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3)화 (13/138)

아니, 있었나?

리브는 순간적으로 후작과 시선이 마주쳤다고 느꼈으나, 그건 단지 그녀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그래. 착각일 수도 있는 게 아니라 착각이겠지. 이 많은 사람 사이에서 후작이 저를 어떻게 발견할 것이며, 설사 발견한다 한들 왜 이쪽에 관심을 두겠는가. 요즘 너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후작과 얽히는 바람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거지.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일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걸까?

밀리언은 미술품 문제로 후작과 남작이 안면을 익혔다고 말했었다. 거래가 끝났다면 다시 볼 일이 없는 거 아닌가? 아니면 새로운 미술품?

리브는 후작과 펜던스 남작 부부의 대화에 제 이름이 화두로 오르지는 않을 거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했다. 그런 건 후작에게 아무 이득이 없는 일일 테니까.

…그렇겠지?

후작에게서 관심을 떼지 못하는 리브의 모습에 카밀이 낮게 탄식했다. 그러더니 작은 목소리로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제가 후작님에 관해서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은 건 사실입니다. 아름다운 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귀족들은 아주 많고, 저는 그런 사람들과 꽤 자주 어울렸거든요. 그러다 보면 꼭 후작님의 이야기가 아니어도… 많은 사정을 엿보게 되죠.”

얼핏 듣기에 카밀의 말은 그저 귀족들의 후원을 잘 받아 내는 예술가의 생활을 설명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가 정말 평범한 예술가라면 어찌 귀족들이 그의 앞에서 자기들의 뒷이야기를 떠들겠는가.

리브는 어렵지 않게 두루뭉술한 말 속의 핵심을 깨달았다.

“…귀족이세요?”

“대단치는 않고요.”

리브의 얼굴에서 드러난 부담스러운 감정을 알아챘는지, 카밀이 연신 손사래를 쳤다.

“출신이야 어떻든, 지금은 그저 남작가의 미술 교사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 가는 평범한 선생입니다. 이 한 몸 먹고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입주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월세를 올리려는 미친 집주인 때문에 요즘 골머리를 썩고 있다니까요?”

그는 정말로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지간히 괜찮은 귀족 출신이라면 월세를 얻어 살 이유가 없을 테니, 대단치 않다는 그의 말이 맞는 듯했다.

사실 요즘은 허울만 좋은 귀족 작위도 무궁무진하고, 암암리에 작위를 사고판다는 말까지 나오는 세상이었다. 귀족 출신이 꼭 평범하게 살지 말라는 법은 없지.

지도법이고 뭐고 카밀과의 친분을 시작조차 하지 말아야 하나 고민했던 리브는 내심 그의 사정에 친근감을 느끼며 안도했다. 마음을 놓은 까닭인지 입가에도 편안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도 부에르노 정도면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살 만하죠. 당장 페론만 가도 비슷한 수준의 집을 구하려면 집세가 두세 배니까요.”

무심코 뱉은 말에 카밀이 낮게 탄성을 뱉으며 질문했다.

“와, 페론에서 살아 보셨어요?”

“…잠깐이요.”

페론은 이 나라의 수도였다. 수도답게 그 어떤 도시보다 화려하고, 거대하고, 많은 사람이 사는 곳. 리브는 그곳에서의 생활이 좋았다.

부모님이 그 도시에서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는.

“선생님이 귀족이셨다면 제가 몰랐을 리 없는데!”

“모르시는 게 당연해요. 아니니까요.”

페론을 떠올리면 밀려드는 건 우울한 감정뿐이었다. 리브는 애써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고개를 들었다.

마침 후작이 돌아가려는 듯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남작 부부는 화사하게 웃으며 그를 배웅했고, 밀리언도 파들파들 떨면서 부모님의 곁을 지켰다.

“와 주신 것만으로도 밀리언에게는 더없이 영광스러운 생일 선물이 되었을 겁니다.”

마침 남작이 호탕하게 웃으며 하는 말이 들려왔다. 그 말에 후작의 시선이 밀리언에게 잠깐 닿았다.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나, 그가 얼마나 냉담한 눈으로 밀리언을 보았을지 너무도 쉬이 상상되었다.

리브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밀리언을 살피다가 또래 영애들이 모여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영애들은 입가를 가린 채 연방 소곤거리느라 바빴다. 눈으로는 끊임없이 밀리언과 후작 쪽을 힐끔거리는 걸 보니, 틀림없이 그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는 눈치였다.

기숙 학교에서 보낸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특히 입학 초의 일들이.

‘아니야, 괜찮겠지.’

후작이 파티장 입구 너머로 사라지는 걸 보며 리브는 괜히 드는 걱정을 애써 잠재웠다. 그녀의 학창 시절은 개인적인 경험일 뿐이었다. 밀리언이 그녀와 비슷한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는 건 어디까지나 그녀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설사 문제가 생긴다 한들, 그녀가 나설 일이 있겠는가. 쓸데없는 걱정을 사서 하느니 제 앞가림을 걱정하는 편이 훨씬 생산적일 것이다. 당장 그녀는 후작이 펜던스 남작 부부에게 제 이야기를 했을지부터 걱정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남작 부부의 얼굴을 보면 디트리언 후작이 딱히 무언가 나쁜 소리를 한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그가 리브에 관해 조금이라도 언급했다면 남작 부인이 그녀를 찾았을 것이다.

“저도 이만 가 봐야겠어요.”

리브는 피로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카밀에게 말했다. 카밀은 친절하게 다음 만남을 기약했고, 리브는 저택을 나와 한참 멀어지고서야 비로소 긴장을 풀었다.

밀리언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 참석한 파티였으나, 돌아오는 길에 남은 건 디트리언 후작으로 인해 일어난 싱숭생숭한 마음뿐이었다.

***

밀리언의 생일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펜던스 남작가에서 한 통의 서신이 왔다.

밀리언이 몹시 아파서 당분간 수업을 진행할 수 없겠다는 서신이었다. 밀리언을 향한 걱정과 빠른 쾌유를 기원한다는 말을 가득 담아 답신을 보낸 게 지난주였다.

언제 수업을 재개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탓에 부업을 찾기도 어려웠다. 남는 시간을 어떻게든 활용하기 위해 리브는 바느질 일감이라도 얻어 보려 며칠째 동네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별로 소득은 없었지만 앉아만 있는 것보단 이렇게라도 움직이는 게 훨씬 나았다.

“언니….”

오늘도 나갈 준비를 하느라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리브가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창백한 안색의 코리다가 리브를 보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응?”

“저기, 언니가 없을 때 포멜 아저씨가 다녀갔어.”

포멜의 이름을 들은 리브가 반사적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지 않아도 오늘 만나려던 참이야. 좀 더 일찍 해결한다는 걸, 언니가 정신이 없었네.”

“응. 그리고….”

두 손을 모아 꼼지락거리던 코리다가 시선을 내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약이… 다 떨어져서.”

리브가 멈칫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집을 자주 비우는 리브 때문에 코리다는 제 약을 스스로 챙겨 먹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이렇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면, 약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일상을 보냈다.

리브는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코리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제부터?”

“어, 얼마 안 됐어.”

족히 며칠은 약 없이 통증을 버텼다는 소리였다. 리브는 치미는 한숨을 애써 억누르며 코리다를 꽉 끌어안았다.

“미안해. 당장 사 올게.”

“급한 건 아니야, 언니!”

“조금만 기다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코리다의 ‘급한’ 기준은 피를 토할 정도로 안 좋은 상태였다. 그리고 저렇게 말을 꺼낼 정도라면 이미 충분히 위험한 상태에 다다르고 있다는 소리일 테고.

리브는 남은 생활비를 전부 꺼내 들고 집을 나섰다. 포멜에게 줄 추가금을 제외하고 남은 돈은 전부 약값으로 나갈 것이다.

아무래도 펜던스 남작 부인에게 월급을 조금만 이르게 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아야겠다.

‘아, 애초에 밀리언의 생일 선물을 사지 않았다면 며칠은 더 버틸 수 있었을 텐데.’

좁고 더러운 골목을 바쁘게 지나가며 머릿속으로 생활비를 가늠하던 리브가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 얼마나 부끄럽고 옹졸한 생각인지.

가르치는 학생의 생일을 축하해 줄 여력조차 없는 제 처지가 새삼 한탄스러웠으나, 당장 이 곤경을 벗어날 방법이 없으니 자꾸 원망할 대상을 찾게 되었다. 실은 누구에게도 잘못이 없다는 걸 알면서 말이다.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제 탓이다. 코리다의 약을 미리 확인했어야 했는데, 근래 정신이 없다는 핑계로 소홀히 했으니.

“안녕!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리브!”

약방은 집에서 멀지 않았다. 언제든 달려와서 약을 살 수 있도록, 일부러 집을 고를 때 약방 근처를 알아보았던 탓이다. 물론 지금 사는 거리가 부에르노에서 가장 싼 거리라는 점이 첫 번째 기준이기는 했지만.

단골이나 다를 바 없는 리브를 반갑게 맞아 주는 약방 주인을 향해, 리브도 빙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약을 좀 사고 싶어서요.”

“그렇지 않아도 왜 안 오나 생각했어.”

약방 주인은 넉살 좋게 웃으며 익숙하게 약제를 꺼냈다. 늘 같은 약을 사는 터라 처방전도 따로 필요가 없었다.

능숙하게 약을 포장하던 약방 주인이 문득 목소리를 높여 말을 걸었다.

“그거 알아? 도미니안에서 신약 발표가 있었어.”

“신약이요?”

도미니안 학술원에 딸려 있는 의학 연구소는 대륙 전역에 약을 유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발표한 신약이라면, 이른 시일 안에 상용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이고 말이다.

“그래. 대충 들어 보니 코리다 같은 아이들에게 아주 좋을 것 같아. 한번 알아보는 게 어때?”

“이곳에도 신약이 들어올까요?”

“안타깝게도 이런 구석진 약방에까지 신약이 공급되진 않겠지.”

지금 코리다가 먹는 약은 몸을 더 악화하지 않는 수준으로 유지하는 약이었다. 하지만 만약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이 나왔다면….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