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1)화 (11/138)

“예? 하지만 이제 막 집중이 되기 시작했는데….”

휘둥그레 뜬 눈으로 중얼거리던 브레드는 후작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을 턱 다물었다. 마른침을 삼킨 그가 얼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그래야죠. 정리하겠습니다! 하하.”

얼마 피우지도 않은 시가를 재떨이에 내려 둔 후작이 무심한 얼굴로 작업실을 나섰다.

그의 뒤통수에 대고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리던 브레드는 작업실 문이 닫히고도 한참이나 쩔쩔매다가,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긴장을 풀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불을 휘감은 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리브는 일단 벗어 두었던 옷을 챙겼다. 일부러 입고 벗기 편한 옷을 들고 왔기에, 그녀가 차림을 정비하는 건 금방이었다.

그녀는 구겨진 치맛단을 탁탁 두드려 펼치며, 브레드를 향해 넌지시 질문했다.

“하인이 없었어요?”

“그래. 작업 방해될까 봐 다들 물러났나 봐. 계속 돌아다니다간 길 잃을 것 같아서 그냥 돌아왔어. 저택이 엄청 넓더라.”

소맷단으로 식은땀을 꾹꾹 눌러 닦는 브레드를 힐끔 본 리브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들어올 때 그들을 마중 나온 사용인 수만 헤아려도 열은 훌쩍 넘었다. 이 저택의 규모를 생각하면 당연하게도 그보다 많은 수의 상주 고용인들이 있을 터였다. 당장 보이기로는 외딴 지역인 듯하니 아마도 고용인 숙소가 따로 있겠지.

그 많은 이들이 주인 근처에서 대기하지 않고 있었다는 게 말이 되나?

“브레드, 좀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하다니?”

리브의 눈길이 이번에는 바닥으로 향했다. 흥건하게 고여 있는 와인과 유리 파편으로.

“와인 잔을 실수로 떨어뜨릴 분이 아니신 것 같아서요.”

“후작님도 사람이신데 취기로 그럴 수 있지.”

기력을 되찾은 브레드가 떠날 준비를 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인간적이고 좋기만 한데!”

와인이 본인에게 튀지 않을 정도로 잔을 멀리해서 떨어뜨린 게 실수라고?

…작업을 방해하려고 한 게 아니라?

리브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이 과민한 걸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별 뜻도 없는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걸까?

리브는 조금 전 나가던 후작의 얼굴을 떠올렸다. 매사 무관심하고 심드렁해 보이던 얼굴. 이따금 신경질적인 감정이 스치기는 했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기본적으로 후작은 리브와 브레드에게 이렇다 할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서로 합의되었던 대로 작업을 조용히 지켜보았을 뿐.

그런데 어째서일까.

어딘가 질 나쁘고 악질적인 관심을 산 기분이었다.

***

리브가 첫날 느낀 온갖 찜찜함과 미심쩍음과는 별개로, 작업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여전히 후작은 꼬박꼬박 작업을 참관했으며, 실수를 빙자한 방해를 했다.

‘실수를 빙자했다’는 건 어디까지나 리브의 추측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높은 확률로 제 추측이 맞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후작이 실수를 저지르는 타이밍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후작은 주로 브레드가 점점 집중하기 시작했을 때 그 분위기를 깨려는 듯 소음을 일으켰다. 덕분에 누드화는 아직 스케치조차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했다. 평소 작업 속도를 생각하면 현저히 느린 속도였다.

게다가 그림 작업은 전적으로 후작의 허락 아래에 진행되었기에, 더 그리고 싶어도 후작이 그만하자고 말하면 군말 없이 일어나야 했다.

브레드의 작업 속도를 생각하며 내심 이 일이 금방 끝날 거라 믿었던 리브는 뒤늦게 자신이 간과한 작업 환경을 깨닫고 탄식했다. 작업실을 제공하는 건 후작이고, 후작이 지켜볼 때만 작업할 수 있다는 점은 아주 큰 걸림돌이었다. 브레드의 손이 얼마나 빠르든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게 후작의 뜻에 따라 조정되었다. 처음에는 마냥 좋다고 찬양하던 브레드도 이쯤 되니 슬슬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눈치였다.

그러나 그걸 감지했다고 한들 어쩌겠는가.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브레드는 애써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후작님이 우리를 정말 괴롭히려고 하셨다면, 다른 편한 방법이 많으셨을 거야. 굳이 으리으리한 저택을 작업실로 제공해 주시진 않았을 거라고.”

브레드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후작이 진심으로 브레드와 리브를 괴롭히고 싶었다면 이런 수고로운 방법이 아니어도 충분히 다양한 방도를 찾았을 것이다.

작업실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거대한 저택을 통째로 내놓고, 고급스러운 화구를 준비하고, 주기적으로 마차를 보내오고, 작업 때마다 참관해 자리를 지키는 그 모든 과정은 후작에게도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내가 좀 더 빨리 작업할 테니 걱정 마, 리브.”

리브는 브레드의 말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어떤 이면이 있든 알아내 봐야 달라질 건 없었다.

이제 와 작업을 중단할 수는 없으니, 하루빨리 그림을 그려서 후작에게 넘기는 수밖에.

“선생님!”

무심코 한숨을 내쉬던 리브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자신이 선 자리를 깨닫고 얼른 상념을 털어 냈다. 낭랑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 이는 밀리언이었다.

밀리언은 한껏 치장한 상태였다. 하늘색 드레스에 화사한 꽃장식,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장신구들까지. 누가 보아도 오늘의 주인공이 밀리언이라는 걸 알아볼 것이다.

오늘은 밀리언의 생일이었다.

“선생님, 와 주셔서 감사해요!”

생일 파티는 펜던스 남작가의 뒤뜰에서 야외 파티로 진행되었다. 귀한 펜던스 남작가의 외동딸 생일답게 정성이 가득 들어간 생일 파티였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참석자가 많아서 리브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었을 텐데, 밀리언은 용케도 리브가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달려왔다.

활짝 웃으며 달려오는 밀리언의 뒤로 몇몇 눈길이 따라붙었다. 리브는 호기심 가득한 그 눈길을 애써 무시하며 밀리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생일 축하해, 밀리언.”

차마 가르치고 있는 학생의 생일 파티 초대를 무시할 수 없어서 오기는 했으나, 리브는 퍽 민망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차림은 단정하지만 파티 참석자라고 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급하게 준비한 생일 선물도 겨우 구색이나 맞춘 정도였다. 직접 건네기에는 영 면이 서질 않아 다른 선물들 위에 몰래 끼워 놓고 와야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말이다.

“부모님은 저기 계세요!”

마음 같아서는 선물만 주고 돌아가고 싶었다. 아픈 여동생이 있다는 리브의 사정은 펜던스 남작 부부도 알고 있으니, 코리다의 핑계를 대면 조금 빨리 자리를 뜰 수 있을 것이다.

밀리언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리브는 자신이 이런 자리에 오래 있어 봤자 좋을 일이 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아빠, 엄마. 선생님 오셨어요!”

밀리언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긴 곳에서는 펜던스 남작 부부가 바쁘게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누군가와 반갑게 인사를 하던 펜던스 남작 부인이 리브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로이데스 선생!”

리브의 손을 덥석 잡은 남작 부인이 그녀를 제 지인들에게 이끌었다.

“우리 밀리언의 교양 수업을 봐주고 있는 로이데스 선생이에요. 선생, 인사해요. 블레즈 백작 부인이에요.”

블레즈 백작 부인이라면 밀리언의 절친한 친구 아드리엔의 어머니였다. 리브가 얼른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리브 로이데스입니다.”

“어머, 밀리언이 그렇게나 자랑하던 아름다운 선생님이군요?”

블레즈 백작 부인이 유쾌하게 웃으며 리브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늘 한 무더기의 친구들을 끌고 다니는 아드리엔을 보며 참 친화력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 이 백작 부인을 닮아서 그랬던 모양이다.

리브는 신분의 차이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백작 부인에게 미약한 호감을 느꼈다.

“우리 아드리엔에게 오랜 선생님이 계시지만 않았으면 당장 와 달라고 청했을 텐데!”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부인.”

“우리 로이데스 선생은 클레망스 기숙 학교 출신이에요. 학식이 얼마나 뛰어난지 모른답니다.”

펜던스 남작 부인이 자랑하듯 꺼낸 말에 백작 부인 옆에 있던 또 다른 부인이 탄성을 뱉었다.

“세상에, 클레망스 출신인가요? 꼭 기억해 둬야겠네요.”

선물만 주고 빨리 퇴장해야겠다고 다짐했던 리브는 그 생각을 조금 정정했다. 밀리언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다면 아마도 비슷한 또래의 자식을 둔 부모들일 테니, 조금 더 머물러 몇 명에게라도 눈도장을 찍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 까닭이었다.

이후로도 리브는 펜던스 남작 부인의 친절에 기대어 몇몇 부인들과 통성명했다. 다들 펜던스 남작가와 비슷한 수준의, 적당히 교양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리브는 최대한 믿음직한 가정 교사의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클레망스 기숙 학교 출신의 젊고 아름다운 가정 교사에 대한 관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부인들의 화제는 금세 다른 곳으로 옮겨 갔고, 리브는 조금 더 자리를 지키다가 새로운 인물이 끼어드는 것을 보며 슬그머니 무리를 빠져나왔다. 밀리언은 제 또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생일 축하를 받느라 바빴다.

리브는 잠시 고민했다. 슬슬 선물을 두고 퇴장해야 할까? 손님이 많아서 그녀 한 사람 정도는 일찍 가도 티가 전혀 안 날 것 같았다.

품에 든 작은 선물 상자를 만지작거리면서 고민하는데, 누군가 리브의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로이데스 선생님?”

펜던스 남작 부인이나 밀리언이 아니고서는 그녀를 부를 사람이 없었기에, 리브는 조금 놀란 얼굴로 시선을 들었다.

말을 걸어 온 건 검은색 고수머리에 색소가 적은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사내였다. 적당히 혈색이 도는 뺨에 아주 옅은 주근깨가 보였는데, 그것이 꽤 잘 어울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리브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인 그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카밀 마르셀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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