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2)화 (12/138)

“…리브 로이데스입니다.”

인사를 하면서도 리브는 얼떨떨함을 떨치지 못했다. 제법 준수한 사내이긴 한데, 어째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 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자리는 밀리언의 생일 파티였고, 참석자들 또한 밀리언의 친구이거나, 밀리언의 친구 부모님이거나, 펜던스 남작 부부의 지인이었다.

그렇다면 눈앞의 남자 또한 그렇다는 소리인데….

“갑자기 말을 걸어 놀라신 모양이네요.”

“죄송하지만 네. 맞아요.”

리브가 선선히 긍정하자 카밀이 쾌활하게 웃었다.

“반가운 마음에 대뜸 말을 걸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선생님을 아주 약간 알고 있거든요.”

리브가 이상한 오해를 하기도 전, 카밀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밀리언이 그림 수업을 할 때마다 선생님 이야기를 해서요.”

“아…. 그럼 당신이…?”

그러고 보니 밀리언에게 미술 선생을 구했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리브는 뒤늦게 밀리언이 재잘거렸던 말들을 떠올렸다. 급하게 떠올리려 하니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평소에도 워낙 다양한 화제로 수다를 떠는 밀리언이라 몇 번 언급되었던 미술 선생에 관한 말도 대강 넘겼던 탓이었다.

다만 그때 미술 선생이 졸업했다는 학교 이름을 듣고 꽤 놀랐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역시 펜던스 남작가라 학력 좋은 이를 데려왔다며 감탄했었는데….

“에글란틴 예술 학교를 졸업하셨다는 그….”

“네, 이번에 새로 온 밀리언의 그림 선생입니다.”

눈매를 접으며 고개를 끄덕인 그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짐짓 투덜거리듯 말했다.

“밀리언이 선생님께 제 이야기를 한 모양이군요. 부디 좋은 말만 들으신 거라면 좋겠는데.”

“물론 좋은 이야기들이었어요.”

리브가 재빨리 기억을 뒤졌다. 학력 외에 그나마 떠오르는 거라고는 잘생겼다는 칭찬뿐이었다.

그때는 그냥 한창 이성에게 관심을 많이 가질 나이라고 생각하면서 넘겼는데, 당사자에게 전해 줄 만한 칭찬은 아닌 것 같았다. 차라리 실력을 칭찬했다고 할까?

“말씀을 못 하시는 걸 보니…?”

“아니, 정말로 좋은 이야기였어요. 미술 선생님이 아주 잘생기셨다고…!”

서글프게 시선을 내리까는 카밀의 모습에 놀라 얼른 입을 열었던 리브가 황급히 도로 말문을 닫았다. 그러나 이미 말은 튀어 나간 뒤였다.

당혹감에 눈을 깜빡이던 리브가 사과하기 위해 입술을 뗐다. 그러나 그녀보다 먼저 카밀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멋진 칭찬을 했네요! 밀리언에게 감사해야겠습니다.”

다행히도 카밀은 전혀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나쁜 소리는 아니니까 괜찮았던 걸까.

리브는 내심 안도하면서도 멋쩍은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밀리언이 늘 로이데스 선생님에 관해서 이런저런 자랑을 늘어놓거든요. 그래서 꼭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오늘 인사드릴 수 있어서 아주 기쁩니다.”

“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르셀 선생님.”

“그냥 카밀이라고 불러 주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어떻게….”

“제가 선생님을 리브라고 부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리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혹감에 말을 잇지 못하던 리브는 이내 미묘한 눈으로 카밀을 응시했다.

아무리 그녀가 생계에 치여 바쁜 삶을 살고 있다고는 하나, 기숙 학교에서는 몇몇 남학생들에게 구애를 받아 본 적이 있었다.

학생 시절의 경험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느냐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상대가 저에게 보이는 이성적 호감까지 못 알아볼 정도로 천치는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났으니, 예의를 지키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리브의 말에 어리둥절하게 서 있던 게 모두 거짓말인 것처럼 정색하자 카밀이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아, 불쾌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마음이 앞서서 그만.”

“아니에요. 아무래도 밀리언이 저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 좋게 한 것 같네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처음 보는 사내가 얼굴을 보자마자 호감부터 표출할까. 리브는 다음 수업 시간에는 밀리언에게 넌지시 주의를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어디 가서 예의 없다는 소리를 듣지는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첫 만남에 안 좋은 인상부터 남겨 드린 것 같아 부끄럽군요.”

부끄럽다는 말이 진심이라는 걸 증명하듯, 그의 뺨에 옅은 홍조가 돌았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사내가 어리숙한 꼴로 얼굴을 붉히니, 누구라도 금방 화를 풀지 않고선 못 견딜 모습이었다.

아마 저런 얼굴로 득을 본 경우가 많지 않았을까?

그렇게 예상하며, 리브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괜찮습니다. 예의는 한 번으로 그치는 게 아니니까요. 앞으로 잘 지키면 되지요.”

“과연, 밀리언 말대로 엄격하시네요.”

밀리언이 그녀를 엄격하다고 말했다고?

리브는 진심으로 의아한 마음이 들어서 멀리 보이는 밀리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두고 엄격이라니, 밀리언은 진정 엄격한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던 게 틀림없었다.

리브의 얼굴에 드러난 억울함을 느꼈는지, 카밀이 조금 풀어진 얼굴로 미소 지었다.

“사실 밀리언과 가장 친한 선생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지도법에 관해서 조언을 구하고 싶었어요.”

“지도법이라고 부를 정도로 대단한 기술은 없어요.”

“하지만 제가 지켜야 할 선에 관해서 조언해 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여학생을 가르치는 건 처음이라서 모든 게 조심스럽거든요. 그렇다고 펜던스 남작 부인께 이런 걸 말하는 건 좀… 선생으로서 얼굴을 들기 어려워서. 혹시 저와 만나서 하는 대화가 부담스러우시다면, 짧은 서신으로 답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확실히 여학생을 처음 가르치는 남자 선생님이라면 고민스러운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와 관련해서 조언하는 건 밀리언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짧게 고민하던 리브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밀리언과 관련된 내용이라면, 조금 조언해 드릴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잠깐이나마 기가 죽었던 카밀은 금세 기운을 되찾고 생글거렸다. 천성이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리브는 그에게 서신을 전달받을 주소를 알려 준 뒤, 이제 정말 파티장을 떠나기로 했다.

파티장 어딘가에 쌓여 있을 선물 더미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리브가 문득 파티장 입구로 시선을 고정했다.

기분 탓일까? 유독 저 입구 쪽이 시끄럽고 부산스러웠다. 그 소란에 이끌려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데, 펜던스 남작 부부가 혼비백산하며 입구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리브는 언젠가 저 비슷한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차를 마시고 가라던 남작 부인이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에 놀라 돌아섰던 날.

디무스 디트리언을 처음 만났던 바로 그날 말이다.

“설마….”

리브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카밀이 파티장 입구를 응시하며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런 자리에서 뵐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말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불쑥 솟아 있는 사내의 머리가 보였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도 사내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디트리언 후작이었다.

상대방의 얼굴을 노골적으로, 이렇게 뚫어져라 본 적은 결단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후작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리브는 크게 뜬 눈을 감추지도 못하고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녀뿐만 아니라, 이 파티장 안에 있는 모두가 놀란 눈으로 후작을 보고 있었다. 아마도 다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설마하니 후작씩이나 되는 이가 펜던스 남작 영애의 생일을 축하하러 왔으려고.

아마 무언가 다른 중요한 일이 있겠지.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 방문해 버리면 파티에 얼굴을 비친 꼴이 되지 않나?’

불현듯 든 생각에 리브가 시선을 돌렸다.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있던 밀리언이 새빨개진 얼굴을 한 채 부모님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 뒤로는 밀리언 또래 영애들이 미묘한 얼굴로 서 있었다.

펜던스 남작 부부는 상기된 얼굴로 그들의 사랑스러운 외동딸을 소개했다. 부부는 후작에게 무언가를 권유하는 듯했으나, 후작이 고개를 내젓자 약간 실망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아마도 후작은 남작 부부를 만난 뒤 곧장 돌아갈 모양이었다. 어른들 사이에 엉거주춤 끼어 선 밀리언은 발갛게 물든 얼굴로 후작의 얼굴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리브는 문득, 이 상황이 조금 우려스러워졌다.

남작 부부야 후작과의 친분을 내비친 게 더없이 자랑스러울 테지만, 밀리언은….

“신기하네요. 이렇게 사람이 많은 자리를 별로 안 좋아하실 텐데.”

생각에 잠겨 있던 리브가 그 말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모호하게 웃으며 후작을 보고 있는 카밀에게, 리브가 조심스러운 물음을 던졌다.

“…디트리언 후작님에 관해서 잘 아시나요?”

“네?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냥 남들이 아는 만큼 아는 거죠.”

그런 것 치고 조금 전의 중얼거림은 꽤 잘 아는 사이처럼 들렸는데.

리브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카밀이 문득 눈을 가늘게 뜨며 다소 짓궂은 어조로 물었다.

“선생님도 후작님께 관심이 있으신가요?”

그 물음이 꼭, ‘당신도 저 얼굴에 반해 쫓아다니는 수많은 여성과 같으냐’는 말처럼 들려서, 리브는 짐짓 퉁명스럽게 안색을 꾸몄다.

“부에르노에서 디트리언 후작님께 관심이 없는 사람이 있긴 할까요?”

“하하, 그건 그렇죠!”

새침한 리브의 대꾸 어디가 그리도 웃겼는지, 카밀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구석진 자리에 서 있음에도 순간적으로 몇몇 사람들이 이쪽을 돌아볼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후작도 있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