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8)화 (18/138)

“이곳에서 세워 주시면 됩니다.”

“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마부의 친절한 인사를 들으며, 리브가 조심스럽게 내려섰다.

조금 전까지 화려하고 거대한 저택에 있다가 돌아온 까닭에, 그녀는 잠시 마법에서 깨어난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검은 마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브가 겉옷을 여미며 걸음을 내디뎠다. 좁고 더러운 길목을 지나려니, 조금 전까지의 일이 정말 현실이기는 했나 의심스러웠다.

새하얀 방, 와인과 시가 냄새가 뒤섞인 공기, 날카롭고 집요한 시선….

모든 게 한여름 밤의 꿈처럼 머릿속을 떠돌았다. 코끝으로 지독한 하수구 냄새가 밀려올수록 그 기억은 더욱 몽환적인 가면을 뒤집어썼다. 말 그대로 비현실적인 감각이었다.

리브는 옷을 여민 손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그러자 품속 깊은 곳에 챙겨 둔 두꺼운 봉투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 꿈이 아니었어.

나체로 앉아 있기만 하던 몇 시간, 겨우 그것만으로 그녀는 상상도 못 했던 금액의 수고비를 받았다.

누가 알지도 못할 텐데, 리브는 행여 돈 봉투를 빼앗길까 봐 잔뜩 긴장한 채로 바쁘게 걸었다. 다행히 집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언니!”

문을 열자마자 리브를 반겨 준 건 화색 어린 얼굴의 코리다였다. 평소보다 많이 늦은 귀가에 초조했던 모양인지, 코리다는 문가 앞에 서 있었다.

“미안, 많이 늦었지? 저녁은 먹었어?”

“나야 먹었지…. 언니는?”

코리다의 물음을 듣고서야 리브는 자신이 아직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작과 함께 있는 동안은 긴장감으로 머릿속이 꽉 차서 식사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허기를 깨닫자 당장 몸이 반응했다.

꼬르륵.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소리가 리브의 대답을 대신했다. 코리다는 아무리 일이 많아도 그렇지, 어떻게 식사도 챙겨 주지 않고 일만 시키느냐며 볼멘소리를 뱉었다.

“빨리 처리하느라 식사를 미룬 것뿐이야.”

“펜던스 남작 부인의 인심이 그렇게 안 좋으신 줄 몰랐어.”

“코리다. 그런 말 하면 못써. 얼마나 고마운 분이신데.”

“앞으로 계속 이렇게 늦는 거야?”

툴툴거리는 코리다의 얼굴에 희미한 불안감이 스쳤다. 확실히 평소 해가 지기 전에 무조건 집에 돌아왔으니, 오늘처럼 늦도록 홀로 집을 지키는 일이 무서웠을 수는 있겠다.

리브는 미안하다는 얼굴로 코리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분간은 아마도.”

코리다에게는 미안했지만, 묵직한 돈 봉투의 무게감을 느끼자 빈말로라도 일찍 오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겨우 오늘 하루만으로도 그녀는 한 달 치 월세와 코리다의 약값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대로 한 달만 추가 근무를 하면 생활비며, 여윳돈까지 넉넉하게 모을 수 있을 것이다.

브레드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만 추가 근무를 한다고 해도 몇 개월은 걱정 없이 지낼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약 떨어지지 않게 언니가 잘 확인할 거야. 앞으로 포멜 아저씨가 와서 너를 귀찮게 하는 일이 없도록 월세도 미리 해결할 거고.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줘. 알았지?”

“…응.”

시무룩한 코리다를 꼭 끌어안아 준 리브가 늦은 저녁 식사나 할까 생각하며 식료품 저장고를 열었다. 정말 오랜만에 희미한 희망을 품게 된 기분이었다.

***

커피 하우스에 이렇게 부담 없이 앉아 있을 수 있다니.

리브는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내려다보며 격세지감을 느꼈다. 예전이라면 커피 하우스는 쳐다도 안 보고 지나쳤을 텐데. 겨우 몇 번의 추가 근무가 그녀의 마음을 이토록 여유롭게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분명 기쁠 일인데, 조금도 설레지 않는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기운이 없어 보이시네요.”

“네?”

“혹시 제가 오늘 무리한 청을 드렸나요?”

카밀의 말을 듣고서야 리브는 자신이 얼을 빼 놓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다급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의 무례를 사과했다.

카밀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손을 내저었는데, 그러면서도 눈빛에는 걱정이 묻어났다. 그만큼 리브의 안색이 나빠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따로 신경 쓰는 일이 있어서 잠깐 생각하느라. 별건 아니에요.”

정말 별건 아니었다. 최근 시작하게 된 추가 근무가 생각보다 더 큰 피로감을 주고 있다는 것 정도는.

그냥 브레드의 누드모델이 되어 줄 때처럼 옷을 벗고 몇 시간 앉아 있다가 나오는 게 전부인데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정신적으로 피로한지 모를 일이었다.

후작은 존재만으로도 그녀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고, 행여 대화라도 할 기회가 있으면 그녀의 자존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았다.

“모델이라면서, 할 줄 아는 게 가만히 앉아 있는 것뿐인가?”

“제가 춤이라도 추길 바라시나요?”

“선생이 펜던스 가문 외동딸에게 춤을 가르치는 줄은 몰랐는데.”

“…굳이 그곳 이야기를 꺼내실 필요는 없어요.”

“벌거벗었다고 한들 선생은 선생인데, 직업에 대한 자부심조차 없는 모양이지.”

당장 최근에 나누었던 그 짧은 대화만 떠올려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의 입술에서 ‘펜던스 남작가’의 이름이 나오다니. 그는 가정 교사로서의 리브는 조금도 존중해 주지 않을뿐더러, 어쩌면 비웃고 싶은 게 틀림없었다.

그나마 아돌프가 챙겨 주는 봉투의 묵직함이 아니었다면 진즉 도망쳤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정신적 피로감 같은 이유로 포기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지.

리브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카밀을 마주 보았다.

“이래서야 제가 괜히 고민 상담을 청한 것 같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밀리언과 연관된 이야기라고 하셨잖아요. 그렇다면 저도 알아야죠.”

이렇게 피로한 와중에 그녀가 카밀과 마주 앉은 건 밀리언 때문이다. 그가 밀리언에 관해 상담할 내용이 있다며, 아주 진지하고 긴 서신을 보내온 까닭에 말이다.

어지간해서는 그와 만날 생각이 없었던 리브가 단박에 마음을 돌릴 정도로 그의 필력은 유려했다.

“전 밀리언이 아파서 당분간 수업을 할 수 없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어요. 밀리언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그러고 보니 수업을 쉰 지가 제법 오래되었는데, 여태 다시 시작하자는 연락이 없었다. 리브의 물음에 카밀이 미간을 찡그리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마도요. 저도 하루 수업하고 다음 날 쉬겠다는 연락을 받기는 했는데…. 연락을 받고 생각해 보니 수업 때 본 밀리언의 모습이 좀 심상치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애초에 밀리언은 무척 건강한 편이라, 남들 다 감기에 걸리는 시기에도 홀로 건강하게 뛰어다니던 아이였다.

종종 그 모습을 보며 리브는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저 체력의 절반만 코리다가 따라갈 수 있다면 참 좋을 거라고, 그런 생각을 수십 번 했었다.

그래서 밀리언이 아프다는 연락에 놀랐던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금방 털고 일어날 수준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심상치 않았다고요?”

“네. 아시겠지만, 밀리언은 쾌활하고 명랑한 아가씨죠. 그런데 마지막 수업 때는 무척 우울해 보였거든요. 아프기보다는 고민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물어도 딱히 말을 하진 않더군요.”

그 말을 듣자 단박에 떠오른 건 밀리언의 생일 파티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디트리언 후작의 등장.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던 밀리언과 그런 그녀를 묘하게 바라보던 또래 영애들.

리브는 그 나이대의 어린 영애들이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가지는지 잘 알았다. 또한 그 감정을 얼마나 가감 없이 표출하는지도. 귀족 사회에서 돈이 많고 작위가 낮다는 게 사람에 따라 얼마나 달리 해석될 수 있는지도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생각을 곧장 지웠다. 섣부르게 추측할 일이 아니었다.

“아프다는 소식을 받고, 혹시 제 수업에 문제가 있어서 해고당한 건가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모든 수업을 중단했다는 소식을 들은 겁니다. 밀리언과 가장 친한 선생님이셨으니 무언가 사정을 아실까 싶어서 연락드렸고요. 속물적으로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수업을 오래 쉬면 생활에 지장이 생길 테니 그 부분도 신경 쓰이고.”

진지한 카밀의 말에 리브가 낮게 탄식했다. 혹시 밀리언을 핑계로 만남에 다른 의도를 담은 건 아닐까 내심 의심했던 것이 미안해지면서, 좀 더 진지하게 대화에 임하게 되었다.

솔직히 리브는 자신이 밀리언과 가장 친한 선생님이라는 걸 선뜻 체감하지는 못했다. 코리다와 비슷한 나이대의 밀리언에게 내적인 친근감을 느끼고 있다고는 하지만 입주 가정 교사도 아닌 데다 정해진 날짜에만 방문해서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은 다른 교사들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밀리언이 자신을 편하게 대한다는 건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다. 가장 나이대가 가깝고, 수업을 제외한 일에서는 무던하게 넘기는 리브의 태도를 밀리언이 꽤 친근하게 받아들이는 까닭이었다.

무언가 문제가 생기면 넌지시 상담을 해 올 정도의 관계라고는 할 수 있었다.

“글쎄요, 저는 딱히… 들은 말이 없어요. 실은 생일 파티 이후 밀리언을 만나지 못했거든요.”

“그러신가요.”

“아마 마르셀 선생님의 수업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 거예요. 그랬다면 펜던스 남작 부인께서 바로 언질 주셨을 테니까요.”

카밀은 석연찮은 표정이었으나,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로이데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좀 진정되네요.”

“특별히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는 못 드린걸요.”

“그렇지 않습….”

“리브?”

적당히 지지부진하고 격식 차리는 대화 사이로 요란스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든 리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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