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6)화 (16/138)

“이건 전에 빌려주셨던 손수건입니다.”

곱게 접힌 손수건에서는 그가 건넸을 때와는 다른 향이 났다. 돌아온 손수건에서 나는 낯선 비누 냄새가 유독 진하게 느껴졌다.

눈만 굴려서 힐끗, 손수건을 확인한 디무스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제안해 주신 추가 근무는, 우선 내용을 듣고 싶습니다만.”

“확실하게 하겠다고 장담하지 않으면 알려 줄 수 없는데.”

“하지만….”

“굳이 연관되지도 않은 입을 늘리고 싶진 않아서.”

계약을 해야만 내용을 알려 준다는 건 그만큼 떳떳하지 못하다는 의미였다. 단박에 그 의미를 알아들은 리브가 굳은 얼굴로 침묵했다.

디무스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느긋하게 감상하며 긴 다리를 꼬아 앉았다. 본래 그는 시간을 허비하는 걸 무척 싫어했으나, 리브에게는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아니, 돌이켜 보면 근래 리브에게 보인 태도가 전부 예외적이었다. 그녀에게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나.

디무스는 시가를 꺼내 들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치라…. 사실 아직 그런 걸 찾아낸 건 아니었다. 지금으로서는 흥미 이상의 가치는 전혀 없다고 보아야 했다.

처음에는 그림 한 점이었다. 그것도 아주 형편없는 수준의 그림.

디무스의 눈을 사로잡은 건 화가의 거친 붓질이나 촌스러운 색감 따위가 아니었다. 그 속에 어설프게 서 있는 여성 그 자체였다.

어정쩡한 자세에서는 미처 떨쳐 버리지 못한 수치심이 묻어났고, 좋은 골격을 타고난 몸뚱이는 비루먹은 말처럼 앙상했다. 헐벗은 뒷모습의 나체는 온몸으로 저가 처한 절망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 디무스가 브레드의 그림을 산 이유는, 그가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림에 화가의 의도가 묻어나기는커녕, 모델의 존재감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퍽 신선한 체험이었다. 수많은 누드 작품을 보고 수집해 온 디무스의 눈에 이렇게나 형편없는 그림은 정말 처음이었다. 화가는 제 작품을 그리기보다는 그저 눈앞의 모델을 캔버스에 옮겨 두는 정도만 겨우 해냈다. 혹은 모델이 뿜어내는 강렬한 분위기가 화가의 무의식을 점령해서 그렇게 그리도록 조종했을지도 모르고.

이 화가는 결코 제대로 된 데뷔를 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한 실력이 없는 자였다. 물론 모델이라고 훌륭했다는 게 아니다.

모델은, 모델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수고로울 정도로 최악이었다. 이렇게 엉망진창의 둘이 만나서 탄생한 게 바로 눈앞의 그림인 것이다.

마치 진흙탕을 구른 것처럼 형편없는 그 그림이 재미있었다.

운 좋게 얻어걸린 건 아닐까.

그런 생각에 디무스는 브레드의 두 번째 누드화를 콕 찍어서 구매했다. 첫 번째 누드화와 마찬가지로 뒷모습이었고, 자세도 여전히 뻣뻣했다.

나무토막을 가져다 놓아도 이보다는 자연스러울 것이다. 당장 저택 복도에서 일하는 하녀 중 아무나 벗겨 세워도 저것보다는 나은 꼴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디무스는 그림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세 번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궁금해졌다. 어째서 뒷모습뿐이지?

저런 뒷모습을 가진 여자는 어떤 표정으로 있을까?

그래서 넌지시 말을 흘렸을 뿐이었다. 재주껏 얼굴을 그려 내오라고. 하지만 설마 옆얼굴이 조금 그려졌다고 그리 놀라서 질색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는 제 얼굴이 그려진 그림만 어떻게든 회수하면 모든 위험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눈치였지만, 글쎄.

정말 제 뜻대로 모든 걸 깔끔히 마무리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다면, 그녀는 너무 순진하다 못해 멍청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겠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디무스의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습관처럼 시가를 문 그가 무심하게 앞에 앉은 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추가 근무 하겠습니다.”

그녀는 전장에 나서는 병사처럼 비장했다. 도대체 그가 무얼 시킬 거라고 예상했는지, 안색이 무척 파리했다. 디무스는 바짝 경직된 리브의 어깨를 냉담하게 비웃었다.

그녀는 아마 저 자신이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가치 있는 것이라 봐야, 디무스에게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같은 수준일 텐데.

“선생에게 어려운 일은 아닐 테니 그렇게 겁에 질릴 건 없어.”

리브가 떨리는 시선을 들었다. 그녀가 무언가 입을 열려는 찰나, 하인이 이동식 트롤리를 끌고 나타났다.

훈련받은 하인은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차를 세팅했다. 테이블에 준비된 찻잔은 한 사람의 몫뿐이었다.

제 몫이 없음을 눈치챈 리브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어쩌면 모멸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디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가면 하인이 선생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에게 안내받아. 그를 따라가서 설명을 듣고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치마를 움켜쥔 채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리브가 침착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선생.”

뿌연 시가 연기 너머로 리브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한 뒤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 다과 준비를 마친 하인이 뒤늦게 테이블 위에 놓인 손수건을 발견했다.

“이건 세탁실로 보내겠습니다.”

무심하게 연기를 내뿜으며 닫힌 응접실 문을 바라보던 디무스가 고개를 돌렸다.

세탁이라니, 그런 건 처음부터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무신경하게 명령했다.

“버려.”

고개를 조아린 하인이 손수건을 챙겨 나갔다. 싸구려 비누 냄새가 손수건이 있던 자리에 남아 있다가 점점 흩어졌다.

조용해진 응접실에는 시가 연기만 뿌옇게 피어올랐다. 소파에 느슨히 앉아 시가를 피우던 디무스가 찻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말고 멈칫했다.

흰 장갑을 낀 자신의 긴 손가락을 본 그가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검지와 엄지를 문지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마시지도 않은 차를 그대로 놔둔 채 몸을 일으킨 디무스가 성큼성큼 응접실을 나섰다.

“선생은?”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끝나면 데려와.”

속이 매스껍다. 안타깝게도 외떨어진 장소에 급하게 마련한 이 저택에는 지금 당장 디무스의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 줄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일은 오늘부터 하라고 해.”

어디 그 형편없는 모델의 효과를 확인해 볼까.

***

후작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후작의 보좌관이라는 남자가 내놓은 계약서에 적힌 모든 내용은 후작이 말한 대로였다. 장담했던 대로 시급을 아주 높게 쳐주었고, 겁먹을 정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아돌프 씨라고 했죠. 정말 이것만 하면… 이만한 돈을 주신다고요?”

후작이 리브에게 요구한 추가 근무는 아주 쉬웠다. 그냥, 나체 상태로 그와 좀 더 시간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달리 무언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같은 방에 있으라고. 상해를 가하지도 않을 것이고, 목숨이 위태로운 일을 시키지도 않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물론입니다, 로이데스 선생님.”

리브의 뺨이 붉어졌다. 반듯한 얼굴에서 흘러나온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부끄러움을 느낀 까닭이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러 온 게 아니기 때문일까, 아니면 가정 교사를 하면서 몰래 이런 뒷일을 하고 다닌다는 지적을 받은 기분이라서일까.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요.”

“아,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후작님께서 그렇게 부르시기에.”

“…저에 관해 잘 아시나요?”

“제게 여쭤보시는 겁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선생… 아니. 로이데스 양에 관해 지시받은 내용만 알고 있습니다.”

무척 모호한 말이었다. 리브는 나름대로 추측해 보려 노력했으나, 마땅히 짐작 가는 내용이 없었다.

애초에 그에게 그녀를 조사하라던가, 어떤 개별적인 지시를 내릴 정도의 관심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그저 이 이상한… 추가 업무를 시킬 만한 대상 정도로 여기겠지.

리브의 시선이 계약서로 향했다. 몇 번을 다시 읽어 보아도 내용이 바뀔 일은 없었다.

“아래에 서명하시면 계약이 체결됩니다. 급여는 당일 현금으로 지급해 드릴 예정인데, 혹시 따로 원하는 방법이 있으시다면….”

“저도 현금이 좋아요. 그런데 계약 기간은 적혀 있지 않네요.”

“아, 그 부분은.”

아돌프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후작님께서 필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실 때까지입니다.”

“…저에게 선택권이 전혀 없는 건가요?”

“선택권이 필요하십니까?”

달리 말하자면, 선택할 주제가 되느냐는 물음이기도 했다. 잠시나마 혈색이 돌았던 리브의 안색이 도로 창백해지는 것을 확인한 아돌프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제가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이 계약서는 지금 로이데스 양에게 충분히 좋다고 여겨집니다. 별다른 문제가 없는 한 후작님께서는 계약을 이어 가실 테고, 로이데스 양은 안정적인 부수입을 손쉽게 올리시는 겁니다. 걱정하는 게 후작님의 변심이라고 하신다면 그 부분 또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 하루를 일해도 저희는 로이데스 양의 노고를 생각해 충분한 위로금을 챙겨 드릴 테니까요.”

하루를 일해도 위로금을 주겠다는 직장은 어딜 찾아봐도 없을 것이다. 잠깐이나마 흔들렸던 리브의 마음이 돈을 생각하자 다시금 굳건해졌다.

지금 그녀가 어디 물불을 가릴 처지인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았다. 리브는 코리다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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