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0)화 (10/138)

각자 정신이 팔렸던 리브와 브레드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도 못했는데, 도대체 언제 작업실에 들어왔는지 모를 후작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뒷짐을 진 후작의 푸른 눈동자가 브레드를 스치듯 지나쳐 리브에게로 향했다. 며칠 만에 다시 본 그의 얼굴은 그녀가 이따금 곱씹었던 모습보다 훨씬 아름답고 우아했다. 게다가 그가 걸치고 있는 군청색 프록코트와 안에 받쳐 입은 베스트, 실크 셔츠가 그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작업을 위해 옷을 헐벗고 있었던 리브는 저도 모르게 팔로 가슴께를 감쌌다. 어쩐지 꼼꼼하게 차려입은 후작을 보자 제 나신이 조금 민망해진 까닭이었다. 누드화 모델로서 처음 옷을 벗을 때 느꼈던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되살아났다.

후작에게 이미 한 번 등을 보인 적 있었고, 그때는 괜찮았으니 작업도 의연하게 견뎌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리브는 자신이 상황을 과신했음을 깨달았다. 후작에게 등을 보였던 그날은 그저 그녀가 너무 절박한 까닭에 수치심을 느낄 사이도 없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후작님, 정말 영광입니다! 반드시 제 인생의 역작을 그려서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리브를 응시하고 있던 후작이 브레드에게로 눈을 돌렸다.

“부족한 건 담당 하인에게 전달하면 곧바로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충분합니다! 오히려 과분합니다!”

후작의 눈길이 사라지기 무섭게 리브는 도망치듯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있던 그녀는 희고 부드러운 이불을 끌어당겨 조심스럽게 제 몸을 가렸다. 얇은 천으로 어설프게나마 살결을 덮자 마음에 위안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다.

리브에게 힐끗 눈길을 준 후작이 냉소적인 목소리로 질문했다.

“설마 다 가린 몸뚱이를 그러고선 누드화라고 주장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리브! 당장 이불을 치워!”

브레드가 화들짝 놀라며 리브에게 외쳤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리브가 무슨 엄청난 실수라도 한 것처럼 들렸다.

후작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고 싶어서 저러는 것일 테지만, 유난히 강압적인 브레드의 말투가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후작 앞에서 그의 말투를 두고 싸울 수는 없는 터라, 리브는 잠자코 이불을 끌어 내렸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묘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작업할 때 늘 이렇게 날카롭나?”

“네? 아, 아니….”

“예술가들이 예민하게 군다는 건 알고 있지만, 솔직히 어투가 거슬리는군.”

“죄,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후작은 어지간한 예술가보다 더 까탈스러운 게 분명하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들으며 리브는 그렇게 확신했다. 화가라면 모름지기 그림을 잘 그리면 되는 직업이 아니겠는가. 높으신 후작께서 한낱 화가와 모델의 대화 하나하나까지 지적하다니, 별나기도 했다. 그림 모델에게 건네는 말투마저 신경 쓰면서 작업해야 하는 화가는 브레드밖에 없을 것이다.

후작은 작업 과정에 트집을 잡기 위해서 참관을 요청한 건가?

‘어쩌면 정말 그런 걸지도?’

리브는 뒤늦게 그러한 가능성을 떠올렸다. 정말로 후작이 그녀와 브레드를 괘씸하게 여겨서, 괴롭히기 위해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말이다.

그림을 팔지 못한다며 실랑이를 벌인 게 후작으로서는 고깝게 보였을 수도 있었다. 높으신 분이 어디 거절당해 본 경험이나 있겠는가.

하물며 저 디무스 디트리언이.

그렇게 생각하자 리브는 이 모든 상황이 걱정스러워졌다. 시작부터 평탄치 않은 이 작업이 과연 무탈하게 끝날 수는 있는 건지 막막해졌다. 지금이라도 그냥 돈으로 보상하겠다고 청해 보는 건….

아니,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후작이 얼마에 그림을 샀든, 리브에게는 그 돈을 내놓을 능력이 없으니까.

상황을 모면하기엔 글렀다. 이미 저택에 들어왔고, 옷을 벗은 이상 하루빨리 작업을 끝내는 것만이 유일하게 이 상황을 벗어날 길이었다. 그러니 리브는 브레드가 최소한의 위기감이라도 느꼈으면 싶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싶으면 그도 일을 빨리 끝내려 노력할 테니까.

그러나 아쉽게도, 브레드는 지금 황송하다는 어조로 후작에게 연신 사과를 하는 중이었다.

리브는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완전히 옆으로 치워 버렸다.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어 안달 난 브레드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목덜미를 스산하게 휘감던 긴장감이 점점 흐려졌다.

“모델은 준비가 끝난 것 같은데.”

아니, 긴장감이 흐려진 건 아닌가 보다. 후작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만 시작하지.”

리브는 깊이 심호흡했다. 그런 뒤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부디 후작이 물감 냄새만 풀풀 풍기는 이 지루한 작업실 풍경에 빨리 질리기를.

후작이 참관을 위해 앉은 자리는 작업실의 구석진 곳이었다. 그곳에는 1인용 소파와 함께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혹시 작업 도중 희롱해 오지 않을까, 이 초라한 모습을 보며 혀를 차진 않을까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도, 후작은 아주 조용히 작업을 참관했다. 선 하나를 그리는 것조차 후작의 눈치를 보는 것 같던 브레드도 차츰차츰 속도를 냈다. 일단 작업을 시작하니 그럭저럭 집중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안타깝게도 리브는 그럴 수 없었다. 피부에 닿는 시선이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의 자격지심일 수도 있었다. 아니, 확실하게 그런 것이겠지. 후작이 작업실 내에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멋대로 시선이 느껴진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후작이 무얼 하고 있는지, 등을 돌리고 앉은 그녀가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이 더욱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차라리 그의 존재를 잊어버리면 좋으련만, 물감 냄새 사이로 은은하게 풍겨 오는 와인 향이 후작의 존재를 자꾸만 상기시켰다.

사실 리브는 그가 기껏해야 한 시간 정도 지켜보다가 작업실을 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한 시간이 무엇인가. 삼십 분만 버텨도 퍽 인내심 있다고 칭찬해 줄 법했다. 스케치나 하고 있는 게 전부일 그림과 자세를 바꾸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델을 구경하는 일이라니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그러나 놀랍게도 후작은 한 시간이 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인내심이 얼마나 가겠어.’

브레드는 보통 집중하면 옆에서 건드리지 않는 한 몇 시간이고 작업을 이어 나가는 편이었으니까. 일단 브레드가 후작의 존재를 잊고 그림에 집중하기만 하면 이 작업은 예상보다 더 길게 이어질 터였다.

지금이야 신기해서 와인을 홀짝이며 구경한다지만, 곧 흥미를 잃겠지.

그래서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브레드의 요구 사항에 맞추려 노력했다. 그녀가 본 몇 안 되는 그림 속 모델들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조금씩 이 낯선 공간에 적응해 가는 순간.

쨍그랑!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껏해야 연필로 스케치를 하는 소리, 누군가의 숨소리가 전부였던 터라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소음이 유독 크고 날카롭게 느껴졌다.

어깨를 움츠리며 화들짝 놀란 리브가 저도 모르게 소리 난 곳을 돌아보았다. 후작이 앉은 자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산산조각이 난 와인 잔과 사방으로 쏟아진 붉은 액체가 보였다.

“아이고! 괜찮으십니까, 후작님!”

브레드가 연필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겨우 속도가 붙는가 싶던 작업이 단숨에 중단되었다.

“아, 손이 미끄러져서.”

후작이 다소 성의 없는 어투로 말했다. 다친 곳은 없으시냐며 호들갑을 떨던 브레드가 하인을 불러오겠다며 허겁지겁 작업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시끄럽게 닫히는 작업실 문소리를 듣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리브가 얼른 이불을 몸에 휘감았다. 와인을 치우러 들어온 하인에게까지 제 나신을 보여 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신을 돌돌 말다시피 이불로 둘러싼 리브가 후작이 앉아 있는 쪽을 힐끔거렸다. 후작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긴 다리를 스툴에 올린 채 비스듬히 기대앉은 그의 손에는 굵은 시가가 들려 있었다.

시가 연기를 맡으면 대번에 얼굴을 찌푸릴 것처럼 결벽적인 사람으로 보였는데.

뜻밖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뜬 찰나, 후작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례하지.”

말 내용은 양해를 구하고 있으나, 어투는 사실상 강압적인 선언에 가까웠다. 빈말이라도 그가 실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것이 과분해서, 리브는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곧 짙은 시가 냄새가 와인 향과 뒤섞이기 시작했다.

리브는 그 향에 이끌리듯 다시 눈을 들었다. 언제 어디서나 흐트러짐 없이 있을 것 같던 후작이라서 그런지, 시가를 물고 있는 자세만으로도 퍽 방만해 보였다. 그는 리브의 눈길이 느껴지지 않는 듯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저 반응이 리브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리브는 처음으로 겁을 먹거나 초조하지 않은 상태로 그를 관찰했다. 살짝 흐트러진 백금발이나 수려한 콧날, 다문 입술은 정말이지 잘 빚어 놓은 조각상이었다.

게다가 저 길쭉한 팔다리를 보라지. 디자인 자체는 흔히 볼 수 있을 차림인데도 후작이 걸치니 세기의 의복처럼 보였다.

리브의 눈길이 팔걸이에 아무렇게나 늘어진 그의 손으로 향했다. 그는 하얀 장갑을 끼고 있었다.

‘어?’

리브가 문득 의아한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사방으로 튄 와인의 흔적이 보였다. 리브의 고개가 옆으로 약간 기울었다.

그녀의 눈에 의아한 감정이 스치는 순간,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후작이 불시에 눈을 떴다.

기겁한 리브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괜히 이불을 좀 더 여미면서 목을 움츠리는데, 마침 작업실 문이 열리고 브레드가 돌아왔다.

“죄, 죄송한데 근방에 하인이 없어서….”

브레드는 송구스럽다는 듯 허리를 굽실거렸다. 별 감흥 없는 눈으로 브레드를 응시하던 후작이 몸을 일으켰다.

“작업은 이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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