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이보다 더 망상에 사로잡힐 수 있을까.
그녀는 본래 다수의 주목을 받거나, 맛깔난 입담으로 누군가를 즐겁게 만드는 일이 미숙했다. 이야기꾼은커녕 무대 위에 올라 주목받는 것조차 견디지 못할 게 뻔했다.
리브는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 내고 밀리언과의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설마 그걸 믿는 거니, 밀리언?”
“당연히 아니죠! 그분 얼굴을 보세요.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하시겠어요? 다 그분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말일 거예요.”
후작이 소설 속 대사를 뱉었다더라는 말을 할 때는 믿음이 가득하던 밀리언이 박제에 관해서는 단호하게 비웃었다. 리브는 그녀를 따라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박제라….
디무스 디트리언의 과거에 관해서 알려지지 않은 만큼, 그에 관련해서는 수많은 추측이 세간에 존재했다. 남의 소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리브조차 스치듯 접했을 정도로 말이다.
박제도 그중 하나로, 후작의 저택이 도시에서 외떨어진 곳에 있다는 점, 후작의 저택에 초대받는 손님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는 점 등의 이유로 형성된 괴기스러운 유언비어였다.
물론 실제로 상류층 인사 중에는 바깥으로 내보이기 면구스러운 취미 생활에 심취한 자들이 많다. 리브 역시 기숙 학교를 다니면서, 가정 교사 일을 하며 어깨너머로 보고 들은 게 있었다.
그런 취미는 사회적 지위나 부귀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그러니 후작에게 무언가 은밀한 취향이나 추잡한 사생활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가 누드화를 그릴 때 참관하겠다고 말한 것이 그 은밀한 취미 생활의 일면인지도….
“어머, 선생님! 아드리엔이에요!”
후작에 관한 가십을 떠드느라 바쁘던 밀리언이 눈을 빛내며 시선을 돌렸다. 밀리언의 절친한 친구 아드리엔이 멀리에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몇몇 친구들과 함께 놀러 온 듯한 아드리엔의 모습에 밀리언이 신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제 친구들을 향해 쪼르르 달려가는 밀리언을 가만히 응시하던 리브가 앉아 있던 자리를 정리했다. 그녀는 보호자로서 너무 멀지 않은 곳에서 밀리언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다가 저 친구 중 누군가의 눈에 들어서 추가로 직장을 얻게 된다면 그도 참 좋을 것이다.
어린 영애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제 처지에 새삼 비참함이나 울적함을 느끼진 않았다. 그런 배부른 감정에 취하기에 리브의 삶은 너무도 척박했으므로.
리브는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잠깐이나마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사내는 금방 잊혔다.
***
후작은 브레드의 작업실 앞으로 마차를 보내왔다.
별다른 문양이 없는 검은색 마차였다. 겉으로는 크게 특이한 점을 알 수 없었는데, 막상 마차를 타고서야 리브는 이 마차에 창문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정확히 말하자면, 밖에서는 창문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없었다. 브레드와 리브를 태운 마차는 바깥에서 문이 잠겼고,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꽤 오랜 시간 달렸다.
숨 막힐 정도로 은밀한 이 대우에 리브는 잔뜩 긴장했으나, 브레드는 조금도 그렇지 않은 듯했다.
그는 이동하는 내내 자신을 위해 손수 마차를 보내 준 후작의 관대함을 칭송하기 바빴다. 마차의 의자가 얼마나 푹신한지, 얼마나 흔들림 없이 달리고 있는지, 내부 장식이 얼마나 값비싼 재료인지 하나하나 언급하며 감탄했다. 내부가 고급스러워 눈요기로 충분하니 밖이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며 호탕한 웃음까지 터뜨렸다.
‘브레드와 함께 타서 다행이야.’
리브는 차라리 안심했다. 태평하기 짝이 없는 브레드라고는 하나 없는 것보단 나았다.
만약 혼자서 이런 마차에 타게 되었다면 온갖 부정적인 상상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내릴 즈음에는 공포에 질려 다리라도 풀렸을지 모르지. 얼마 전 밀리언과 나눈 후작의 괴기스러운 소문들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도착했어, 리브!”
푹신한 마차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불편하게 앉아 있던 리브가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과연 브레드의 말대로 마차의 움직임이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마침내 마차가 완전히 멈추고, 바깥에서 잠금이 풀리는 쇳소리가 났다. 조용히 열린 문 너머로 정복을 차려입은 풋맨이 그들을 위한 발판을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안내인으로 보이는 하인이 정중하게 인사를 해 왔다. 어디에서도 받아 본 적 없는 대접에 브레드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들뜬 표정을 지었다. 불안한 눈으로 앞서 걷는 하인의 등을 응시하던 리브가 힐끗,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까마득하게 보이는 계단, 그 위에는 고풍스러운 저택이 마치 그림책 속 삽화처럼 몽환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크림색에 가까운 외벽에 자리한 아치형 창문은 너무도 투명해서 유리가 있는지 의심스러웠고, 위로 좁게 모이는 하늘색 지붕에는 세밀한 조각상이 모서리마다 자리했다. 때마침 깨끗한 하늘을 등지고 있어서 퍽 아름답게 보였다.
“세상에, 이런 곳에서 작업한다고?”
브레드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촌스럽다고 면박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꼴이었다. 그러나 리브도 브레드만큼이나 놀란 터라 그의 반응을 놀려 줄 수 없었다.
저택은 거대했다. 덩그러니 선 저택 주변으로 푸른 정원과 드넓은 평원뿐인 것으로 보아, 아마 후작이 가진 별장 중 하나일 것 같았다.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예민한 후작의 성정이라면 이렇게 외딴 별장을 가지는 게 이상하지 않을 성싶었다.
아니, 사실 이곳이 외딴 저택인지도 사실 리브는 알 수 없었다. 오는 내내 바깥 풍경을 전혀 확인할 수 없었던 탓이다.
알고 보면 도시 내의 사유지일 수도 있겠지.
어딘지도 모르는 장소에 덩그러니 끌려온 브레드와 자신.
리브는 문득 밀리언과 나누었던 시답잖은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넘어갔던, 후작에 관한 온갖 음험한 유언비어.
‘이런 장소라면 누구 하나 죽어도 쉽게 숨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저택에 상주하는 고용인들이야 전부 후작의 사람일 테니까, 브레드와 리브가 이곳에서 무슨 일을 당해도 누구 하나 알지 못할 것이다.
가령, 박제를 당한다거나.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어째서인지 그 순간 그녀의 맨 등을 훑어보던 후작의 무감한 시선이 떠올랐다. 그때 후작은 그녀를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어떠한 상품 요소로 가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박제품을 볼 때도 아마 딱 그런 눈을 하지 않을까?
“리브, 왜 그래?”
브레드의 의아한 목소리에 리브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그녀보다 한참 앞서간 브레드가 계단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멈춰 서니 안내를 위해 앞서 걷던 하인 또한 멈춰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아한 브레드의 시선,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하인의 무심한 시선까지 확인한 리브가 다급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딱딱한 돌계단을 재빨리 올라 브레드를 따라잡자, 하인이 다시 몸을 돌렸다.
아름다운 대저택의 출입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너머로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가 보였다. 미리 그들의 방문 소식을 전해 들은 고용인들이 양옆으로 서서 손님을 맞이했다.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색으로 위장해 먹이를 끌어들이는 뱀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반짝거리는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리브는 무의식적으로 치미는 불안감을 내리눌렀다.
등 뒤로 닫히는 출입문 소리가 육중했다.
***
브레드의 작업실에서 옷을 벗을 때면 늘 차가운 공기에 몸을 떨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낮은 온도에 적응한 덕분에 지금은 그럭저럭 버틸 만했지만, 처음에는 추워서 오들오들 떨고는 했다. 특히 겨울에는 모델 일을 하고 돌아와 심한 감기에 걸려 드러누운 적도 있었다.
브레드의 작업실은 외풍이 심하고 별다른 난방 시설이 없었다. 브레드의 아내는 남편이 작업실에서 오랜 시간 보내는 걸 싫어해서, 작업실을 보수하는 데에 티끌의 소비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다.
화가라고는 하나 변변찮은 수익으로 용돈벌이나 하는 브레드 대신 가계를 책임진 건 그의 부인이었다. 브레드가 그림을 판 돈을 허겁지겁 써 버리는 건 어쩌면, 아내에게 몇 푼 안 되는 수입을 빼앗길까 봐 지레 겁먹은 까닭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남의 집안 사정이야 리브가 알 바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의 작업실 환경이 아주 열악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욱 이곳과 비교되었고.
“오오, 세상에! 이렇게 선명한 색감이라니! 게다가 이 부드러운 붓끝 좀 봐!”
브레드의 입은 쉴 새 없이 감탄사를 뱉었다.
화구에 관해서 잘 모르는 리브가 보기에도 이곳에 준비된 모든 물품은 최고급으로 보였다. 브레드는 거의 기절할 기세로 자신에게 주어진 화구를 하나하나 살폈다.
캔버스 앞에 앉아서도 그의 감탄은 멈추지 않았다. 리브는 반쯤 체념한 얼굴로 캔버스 앞에 섰다. 브레드만큼은 아니지만, 그녀 역시 이 훌륭한 작업실에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그녀가 앉아 있을 소파나 침대야 말할 것도 없이 최고급 가구였다.
그러나 그녀가 놀란 점은, 작업실 내의 공기가 생각보다 훈훈하다는 점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브레드는 종종 그림은 아주 예민한 작업이라, 온도나 습도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그런 걸 이해해 주지 않고 작업실에 돈 한 푼 쓰려 하지 않는 제 아내를 향한 투덜거림을 곁들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리브는 작업실의 추운 공기에 관해 무어라 불만을 표현할 수 없었다.
지금 이곳은 브레드의 작업실보다 확실히 따뜻했다. 그게 너무 낯설어서, 리브는 드러낸 제 팔뚝을 느리게 문질렀다. 춥지도 않은데 소름이 돋았다.
“작업에 지장이 없도록 준비하라고 해 뒀는데, 더 필요한 게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