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5)화 (15/138)

“후작님께 드릴 그림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브레드에게 다른 작업을 전부 중단하라고 하셨다고 들었는데….”

브레드에게 넌지시 다른 작업을 병행하자고 제안했을 때 들었던 말이었다.

브레드는 난처하다는 얼굴로 리브를 보며, 그가 작성한 계약서에는 작업이 끝날 때까지 다른 그림을 그리지 않기로 한 조항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후작의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는 그녀 역시 누드모델로서 부수입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건 리브에게 꽤 난처한 문제였다. 이미 펜던스 남작가의 가정 교사로 지내는 시간을 빼고, 후작에게 줄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빼고 나면 쉬는 날이 며칠 없었다. 일주일에 단 며칠만 일하겠다는 일꾼을 고용할 곳은 많지 않았고 말이다.

등을 돌려 그대로 떠날 줄 알았던 후작이 리브를 돌아보았다. 리브가 몇 번이나 보아 온, 차갑고 냉담한 얼굴이었다.

절박하게 말을 뱉었던 리브는 후작의 얼굴을 보자마자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확 들었다. 수치심으로 인해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리브가 횡설수설 말했다.

“죄송합니다. 조금 전 말은 실언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냥 브레드가 빨리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작업 시간을 좀 더 넉넉하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리브는 차마 후작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더 수그렸다.

자신이 잠시 미쳤던 게 분명하다. 너무 힘들어서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도 망각하고 헛소리를 뱉고 말았다.

밀려드는 수치심과 더불어 불안감이 온몸을 잠식했다.

제 겁 없는 말이 후작의 심기를 어지럽혔으면 어쩌지?

브레드의 작업 시간이 더 길어지면 어쩌지?

초조하게 눈을 굴리던 리브의 시선에 곱게 접힌 손수건이 들어왔다. 아마도 후작의 것으로 추정되는. 혹시 모른다. 우는 여인에게 손수건을 빌려줄 정도의 심성을 가진 사내라면….

절박한 희망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저 남자는 정말로, 측은한 마음으로 아무 사심 없이 말했을지도 몰라.

“선생, 추가 근무 해 보겠나?”

리브가 멍한 얼굴로 후작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고, 오만한 눈빛을 한 채였다.

“급여는 후하게 쳐주지.”

추가 근무란, 아마도 그림 작업 이후에 일을 더 해 볼 생각이 있느냐는 물음일 것이다. 리브는 갑작스러운 후작의 제안에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놀란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후작은 대수롭지 않게 다시 몸을 돌렸다.

“그 손수건은 대답과 함께 돌려받겠네.”

뚜벅뚜벅, 정갈한 발소리가 예배당을 울렸다. 앉은 상태로 멀어지는 후작의 뒷모습을 멍하게 응시하던 리브가 제 얼굴을 더듬었다.

뺨의 눈물은 거의 다 마른 뒤였다.

***

손수건은 낡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사용은 하지 않았다. 차라리 낡은 소매를 흠뻑 적실지언정, 저 값비싸 보이는 손수건을 사용할 엄두 같은 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용하지 않았다고 그대로 가져다주는 건 또 도리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리브는 이걸 세탁해야 할지 고민했다. 괜히 싸구려 비누로 세탁했다가 천이 상하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귀족가에 납품되는 용품들은 사소한 비누라고 해도 그들이 사용하는 것과 품질이 비교되지 않았다. 괜히 세탁해서 돌려준다는 게 더 큰 실례가 되진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언니, 대체 이 손수건은 누가 주신 건데?”

코리다는 내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지치지도 않은 채 같은 질문을 해 댔다. 어떻게든 저 손수건의 주인을 알아내겠다는 강력하고 굳건한 의지가 느껴졌다.

리브는 그런 코리다를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말했잖아. 주신 게 아니라 빌려주신 거야. 돌려드릴 예정이고.”

“그럼 누가 빌려주셨는데?”

“마음씨 좋은 분이.”

말을 하면서도 리브는 조금 우스웠다. 마음씨 좋은 분이라니, 디무스 디트리언이 정말 마음씨 좋은 분일까?

“어느 마음씨 좋은 신사분이 우리 언니에게 손수건을 주셨을까?”

손수건의 주인이 신사라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 코리다는 이미 모든 걸 다 안다는 얼굴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리브가 그런 코리다를 향해 엄한 표정을 지었다.

“코리다.”

그나마 손수건에 가문과 연관된 문양이나 글자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하기야, 이름이라도 수놓인 손수건이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빌려주지도 않았겠지. 괜히 그런 짓을 했다간 저속한 스캔들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

다만 손수건의 질이 너무 좋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코리다야 잘 모르니 그냥 누군가 손수건을 빌려주었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있지만, 안목 있는 사람이 보면 손수건의 주인이 귀족이라는 것 정도는 쉬이 유추할 것이다.

최대한 빨리 되돌려주어야지.

“언니, 언니. 만나는 사람이 생기면 꼭 말해 줘야 해?”

“그럴 일은 없어, 코리다.”

“언니는 예쁘고 똑똑하고 멋지니까, 분명 주변에서 짝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많을 거야!”

눈을 빛내는 코리다의 모습에 리브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렇게 기운찬 걸 보니 약이 잘 든 모양이네. 참 다행이다.”

“괜히 나 생각한다고 다 거절하지 말고, 응?”

걱정스러운 코리다의 말에 리브가 멈칫했다.

코리다의 걱정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리브에게 은근한 관심을 보이다가도 아픈 여동생이 딸려 있는 것을 알고선 난색을 보였던 남자들을 몇 번이나 만나 본 까닭이다.

그런 사연을 코리다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눈치 빠른 그녀의 여동생은 사정을 금방 알아채고 침울해했다. 약방 주인에게 더는 주선하지 말라며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남자를 소개받지 않은 지 꽤 되었는데, 코리다는 그때의 일을 늘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오히려 더는 소개 받지 않는 걸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리브가 아무리 ‘내 나이는 이미 혼기가 지났다’고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나는 괜찮으니까….”

“너 때문이 아니라 내가 관심 없어. 그러니까 우리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두자.”

아무래도 이 손수건이 코리다의 상상력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늘 집에만 있는 아이라 이렇게라도 즐거울 수 있다면 다행이라 해야겠지만, 하필 화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브는 짐짓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괜히 손수건 하나에 전전긍긍한 모습을 보여 주는 바람에 코리다가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일단 세탁을 해야지. 후작도 제 처지를 모르지 않을 텐데, 싸구려 비누를 사용했다고 새삼 놀라거나 기분 상해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후작의 그 ‘추가 근무’ 제안은….

“그리고, 코리다. 일전에 내가 말했던 부업 말이야. 일이 늘어서 귀가가 좀 더 늦어질 것 같아.”

“그래? 언니가 일을 잘하나 봐!”

“응, 그러게.”

애초에 리브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무슨 업무인지 내용조차 듣지 못했음에도, 처음부터 답이 정해져 있는 제안이었다.

리브는 손수건을 꽉 움켜쥐며 세탁실을 향해 몸을 돌렸다.

***

화가의 작업은 오늘도 길지 않았다.

작업에 집중할 법하면 방해를 하는 타인의 소음이 이젠 익숙해졌는지, 화가는 체념한 얼굴로 화구를 정리했다. 그나마 오늘은 손을 바쁘게 놀려서 본격적인 채색에 돌입한 상태였다.

디무스는 캔버스를 힐끗 보았다가, 조금 더 떨어져 있는 곳에서 조용히 옷을 걸치는 여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능숙하고 빠르게 옷을 걸치는 손길을 따라 흰 살결이 자취를 감추었다. 디무스는 혀로 가볍게 제 입술을 축인 뒤 말문을 열었다.

“모델과는 잠깐 할 이야기가 있으니, 먼저 마차를 타고 가도록.”

“네? 리, 리브와요?”

화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디무스를 보았다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알았다며 몇 번이나 대답한 그가 빠르게 짐을 챙겨 작업실을 나섰다.

부모를 떠나보내는 어린애의 얼굴을 한 채 화가의 등을 바라보던 리브가 마른침을 삼켰다. 잔뜩 긴장한 얼굴은 창백했다.

디무스는 굳이 그녀에게 무어라 말을 하는 대신, 성큼성큼 작업실을 나섰다. 진한 물감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매스꺼운 탓이었다. 일부러 환기를 꼬박꼬박하고, 청소도 수시로 했지만 소용없었다. 작업실의 물감 냄새는 점점 더 짙어졌고, 디무스가 인내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아졌다.

참으로 수고롭다.

디무스는 문득 이 모든 수고가 지겹고 귀찮아졌다. 그러나 그의 짜증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듣자 조금 잦아들었다. 그래도 저 몸뚱이는, 그래.

꽤 마음에 들어서.

디무스가 굳이 언질하지 않았음에도 리브는 조용히 그를 따라왔다. 디무스는 여자의 저 빠른 눈치가 마음에 들었다. 또한 움직일 때마다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옅다는 점도 제법 나쁘지 않았다.

리브는 여느 사람들이 그러하듯 디무스의 눈에 한 번이라도 들어 보려 안간힘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어떻게든 디무스의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노력과 별개로, 그녀는 제법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차를 준비해.”

응접실에 들어서며 하인에게 명령을 내린 그가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응접실까지 따라 들어온 리브는 잠시 주춤거리다가, 이내 반듯한 자세로 디무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 방탕하게 흐트러져 있던 적갈색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하나로 묶여 있었고, 목 끝까지 꼼꼼하게 단추를 채운 옷도 단정하기 그지없었다. 그야말로 훌륭한 선생의 모습이었다. 놀랍게도 말이다.

단 몇 분 사이에 극명하게 달라진 리브의 모습이 디무스는 조금 흥미로웠다. 그가 그녀를 처음 발견했을 때는, 이렇게나 흥미로운 존재일 줄 몰랐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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