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4)화 (14/138)

마음이 설렌 것은 잠시였다. 중요한 건 약값이었다. 신약이라면 값이 얼마나 비쌀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리브는 귀족가에서 일하니까, 잘하면 연줄을 이용해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리브가 어색하게 웃었다. 약방 주인은 그녀가 수줍어한다고 이해한 듯했다.

종종 직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화제를 돌리고는 했는데, 눈치 없는 약방 주인은 저렇게 잊지 않고 또 말을 꺼냈다. 아마 그 딴에는 리브를 추켜세워 주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리브는 거북하기만 했지만.

“리브, 네가 일하는 곳이 펜던스 남작가 아니었나?”

“맞아요.”

“그래! 벌써 소문이 다 났어! 그 펜던스 남작가가 디트리언 후작님이랑 엄청 친하다며? 본 적 있어? 정말 자주 드나들 정도로 친하대?”

밀리언의 생일 파티가 불과 얼마 전이었는데, 벌써 온 도시에 소문이 난 걸까. 후작의 인기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리브는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수업만 하고 바로 나와서요. 잘 모르겠어요.”

리브의 천연덕스러운 연기가 제법 그럴듯했는지, 약방 주인은 의심 없이 탄식했다.

“허, 아쉽네. 나는 그 후작님이 무슨 유령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살아 있는 인간이긴 했나 봐. 펜던스 남작가의 하인 놈들이 어찌나 입방정을 떨어 대는지! 그래 봐야 후작님 뒷모습이나 멀찍이서 본 게 전부일 녀석들이.”

“그렇군요. 여기, 약값이요.”

리브가 이만 화제를 끝내고 싶어서 슬그머니 값을 지불했으나, 약방 주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다스럽게 말을 이었다.

“리브, 너도 시간을 잘 맞춰서 방문하면 멀리서나마 후작님을 볼 수 있을지 몰라. 가르치고 있는 학생한테 슬쩍 물어봐 봐.”

“제가 후작님을 봐서 뭐 해요.”

“뭐 하긴! 후작가에서 일하는 참한 사내놈 하나 꾀어내는 거지! 후작가 소속이면 봉급도 제법 높을 거 아니야! 후작님처럼 높으신 분들은 수행인을 수십 명씩 끌고 다닌다는데, 그중에 괜찮은 놈 하나 없겠어?”

오늘은 좀 그냥 넘어가나 싶었는데.

리브의 표정이 씁쓸하게 변했다. 약방 주인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리브에게 이런 권유를 해 왔다. 어느 집 아들이 좋다더라, 어느 직업을 가진 사내가 안정적이라더라 하는 그런 이야기들.

아픈 여동생을 홀로 간병하며 생계를 책임지는 리브가 안타까워서 하는 소리였다. 약방 주인은 결혼이야말로 리브가 지금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말만 하는 게 아니라, 그는 리브에게 실제로 남자를 소개해 준 적도 있었다. 그 나름대로는 심혈을 기울여 고른 신랑감이었다.

결과는 매번 좋지 않았다. 거절하기도 어려워서 두어 번 그의 주선을 받았던 리브는 이후 이러지 않으셔도 된다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저런 말들로 걱정 아닌 걱정을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됐어요.”

“리브, 언제까지고 너 혼자 코리다를 돌볼 수 없어. 세상이 얼마나 험한 줄 알아? 더 늦기 전에 너도 좋은 놈 만나야지. 나이가 많아도, 얼굴이 예쁘니 잘 고르면 넘어올 놈이 있을 거야. 내가 다 너와 코리다를 딸처럼 생각하니까 이런 이야기도 해 주는 거라니까?”

“생각 없어요. 약은 다 챙겨 주신 거죠? 저 이만 가 볼게요. 다음에 봬요.”

리브는 빠르게 인사를 한 뒤 약을 챙겨 나왔다. 등 뒤로 “흘려듣지 말고!”라고 외치는 약방 주인의 목소리가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리브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곧장 집으로 가려던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좁고 더러운 골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머리로는 어서 이 약을 코리다에게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디에라도 들러서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이 갑갑한 돌덩이를 없애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다.

정처 없이 걸어서 도착한 곳은 그녀가 자주 찾는 예배당이었다.

기껏 걸어서 온 곳이 겨우 이곳이라는 사실에 리브는 잠시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달리 갈 곳은 없었다.

어쩐지 기운이 쭉 빠져서, 그녀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휘적휘적 예배당 안으로 들어섰다. 예배당 앞마당에서 누군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 같기도 한데, 지쳐서 인사를 받을 여유도 없었다.

예배당 끝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리브는 정면의 신상은커녕, 주변에 누가 있는지조차 제대로 보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무릎 위에 약 봉투를 올려 두고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약.

매번 이 적은 양의 약을 얻기 위해 돈을 쏟아부어야 했다. 결국 아끼고 아꼈던 생활비도 이 약을 사면서 전부 써 버렸다. 겨우 한 줌이나 될까 싶은 이 적은 약 때문에.

손끝으로 봉투를 쓸어내리던 리브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실 그녀는, 신을 믿지 않았다.

신께 간절히 기도하면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조금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은 단 한 번도 그녀의 기도를 들어준 적이 없으니까.

“…….”

투둑.

약 봉투 위로 동그란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어금니를 꾹 깨물고 턱에 힘을 주어도 한번 터진 눈물을 참는 건 쉽지 않았다.

“리브, 언제까지고 너 혼자 코리다를 돌볼 수 없어.”

그녀는 사실, 홀로 코리다를 돌보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이따금 죽은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들의 죽음이 그들 탓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비난의 말을 쏟아 냈다.

“세상이 얼마나 험한 줄 알아? 더 늦기 전에 너도 좋은 놈 만나야지.”

당연하게도 남들과 비교해 혼기를 훌쩍 넘기도록 생계 전선에서 고군분투하기도 싫었다.

힘들게 기숙 학교를 졸업할 때만 해도 그녀에게는 제 나름대로 꿈꾸던 미래가 있었다. 그 미래 속의 자신은 좀 더 행복하고, 안정적이고, 사랑받는 삶을 살았다.

왜 아니겠는가. 그녀에게도 꿈 많은 소녀였던 시절이 있는데!

그녀는 약방 주인이 제시하는 해결책이 나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이 척박한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제 사랑과 결혼까지 헐값에 팔아 버리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겨우 몇 푼의 여유를 되찾자고 그렇게.

남들이 보기에는 배부른 투정이라며 혀를 차겠지만 말이다.

…사실은 그녀도,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고 싶었다. 다만 마지막 자존심으로 저 자신을 누군가에게 팔듯 내던지지 않고 있을 뿐.

걷잡을 수 없이 넘치는 눈물 탓에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리브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뺨을 가로지르는 물기와 함께, 흠뻑 젖어 있던 눈꺼풀이 조금 가벼워졌다.

흐느낌을 속으로 되삼킨 그녀가 느리게 눈을 떴다. 두어 번의 깜빡임으로 눈물방울을 털어 내서 한결 밝아진 시야에 약 봉투가, 그리고 그 위에 놓인 손수건이 보였다.

손수건?

네모반듯하게 접힌 손수건을 멍하게 보던 리브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큰 키의 사내가 그녀 옆에 서 있었다. 성상을 응시한 채 서 있는 사람은 그녀가 아는 얼굴이었다.

“…디트리언 후작님?”

오늘따라 유독 새카만 프록코트 때문인지 사내의 얼굴은 유난히 더 하얗게 보였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얼굴은 여전히 잘생겨 보였는데, 긴 눈꺼풀이 유독 시선을 끌었다. 느리게 깜빡이는 모습이 마치 나비의 날갯짓을 연상케 했다.

조용히 정면을 응시하던 그가 문득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깔끔하고 매끄럽게 뒤로 넘긴 그의 백금발 몇 가닥이 이마로 살짝 흘러내렸다.

“신은 들어 주실지언정, 이뤄주시진 않지.”

냉소적으로 중얼거리는 말은 리브에게나 겨우 들릴 정도로 작았다. 그러나 워낙 예배당이 조용한 까닭에 애써 귀 기울일 필요도 없이 똑똑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무언가를 이룰 힘을 가진 건 인간이네, 선생.”

나지막한 저음은 소름 끼치도록 서늘했으나, 동시에 세이렌의 노래처럼 매혹적이었다.

내내 성상을 응시하던 벽안이 힐끗, 리브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내게 기도해 봐.”

후작의 입매가 아주 미세하게 비틀렸다. 희미하게 떠오른 그것은 분명한 미소였다.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평소에 무표정한 얼굴로도 온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던 사내가 희미하게 웃기까지 하니, 그 앞에 무릎 꿇지 않은 이가 없을 터였다.

그건 리브 역시 마찬가지라, 오만하게 서서 저를 내려다보는 사내를 그녀는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친 이 찰나가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혹시 아나? 기적이 일어날지.”

기적.

그가 뱉은 단어가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그녀를 유혹했다.

후작에게 기도하면 정말 기적이 일어날까. 신도 들어주지 못한 제 기도를 이 남자가 들어줄까?

그런데 이 남자는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사내의 아름다움에 몽롱하게 취한 와중에도 리브의 마음 한쪽에 의구심이 일었다. 디트리언 후작은 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나? 그림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져서 괴롭히는 게….

그 순간, 그녀의 의구심을 눈치챈 것처럼 후작이 미소를 지운 채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등을 돌리는 후작을 보자 리브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고민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자 갑자기 이 기회가 놓쳐선 안 될 천운처럼 느껴졌다.

“돈이 필요해요!”

벼락처럼 튀어나온 말은 조금의 꾸밈도 없는 적나라한 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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