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8)화 (8/138)

“그가 거절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보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후작이 리브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는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그 순간, 그의 입가에 서린 것은 무척이나 희미한 미소였다. 당연히 제 뜻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하는, 상대가 자세를 낮추고 당장 바라는 대로 움직일 것이라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 오만한 미소.

“…그 말씀이 옳으십니다.”

브레드의 협조라니. 그건 정말 멍청한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협조 같은 건 필요가 없는 관계인데.

“언니, 괜찮아?”

뒤엉킨 상념 속에 조심스러운 물음이 끼어들었다. 리브가 퍼뜩 기억을 털어 내고 눈을 들었다.

“응? 당연하지.”

걱정스러운 코리다의 눈빛에 리브가 얼른 표정을 밝게 꾸몄다. 피로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마무리되었다.

브레드는 손이 빠르고 일단 집중하면 밤낮없이 작업에 몰두하는 편이니,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으리라. 후작의 참관이 손끝에 박힌 가시처럼 거슬렸지만, 어차피 거절하지도 못할 거라면 차라리 무시하고 잊어버리는 편이 나았다.

“언니가 저번에 일 더 하게 됐다고 말한 적 있지? 아마 다음 주부터 시작할 것 같아.”

“힘든 일이야?”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업무 보조야.”

어쨌든 후작은 그림을 보았고, 리브가 모델이라는 걸 알아봤으면서도 그녀의 부탁에 따라 기회를 주었다. 자신이 한 말에 따라 리브의 정체도 함구해 줄 사람으로 보였다.

리브는 그가 사교 활동에 관심이 없다더라는 세간의 소문을 떠올리며 안도했다. 직접 대화해 본 후작은 소문 그대로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따라서 리브를 찰나의 가십거리로 소모하지도 않을 듯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언니 없을 땐 문단속 잘 하고 있어.”

그래도 많이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앞으로는 세간에 떠도는 후작 이야기를 귀담아들어야지.

***

“그래서 디트리언 후작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아세요? ‘건방지군, 당장 꿇어라!’라고 하셨대요!”

“그건 무척… 익숙한 대사네?”

“그러니까요! 꼭 소설 같아요!”

그야 그건 소설 속 대사니까. 그 대사를 했던 남자 주인공은 후작보다 족히 50년도 더 전에 창작된 인물일 텐데, 언제 후작에게 그 대사를 빼앗겼는지 모르겠다.

밀리언의 잘못된 지식을 정정해 주는 게 가정 교사인 리브의 일이겠지만, 이번만큼은 섣부르게 말을 얹기 어려웠다. 진위를 알 수 없는 일화라지만 진짜로 그가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으니까.

물론 직접 대화해 본 디트리언 후작은 조금 전의 과장되고 허세 가득한 대사를 외칠 사람으로 보이지 않지만.

“하아, 후작님은 어쩜 그렇게 멋지실까요? 나중에 부인 되실 분이 너무 부러워요.”

양손으로 뺨을 감싼 밀리언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리브는 어색하게 웃으며 앞에 놓인 차를 마셨다.

그들은 가까운 호숫가로 나들이를 나온 참이었다. 펜던스 남작 부인은 어린 밀리언이 혼자 외출하는 걸 허락하지 않기에, 밀리언은 종종 리브에게 동행을 요청해 오곤 했다. 리브는 그때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말이다.

오늘은 그렇게 마련된 자리였다. 호숫가는 산책로로 인기가 많은 장소라 우연으로라도 또래 친구들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밀리언은 퍽 이곳을 좋아했다.

코리다가 조금만 건강했어도 함께 왔을 텐데.

재잘거리며 노는 한 무리의 영애들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리브가 시선을 내렸다.

“저택에 한 번만 더 오시면 정말 좋을 텐데.”

“그때는 조각상 때문에 오셨다고 했지?”

“네. 어머니께서 구매한 조각상이 굉장히 유명한 예술가의 미공개작이었나 봐요. 그 일 때문에 요즘 경매에 올라오는 작품들이 씨가 마르고 있다지 뭐예요?”

“그렇구나.”

“미술품이 아니면 후작님이 방문하실 일은 없으실 테니 한 번만 더 그런 행운이 생기면 좋을 텐데…. 선생님도 그날 후작님을 마주치셨다고 하셨죠?”

“그랬지.”

“저는 그날 이후로 잠을 못 자요. 이게 바로 상사병일까요?”

리브는 말없이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심각하게 뺨을 붉히는 밀리언의 모습이 리브의 눈에는 귀엽기만 했다. 더불어 코리다 생각에 내심 씁쓸해지기도 하고.

코리다가 건강했다면 밀리언처럼 꿈같은 소녀의 낭만을 키워 나갔을 텐데. 집세를 걱정해서 생일 선물을 도로 되팔 걱정이 아니라.

“그래서 선생님, 저는 그림을 배우기로 했어요!”

“그래?”

“네! 어머니께서 수소문하신 분이 곧 오기로 했어요.”

“멋지네. 나중에 작품 그리면 선생님도 보여 줄 거지?”

“그럼요! 대신 비웃으시면 안 돼요?”

풋풋한 첫사랑에 빠진 소녀는 사랑을 위해 뭐든 할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발갛게 물든 밀리언의 얼굴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던 리브가 차분하게 시선을 거두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만도 바빴던 리브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후작의 이야기를 이제야 조금씩 알아 가고 있는 참이었다. 떠도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녀가 듣기에 몹시 허황하고 터무니없었다. 사람이라기보다는 무슨 신화 속 초인을 일컫는 듯한 묘사가 수두룩했다.

예전이었다면 마치 남의 사랑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조금 흥미롭게 여기다 말았을 것이다. 그녀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금방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겠지. 그러나 본의 아니게 그와 얽히고 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리브는 호수의 수면을 가만히 응시했다. 햇살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푸른빛을 보고 있자니 치명적으로 아름답던 사내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떠도는 소문들이 전부 진실일 리는 없다. 대체로 사람의 입을 거치는 이야기란 살이 붙고, 종내에는 원형을 알아보지 못할 지경으로 망가지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맞는 소리였다.

‘오만하고 냉담한 남자.’

그 아름다운 얼굴은 무슨 짓을 해도 어울릴 테지만, 무표정하다 못해 냉랭한 표정이야말로 제 것인 양 꼭 맞았다.

아마도 평생 미소라고는 지어 본 적도 없지 않을까?

리브는 아직도 자신이 그와 얽혔다는 게 믿기지 않아 때때로 꿈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평생 얼굴이나 한번 보면 신기할 상대가 아닌가.

그녀와는 사는 곳도, 어울리는 사람도, 하다못해 사용하는 어휘조차 접점이 없을 남자였다.

누군가는 그처럼 드높고 고고한 남자와 어떤 식으로든 인연이 생겼다는 사실에 기뻐할지 모르겠으나, 리브는 소화하지도 못할 음식을 먹은 것처럼 속이 더부룩하기만 했다.

‘차라리 작업을 빨리 시작하고 빨리 끝내 버리면 좋겠어.’

후작의 참관이 확정되었기에 그들의 작업 일정은 전적으로 후작의 일정에 맞추어 조정되었다. 후작이 브레드에게 무어라고 말을 전해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리브가 브레드를 찾아갔을 때 그는 일의 전말을 모두 알고 있었다. 리브와 달리 브레드는 무척 들뜬 눈치였다.

“잘 하면 나도 엄청난 후원자를 얻게 될 거야!”

심지어 브레드는 터무니없는 망상까지 하고 있었다. 리브가 보기에는 전혀 가망성이 없는 바람인데, 그는 진지하게 후작이 본인의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님, 그거 아세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던 리브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을 빛내며 저를 바라보는 밀리언에게 습관적인 미소를 지어 주며, 리브는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애써 노력했다.

리브에게서 별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밀리언은 한껏 목소리를 낮추며 엄청난 비밀 이야기를 건네는 것처럼 속삭였다.

“디트리언 후작님의 저택 지하에 엄청난 게 있대요.”

“저택 지하에?”

“네. 후작님이 미술품을 아주 좋아하시잖아요? 그런데 사실 진짜로 수집하는 건 살아 있던 생물로 만든 박제품이라는 거예요!”

밀리언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디트리언 후작을 세기의 왕자님처럼 묘사하더니, 이번에는 무시무시한 괴물로 만들고 있었다. 그 변화가 조금은 우스워서, 리브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야말로 전혀 진지하게 듣지 않고 있는 리브의 태도에도 밀리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디트리언 후작님이 장교 출신이라는 거 아세요? 그래서 살생에 아주 익숙하시대요. 동물뿐만이 아니라 사람도요!”

후작이 장교 출신이라는 건 확인되지 않은 정보였다. 단지 후작을 비교적 자주 보았다는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보며 추측한 내용이었는데, 후작과도 아주 잘 어울려서 어느 순간 기정사실처럼 퍼진 정보였다.

누구 하나 진위를 확인할 수 없으니 암암리에 그런가 보지, 하고 무책임하게 떠드는 그런 소리.

“음….”

그보다 살생이라니. 리브는 그녀가 보았던 디트리언 후작을 떠올렸다. 차갑고 냉정한 얼굴로 누군가를 죽이는 후작이라니, 일견 그럴듯했다.

“진짜 사람을 박제해서 전시해 둔 방이 저택 지하에 숨겨져 있다지 뭐예요.”

어둡고 음침한 지하실과 스산한 공기, 투명한 유리관 속 나체 사람의 박제까지.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실감 나게 묘사하는 밀리언의 모습에 리브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밀리언에게 이런 이야기꾼의 재능이 있을 줄이야. 당장 극단에 취업해도 손색이 없을 실력이었다.

남작가의 외동딸인 밀리언이 그런 광대 짓 같은 취업 전선에 뛰어들 까닭은 전혀 없으니, 결국 이는 모두 리브의 헛된 상상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차라리 리브 자신에게 저런 재주가 있었다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극단은 소수의 상류층 사람들이 보기에 우스꽝스러운 광대 집합소에 불과하지만 많은 시민에게는 대중적으로 각광 받는 집단이었다.

상류층의 명예는 얻지 못해도 시민들의 입장료만으로 큰 수익을 보고 있는 사업이니만큼, 관련한 재주가 있다면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소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리브는 부질없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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