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21)화 (21/138)

유난히 늘어난 미술품들을 보고 내심 짐작하기는 했는데, 역시 후작의 재방문을 의도한 모양이었다. 꼭 후작이 방문하지 않아도 투자의 목적을 겸할 테니 손해 보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펜던스 가문은 돈이 넘쳐흐를 테니까 그 정도쯤이야 별로 부담도 되지 않겠지.

“후작님은 원래 바깥 걸음을 잘 하지 않으시잖아.”

“하지만 우리 집에는 두 번이나 찾아오셨는걸요? 분명 또 와 주실 거예요! 다음에 오시면 식사에 초대할 거래요. 그래서 요즘 식당 인테리어를 뜯어고치고 있어요!”

그건 너무 섣부르다고 말하려던 리브는 입술을 다물었다.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이니 정말로 어느 날 갑자기 펜던스 남작가에 다시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지. 그렇게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펜던스 남작가와 디트리언 후작의 친분이 기정사실이 되어 온 부에르노 사람들에게 퍼질 것이다.

반쯤 환상에 젖은 밀리언이 두 손을 맞잡으며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아, 얼른 오셨으면!”

“그분을 그렇게나 다시 보고 싶니?”

“물론이죠! 선생님께선 후작님을 가까이에서 뵙지 못하셔서 그래요. 정말이지, 어쩜 그런 분이 인간일 수 있죠?”

그래,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그 얼굴이 정말… 놀랍긴 해.

리브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몇 주 사이 제 일상 속에서 이토록 많이 언급되는 그의 존재가 놀랍다고 생각하며.

***

오늘도 어김없이 리브는 추가 근무를 진행했다. 따로 무슨 언질을 받았는지, 브레드는 이제 리브와 따로 움직이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저택의 가장 위층 끝방에 도착해 옷을 벗은 리브가 평소처럼 앉으려다가 멈칫했다.

사실 리브는 몇 번 안 되는 추가 근무 동안, 늘 후작에게서 등을 보이고 앉았다.

그는 관상용 화초를 원했지 대화 상대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를 마주 보고 있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따금 후작이 그녀의 뻣뻣한 뒷모습에 혀를 차기는 했으나, 다른 자세를 직접 강요한 것도 아니라서 모른 척 뒷모습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밀리언과 나눈 대화가 머릿속에 맴돈 까닭일까?

리브는 문득 이 적막한 공간 방에 앉아 있는 후작이 어떤 표정일지 궁금해졌다. 그건 그러니까, 말 그대로 호기심이었다.

바깥의 모든 사람은 디트리언 후작이 얼마나 냉정하고 무심한지, 그리고 예민하고 신경질적인지 말한다. 아마도 그들은 디트리언 후작이 웃는 모습 같은 건 전혀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가 나른하게 앉아 시가를 피우거나, 심드렁하게 와인을 마시는 모습 같은 것도.

이 특별한 취미 생활을 즐기는 후작의 표정은 아마도 남들이 아는 그런 모습과 다르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맹렬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는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 걸까? 첫날 그가 말했던 것처럼, 창가에 올려 둔 화초쯤으로 생각하고 무심하게 감상 중일까?

잠시 고민하던 리브가 조심스럽게 자리를 바꾸었다. 침대 옆에 놓인 긴 소파였다. 후작이 걸터앉은 자리에서는 아마도 옆으로 비스듬히 앉은 모습으로 보일 터였다. 리브로서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눈만 살짝 굴려서 후작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자리였다.

충동적으로 소파를 택한 리브는 미묘하게 긴장한 얼굴로 소파의 쿠션을 매만졌다. 그러다가 슬쩍 곁눈질로 후작 쪽을 힐끔거렸다.

그 순간 그녀는 후작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당연히 저를 보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이렇게 눈이 마주치니 고양이 앞에 선 쥐가 된 기분이었다.

이제 와 시선을 피하기도 뭐해서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고 있는데, 후작이 느리게 와인 잔을 드는 게 보였다.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에서 느긋하게 와인을 한 모금 머금는 그의 태도는 아주 여유로웠다.

와인 때문일까? 다물린 입술이 유독 붉게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피부가 흰 남자라서 그런지 얼굴에 색이 깃들자 퍽 요사스러운 분위기가 흘렀다.

“한잔 마시겠나?”

멍하게 후작을 바라보고 있던 리브가 화들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후작이 짧게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꼭 저를 비웃는 듯해서, 리브가 꾸역꾸역 다시 시선을 들었다.

“…주세요.”

반쯤은 오기였다. 혹시나 제 태도가 후작의 심기를 거스르진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도 그는 개의치 않으며 여분의 잔을 하나 더 꺼냈다.

붉은 와인이 투명하고 둥근 잔 속에서 출렁였다. 적당히 잔을 채운 후작이 손수 그것을 들어 리브 쪽으로 건넸다. 직접 와서 건네줄 생각은 없는 듯했고, 와서 받아 가라는 태도였다.

마른침을 삼킨 그녀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서 그에게 다가갔다.

추가 근무를 시작한 이래 이런 나체로 이토록 후작에게 가까이 선 것은 처음이었다. 눈치를 보며 어느 정도 다가선 리브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녀에게 잔을 건넨 후작은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며 제 와인으로 관심을 돌렸다.

“당도가 높아 마시기 나쁘지 않을 거야.”

심드렁한 후작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소파로 돌아온 리브는 기묘한 느낌이었다. 오늘의 후작은 평소와 다르게 제법 친절했다. 영문을 알 수는 없지만 뭔가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깨질 것처럼 얇고 투명한 와인 잔을 빤히 내려다보던 리브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댔다. 한 모금이라고 하기에도 멋쩍을 정도로 적은 양의 와인이 혀를 적셨다.

코끝에 맴돌던 달콤한 향기와 달리, 혀에서는 제법 쓰고 떫은 맛이 났다. 리브가 무심코 미간을 찡그렸다.

“술을 못 하나 보지?”

시선을 거둔 줄 알았는데, 후작은 리브의 표정 변화를 전부 지켜본 모양이었다. 리브는 대답 대신 다시 한번 잔을 기울였다. 조금 전보다 많은 양의 와인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 갔다.

뜨겁기도 하고 쓰라리기도 한 느낌이 속을 후덥지근하게 달구었다.

“전혀 달지 않은데요.”

“애로군.”

“…익숙지 않은 것뿐이지요.”

리브의 새치름한 대답에 후작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스물다섯이랬나.”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화제는 그녀의 나이에 관한 것이었다. 잔을 쥔 손에 움찔, 힘이 들어가는 것을 애써 참으며 리브가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통상적으로 귀족들은 성인이 되기도 전에 약혼식을 하고, 성인식을 치르자마자 혼인을 했다. 그들의 기준에서야 리브의 나이는 한참이나 늦어 혼기를 놓친 나이지만, 평범한 사람 중에서는 20대 초반이 되도록 혼인을 안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까 스물다섯 정도는 괜찮았다. 혼기를 놓치기는 했으나 결혼 같은 건 진즉 포기했으니, 부끄러워할 것도 없었다.

“네, 스물다섯입니다.”

명료하게 대답한 리브가 일부러 더 당당하게 턱을 들었다. 후작은 그녀는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애군.”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애로 단정해 버리는 그의 모습에 리브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후작은 다시금 그녀에게서 관심을 끊은 상태였다.

와인을 못 마신다고 애 취급이라니.

미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굳어 있던 리브가 애써 표정을 풀었다. 그러곤 태연하게 와인을 홀짝였다.

몇 번을 마셔도 맛이 없기는 매한가지였으나, 최소한 절반이라도 비워야 성이 찰 듯싶었다. 게다가 술을 마시니 긴장감이 점점 풀려서 이 시간을 버티기에도 꽤 좋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다. 술이라고는 학창 시절에 친구들에게 휩쓸려서 마신 맥주 한두 잔이 전부였던 리브는 금방 취기가 올랐다.

그녀는 이제야 브레드가 그토록 술집에 열심히 가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렇게나 몸이 나른해지고 기분이 들뜨다니. 맛은 없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옷을 스스로 입을 정신머리 정도는 챙겨 두는 게 좋을 거야.”

불현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란 리브가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동그랗게 뜬 눈이 후작을 바라보았다.

“주정뱅이를….”

입가로 기울어져 있던 잔에서 와인이 살짝 넘쳤다.

붉은 액체는 리브의 턱을 따라 또르르 흘러내려 턱 끝에 맺혀 있다가 아래로 톡, 떨어졌다. 희게 부풀어 오른 가슴 둔덕으로 떨어진 와인 방울이 긴 흔적을 그리며 살갗을 간지럽혔다.

후작은 말을 하다 말고 그런 리브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정확하게는 와인 방울이 떨어진 자리를.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이 제 가슴이라는 걸 알아챈 리브가 어깨를 흠칫 움츠렸다. 술기운을 빌어 잠깐이나마 풀어졌던 긴장감은 아까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팽팽하게 조여졌다.

“…재울 방은 없으니.”

한층 낮게 잠긴 음성으로 말을 맺은 후작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후작은 그저 본인 입술에 묻은 와인의 잔재를 훑으려는 것일 텐데, 그의 시선이 가슴에 닿아 있으니 꼭 저 혀가 가슴을….

무방비하게 생각을 이어 가던 리브가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세상에, 리브 로이데스! 후작을 두고 도대체 무슨 망상을 하는 거야?

“주, 주정뱅이가 될 일은 없습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대꾸한 리브가 황급히 사이드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았다. 그런 뒤 손으로 와인 얼룩을 세게 문질렀다. 살갗이며 손이며 와인 때문에 끈적거렸으나 눈에 띄던 얼룩은 대충 옅어졌다. 동시에 후작의 시선도 떨어져 나갔다.

조금 전의 집요한 눈길이 전부 환상이었던 것처럼, 그는 무신경한 얼굴이었다.

그 뒤로는 별다른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단지 주변을 떠도는 와인 향이 머리를 어지럽혀서, 리브는 이성을 차리기 위해 남은 시간을 바짝 긴장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자꾸 뺨을 홧홧하게 만드는 이 열기는 전부 익숙하지 않은 와인 때문일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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