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옷을 벗고 있는 것뿐인걸.
영문은 모르겠으나 후작은 그녀의 몸이 마음에 든 게 틀림없었다. 누드화를 구매했고, 작업 과정을 참관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직접 눈앞에 두고 보겠다고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이 일은 그저 그림 작업 시간이 조금 더 연장되는 것에 불과했다. 브레드 없이 후작과 단둘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 조금 우려스럽긴 하지만.
“로이데스 양이 주의하실 부분은 단 하나입니다. 비밀 엄수요.”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비밀 엄수는 후작님께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항목이죠?”
“그렇습니다.”
사내에게 나체를 보이고 시간당 돈을 받기로 했다는 걸 어디에서 말할 수 있겠는가. 아마 후작도 본인의 이런 기괴한 취미를 바깥에 떠들고 다닐 생각이 없는 모양이니, 리브에게는 다행이었다. 그러나 리브는 쉬이 서명을 할 수 없었다.
제 손으로 끝낼 수 없는 계약을 체결하려니, 걱정이 끊이지 않는 까닭이었다.
“…만약 이 계약서에 적히지 않은 내용을 요구하신다면요?”
“예를 들어서 어떤?”
민망한 마음에 괜히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던 리브가 꾸역꾸역 목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부도덕하고 음탕한….”
“허!”
그것은 노골적인 헛웃음이었다. 놀란 리브가 눈을 들자, 아돌프가 재빨리 입가를 가리며 변명했다.
“아니, 로이데스 양을 비웃은 게 아닙니다. 절대 모욕하려는 의도도 아니었고요. 다만 후작님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들으면 누구라도 저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겁니다.”
아돌프가 침착하게 설명했으나, 이미 리브는 민망함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상태였다.
“아, 네. 그렇죠. 후작님께서 상대하시기에 제 수준이 너무, 그렇죠. 허황한 생각이었네요.”
“제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똑똑.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문가로 향했다. 어차피 이곳을 찾아올 사람이라면 후작이 보낸 하인일 게 분명해서, 아돌프는 리브에게 양해를 구한 후 상대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과연 들어온 하인은 후작의 전언을 가지고 온 상태였다.
“오늘 바로 시작하라고요?”
“네.”
얼떨떨한 눈으로 하인을 보던 리브가 마른침을 삼켰다. 펜을 든 그녀는 마침내 공백에 자신의 서명을 넣었다. 그리고 잉크가 마르는 걸 보기도 전, 하인의 재촉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 저택에 온 이래, 이렇게 다양한 방을 방문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늘 현관에서 작업실까지만 오갔던 그녀는 오늘 응접실과 사무실도 모자라, 가장 위층까지 올라서게 되었다. 하인은 층에 오르는 걸 허락받지 못했다며, 계단까지만 그녀를 안내했다.
“안쪽에 있는 방입니다.”
최고층에 홀로 덩그러니 올라오게 된 리브는 저를 두고 휑하니 돌아서는 하인을 막막하게 보다가, 심호흡하며 몸을 돌렸다. 다른 층이었다면 벌써 몇 개의 방문이 보였을 텐데, 당장 보이는 건 길게 뻗은 복도뿐이었다. 리브는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걸었다.
하얀 벽에는 그 흔한 태피스트리 하나 없었다. 그나마 복도에 깔린 카펫이 아니었으면 온통 희게 칠해져 있었을 것 같았다. 강박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하얗기만 한 복도를 걷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해서, 리브는 슬며시 팔을 쓸어내렸다.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져 있던 복도 끝에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문 앞에 멈춰 선 리브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으로 가슴께를 꾹 눌렀다. 그 순간.
“들어와.”
노크를 하지도 않았는데 안쪽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흠칫 놀란 리브가 주저하다가 손잡이를 잡았다. 묵직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복도와 마찬가지로 하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몇 가지 고급스러운 가구가 놓여 있기는 하나, 일반적인 개인실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현저히 부족해 보이는 방이었다.
후작은 방 한쪽에 놓인 1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턱을 괴고 앉은 그는 겉보기에도 짜증이 가득했는데, 리브가 들어선 것을 보자마자 손가락을 까닥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하얀 이불로 둘러싸인 침대가 놓여 있었다.
“벗어.”
짧지만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말을 뱉은 후작이 거칠게 와인 뚜껑을 열었다. 와인 향기를 맡으니 비로소 그림 작업의 연장 선상에 놓인 추가 근무라는 게 실감 났다.
그래, 단지 추가 근무일 뿐이었다. 시급이 아주 높은, 상류층 인사의 기이한 취미 생활에 박자를 맞추는 정도의.
침착하게 옷을 벗는 동안 후작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손수 채운 와인 잔을 한 손에 든 그는 리브의 벗은 몸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그는 옷을 벗은 리브가 엉거주춤 서 있다가 조심스럽게 침대에 걸터앉는 것을 보고서야 뜻 모를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거두었다.
한결 진정된 안색으로 와인을 홀짝이는 후작을 곁눈질하던 리브가 결국 침묵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술을 뗐다.
“저는 그냥 이대로 있으면 되나요?”
별로 크지도 않은 목소리였는데, 워낙 방이 조용해서 질문이 생각보다 크게 울려 퍼졌다. 와인을 음미하며 느슨하게 앉아 있던 후작이 리브를 힐끗 보았다. 그 시선에 담긴 의문을 눈치챈 리브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냥 이렇게 옷을 벗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되는 건지….”
“계약서를 읽지도 않고 서명했나? 아니면, 내 보좌관이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서명을 강제했다거나?”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뱉는 말이니, 실상 비꼬는 것이나 다름없는 물음이었다. 본래 다정하거나 따뜻한 구석이 없는 남자이기는 했지만 저렇게나 가감 없이 굴다니.
리브는 조금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추고자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돌프 씨는 제가 나체로 후작님과 한방에서 시간을 보내면 된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제대로 들었군. 그런데?”
“혹시 무언가… 다른 원하시는 게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선생에게?”
후작은 리브에게 보이던 최소한의 격식마저 차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계약이 체결된 순간부터, 그는 그럴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 게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노골적으로 그녀를 비웃을 수 있을까.
“선생은 조금 다른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지.”
리브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서렸다. 그가 그녀를, 제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안달 내는 뭇 여성들과 똑같이 평가했다는 걸 알아챈 탓이었다.
리브는 자신이 그 여자들과 다르다는 걸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었다. 그녀는 후작의 사랑이나 후작의 돈, 혹은 지위 등을 탐내어 어떻게든 해 보려 노력할 마음이 티끌도 없었다.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을뿐더러, 과한 욕심을 부리면 탈이 난다는 걸 모르는 바보도 아니었다.
애초에 돈이 필요하지 않았으면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텐데!
“그런 게 아니라, 이런 상황이 일반적인 건 아니니까요.”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한 리브가 애써 치미는 울분을 억눌렀다. 저를 업신여기는 후작의 시선을 마주하니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조금 전 사인한 계약서에 적힌 그 빌어먹을 숫자들이 눈에 밟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선생 말대로 나는 ‘일반적이지 않은 취향’이 있어서, 굳이 돈을 주고 선생을 앉혀 둔 거야.”
차갑게 대꾸한 후작이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둥글게 흔들며 조소를 흘렸다.
“그러니 거기 앉아서 얌전히 화초가 되어 주겠나?”
“화초라니….”
어쩜 사람을 앉혀 두고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리브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후작이 심드렁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조각상 같은 것으로 칭해 주기에는, 솔직히 아직 그만한 값을 매기기 힘들어서.”
리브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뭐라고요?”
“나는 시끄러운 것을 들이려던 게 아닌데 말이야. 말을 할 줄 아는 화초도 있나?”
후작은 닥치라는 말을 참 고상하게도 돌려 말했다. 이를 악문 리브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휙 돌렸다.
어쩌면 후작은 감상한 몸이 필요했던 게 아니라, 편하게 모욕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차 한잔 대접받지 못할 때부터 그가 저를 대우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아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씨근대던 리브는 아예 후작을 등지고 앉았다. 그녀에게 따로 포즈를 요구한 것도 아니니, 그냥 될 대로 앉아 있을 작정이었다. 그것까지 나무랄 생각은 없었는지, 후작은 다시 와인을 홀짝이며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때때로 등 뒤에서는 시가 냄새가 섞이기도 했다.
그가 말을 걸지 않자, 리브도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그녀는 무심코 제 벗은 몸을 내려다보았다. 봉긋하게 부푼 가슴과 납작한 뱃살은 그녀가 보기에도 제법 나쁘지 않았다.
행여 흉터라도 있었으면 이런 방법으로 돈을 벌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테니, 그나마 타고난 몸에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 가정 교사랍시고 고상 떨다가 작업실에 들어가면 옷을 벗어 던지는 제 모습이 후작에게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그가 저를 이런 취급하는 건, 결국 제가 자초한 일이었다.
울적한 감정이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어서, 리브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이곳이 작업실이고, 제 뒤에 브레드가 있다고 상상했다. 그리고 이 모든 시간이 지난 뒤 그녀가 받을 꽤 많은 양의 급여를 곱씹었다.
그러고서야 조금이나마 견딜 기운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