였다. 바깥을 확인한 디무스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흘러내리며 가려져 있던 상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느슨하게 걸친 가운 속은 맨살이었는데, 일부 드러난 그 살결 위로 오래된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디무스가 왼손으로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부드러운 백금발이 손가락 사이를 스치며 흉터를 간지럽혔다.

단순히 손가락 사이의 흉터뿐만이 아니었다. 전신 곳곳에 남은 흉한 흔적들은 매 순간 간지러웠다. 이따금 느껴질 리 없는 통증이 느껴지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피 냄새를 풍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디무스의 얼굴에 신경질적인 감정이 깃들었다.

그는 거칠게 걸음을 옮겨 욕실로 향했다.

하인이 준비해 둔 목욕물은 적당히 따뜻했다. 가운을 벗어 대충 던져둔 그가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누군가에게 제 맨살을 내보이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디무스에게 목욕 시중이란 존재하지 않는 일이었다. 적막한 가운데 욕조 바깥으로 출렁거리며 넘치는 물이 그의 몸을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차갑게 식었던 체온이 그나마 조금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욕조 턱에 대충 팔을 걸친 디무스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출렁거리는 물속에는 근육이 꽉 짜인 사내의 몸이 늘어져 있었다.

그의 전신에 있는 흉터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누구라도 이 몸이 완벽한 조각상의 표본임을 부정하지 못했으리라. 그가 이제껏 수집한 모든 조각상을 가져와도, 이보다 훌륭한 육체를 찾을 수는 없을 터였다.

흉터가 아니었다면.

그 전투가 아니었다면.

아니, 그리 따지면 너무 많은 것들을 탓해야 했다. 제 능력, 신분, 출신, 핏줄….

디무스는 어지러운 상념을 지우고자 다른 화제를 떠올렸다. 따뜻한 물 덕분에 점점 더 느른해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자니, 와인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그러한 감상은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와인을 홀짝이던 나체의 여자.

본래 디무스는 깨끗한 나체를 좋아했다. 제 흉터가 간지러울 때면 완전무결하고 티끌 한 점 없는 인간의 육체를 보며 심신을 다스렸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던 기분은 누드 작품을 볼 때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다치지도, 절단되지도 않은 온전한 육체를 볼 때면 말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예술 작품에 한정되었고, 이제껏 그는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을 이렇게 감상해 본 일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작업은 불가능했다. 옷을 벗고 그에게 달려들려는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라도 나체로 한방에서 시간을 보내자고 한다면, 상대는 기다렸다는 듯 디무스에게 교태를 부릴 터였다.

그런 면에서 리브 로이데스의 태도는 꽤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오직 그 몸만 흥미로웠는데, 태도도 재미있었지. 어제는 또 어떠했던가.

늘 앉던 침대 대신 소파를 택한 직후, 마치 그의 눈치를 보듯 눈을 굴리는 모습이 꼭 반쯤 길들인 야생 고양이처럼 보였다. 잔뜩 경계심을 세우는 척하면서 실은 조금씩 거리를 좁혀 오는 새침한 고양이.

평소와 달리 그녀에게 선뜻 와인을 건넨 건, 자신에게 약간이나마 마음을 연 그 태도가 기특해 선심 쓰듯 건넨 칭찬이었다.

“…스물다섯.”

나이를 언급했을 때 리브 로이데스가 지었던 표정을 디무스는 기억했다. 그녀는 부끄러워했다.

사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가 알기로 그녀는 미혼인데, 통상적으로 스물다섯의 평범한 여성들은 가정을 꾸린 상태이니까. 빠르면 자식도 두엇 낳았을 나이지.

혼기를 넘긴 여성의 취급은 생각보다 가혹하다. 암암리에 대다수는 리브 로이데스에게 어떠한 흠결이 있으리라고, 치명적인 결점이 존재한다고 확신할 터였다.

다만 디무스에게는 그런 문제가 딱히 중요하진 않았다. 약혼이니 혼인이니, 그보다 더 우습고 기만적인 제도가 또 있을까?

애초에 제도란 단지 고상한 척 세상을 꾸며 대기 위한 눈속임이었다. 그런 것이 없어도 남녀는 충분히 얽힌다. 아주 사소한 계기만으로도.

가령, 와인 한 방울이라던가.

디무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몸을 살짝 움직이자, 물 위로 드러난 빗장뼈를 따라 물방울이 길게 미끄러졌다.

“붉은 와인이라….”

다시 생각해도 디무스는 아무 흠집도 나지 않은, 깨끗하고 온전한 육체가 좋았다. 그러나 어제의 얼룩은.

“나쁘지 않았지.”

그래, 나쁘지 않았다. 하얗고 둥근 가슴 위로 떨어지던 붉은 얼룩이.

피비린내 대신 달콤한 와인 향을 풍기던 살갗이 생각보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먹음직스럽다니.

자신의 감상을 비웃던 디무스의 시선이 문득 아래로 향했다. 입 안으로 침이 고인다고 생각한 순간, 제 가랑이 사이로 성기에 힘이 불끈 들어간 까닭이었다. 일그러진 수면 아래로 반쯤 선 채 출렁이는 굵은 좆을 확인한 디무스가 낮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남의 살덩이를 내려다보듯 제 성기를 응시하던 디무스가 물속으로 천천히 손을 넣었다. 굵은 부피감은 손안에 들어가자 더욱 단단하고 커졌다.

미친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디무스는 고개를 뒤로 젖혀 기대며 몸의 긴장을 조금 더 풀었다. 긴 나체가 욕조 안으로 좀 더 잠기면서 물이 바닥으로 넘쳤다. 눈을 감은 디무스의 미간에 점점 더 깊은 골이 새겨졌다. 그는 입술을 살짝 벌렸다.

욕실을 울리는 낮은 신음성이 마치 배부른 짐승의 소리를 닮아 있었다.

***

단순한 추가 근무로 치부했던 시간이 겨우 와인 한 잔으로 돌변했다.

리브는 젖은 손을 앞치마로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설거지하다가 가슴팍으로 튄 물방울을 보고선 곧장 떠오른 게 디트리언 후작의 시선이라니, 분명 문제가 있었다.

“미친 게 틀림없어, 리브 로이데스.”

후작에 관한 생각은 야금야금 일상을 잠식해 나가서,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머릿속을 온통 가득 채웠다.

불과 몇 주 만의 결과였다. 당장 두어 달 전만 해도 리브와는 아무 상관이 없던 남자였는데, 이제는 시시때때로 그를 떠올리게 된다.

그 남자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번지는 독과도 같았다. 심지어 이 독은 달콤하고 치명적인 데다 중독성까지 있었다.

“언니, 오늘은 쉬는 날이야?”

물기가 남아 축축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리브가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과장된 그녀의 반응에 코리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

“어, 응.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일은 무슨.”

그릇의 물기를 대강 털어서 올려 둔 리브가 얼른 앞치마를 벗었다.

오늘은 모처럼 쉬는 날이었다. 근래 바깥을 나도느라 집 안이나 코리다에게 많은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으니만큼, 오늘은 하루를 꽉 채워 알차게 보낼 작정이었다.

“오늘은 안 나가?”

“응. 언니가 요 며칠 동안 너무 바빠서 신경을 많이 못 썼지? 밀린 집안일부터 좀 하고, 곧 요리도 해 줄게.”

아침 일찍부터 시장에 다녀온 덕분에 식료품 보관함은 가득 찬 상태였다. 넉넉해진 주머니가 양손을 평소보다 더 묵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뿌듯한 어조로 말하는 리브의 모습에 코리다가 어색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아, 응.”

평소라면 온종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손뼉을 치며 기뻐했을 텐데, 어째 지금은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리브가 의아한 눈으로 코리다를 살피려 했으나, 코리다가 먼저 재빨리 몸을 돌렸다.

리브는 그런 코리다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서운한 게 있는 걸까?

코리다의 약이 다 떨어진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지냈던 며칠간의 생활을 떠올려 보고 있으려니, 코리다가 어색하게 구는 것도 내심 이해되었다.

하기야, 서운한 게 당연하지.

리브는 언제나 코리다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요즘은… 리브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 다른 곳이란, 뭐.

무심코 다시 후작을 떠올린 리브가 재빨리 고개를 내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환기를 위해 작은 창문을 열고, 청소 도구를 챙기려니 등 뒤로 코리다가 작게 말을 걸어 왔다.

“청소는 내가 틈틈이 했어.”

“고생했네.”

웃으며 대꾸한 리브가 코리다의 침대로 다가갔다. 꼭 체력적인 문제가 아니어도 코리다의 손은 야무지지 못해서, 아마 구석구석 깨끗하게 치우지는 못했을 터였다. 이 낡은 집은 조금이라도 제대로 치우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벌레와 쥐가 들끓는 수준이라, 시간이 날 때 틈틈이 관리해 주어야 했다.

두 팔을 걷어붙인 리브가 본격적으로 침대보를 걷어 올렸다.

“아니, 언니 거기는 내가 다…!”

리브가 허리를 굽혀 침대 아래를 확인하는 것과, 코리다가 다급하게 외치는 건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