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한 눈동자 속 어디에서도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를 마주 보던 리브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림을, 받으셨다고.”
“그림은 추측의 증거가 될 수는 있겠으나 확신의 증거는 아니지.”
후작의 반박은 매끄럽고도 태연했다.
“선생의 연관성을 증명할 다른 방도라도?”
“브레드가 증인입니다.”
“둘이 짜고 나를 속이려는 줄 어찌 알고? 듣자 하니 모델은 자기 신원을 들키고 싶지 않아 했다던데.”
이 도시의 어느 누가 감히 디트리언 후작을 속이는 간 큰 짓을 하겠나.
그러나 그런 말로는 후작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후작은 리브가 모델이라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게 틀림없으니. 어쩌면 모른 척해 줄 테니 그림을 포기하라고 우회적으로 말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떻게 그냥 둘 수 있겠는가. 그녀가 누드모델을 했다는 증거가 버젓이 남의 집 벽에 걸리게 된 상황에서.
행여 펜던스 남작 부인이 이곳을 방문하기라도 한다면. 혹은 다른 누구라도 방문했다가 그 그림을 보기라도 한다면.
추천서도 받지 못하고 잘릴 때 누드모델을 했다더라는 소문까지 난다면.
“…뒷모습을 보시면, 동일인이라는 걸 알아보실 거예요.”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속삭임과 다를 바 없는 음성이 가냘프게 흘러나왔다.
“이거면 될까요?”
후작은 답 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기만 했다. 그리고 리브는, 그의 침묵 속에서 무언의 허락을 읽어 냈다.
***
창문마다 꼼꼼하게 커튼이 쳐져 있다고는 하나, 넓고 화려한 남의 집 응접실에서 옷을 벗는 일은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다.
소파에 앉아 무료한 표정으로 턱을 괸 후작을 힐끗 확인한 리브가 등을 돌렸다. 떨리는 손끝은 앞섶을 꼼꼼히 당겨 잠근 단추를 몇 번이나 미끄러지듯 놓쳤다.
주먹을 몇 번이나 쥐락펴락한 뒤에야 제대로 단추를 풀 수 있었다. 앞섶이 벌어지고 상의가 헐렁하게 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옷을 많이 껴입지 않은 터라 금세 맨살이 공기에 노출되었다.
응접실이 추운 건 아니지만 괜히 서늘한 느낌이 들어서, 리브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상의 단추는 다 풀었으니 이대로 손을 놓기만 하면 그대로 흘러내릴 터였다.
그나마 옷을 전부 벗지 않아도 될 거라는 점이 다행스러웠다. 앉아 있는 뒷모습이었으니 상의만 벗어서 보여 주면 알아볼 것이다. 심호흡한 리브가 조심스럽게 옷을 끌어 내렸다.
앞모습은 보는 사람 하나 없는데 괜히 의식이 되어서 팔로 가슴을 가리고 서 있는데, 뒤에서 무감한 음성이 들렸다.
“자세.”
그림과 같은 포즈를 취하라는 건가?
잠깐 주저하던 리브가 올려 묶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머리끈을 살짝 당기자 풍성한 적갈색 머리카락은 금방이라도 등허리로 쏟아져 내릴 듯 느슨해졌다.
리브는 기억 속에 남은 브레드의 요청을 더듬었다. 그때는 앉아 있었고 지금은 서 있으니 완전히 같은 포즈를 취할 수는 없었으나, 이 정도면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작의 눈에는 아직도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받은 그림과는 다른 자세인데.”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려던 리브가 문득 말을 멈추었다. 생각해 보니 후작이 받았을 그림에서 다른 부분이 있긴 했으니까.
수치심에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지만, 리브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는 것으로 감정을 억눌렀다. 수치심은 잠깐이지만 이걸로 후작을 설득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리브가 어깨에 턱을 묻으며 반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후작의 얼굴에 조롱의 기색이 서려 있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그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차가운 벽안은 여자의 나체를 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감했다.
그는 정말로 그녀가 그림 속 모델인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걸 깨닫게 되자 기묘하게도 치솟던 수치심이 가라앉았다. 흔들리던 녹색 눈동자도 한결 안정적으로 가라앉았다. 리브는 후작의 시선을 물끄러미 마주했다.
잘록한 허리선에서부터 천천히 등줄기를 따라 올라간 눈길은 매끄러운 어깨와 팔,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칼에 이르렀다. 이내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파고든 손가락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와, 덤덤한 녹색 눈동자와 곧은 콧대, 다물린 입술과 어깨에 가려진 턱까지. 그런 뒤에 다시 눈동자로.
눈이 마주치자 일자로 닫혀 있던 후작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이만 입어도 좋아.”
그 말에 힘이 풀려서 팔을 내리다가 그만 머리끈이 손가락에 걸려 흘러내렸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등허리로 쏟아졌다. 떨어진 머리끈을 힐끗 본 후작이 몸을 일으켰다.
“옷을 다 입으면 테이블의 종을 울리도록. 하인이 내 집무실로 안내해 줄 테니.”
응접실 문이 닫히고, 홀로 남겨지고서야 리브는 자신이 숨도 제대로 쉬고 있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맨살에 닿는 공기가 더는 서늘하지 않았다.
***
리브가 저택을 나올 즈음엔 이미 해가 다 저문 시간이었다.
처음에 응접실에서 리브를 상대했던 중년 남성은 자신을 관리자 몬테라고 소개했다. 단순히 건물만 돌보는 게 아니라, 그 속의 모든 미술품을 관리하는 게 그의 업무였다.
저택은 후작이 수집하는 미술품을 보관하는 개인 전시관이었다. ‘전시관 중 하나’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이와 비슷한 건물이 몇 채는 더 있는 눈치였다. 몬테는 이곳이 그중 가장 큰 전시관이고 손님이 원한다면 둘러보는 걸 허락하셨다며 후작의 친절한 권유를 전해 주었다. 물론 리브는 거절하고 곧장 떠날 의사를 밝혔다.
마음 같아선 몬테가 불러 준다는 마차를 타고 싶었다. 후작과의 면담으로 잔뜩 지친 와중에 집까지의 먼 거리를 걸어가려니 아득해진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고작 몇십 분의 안락함을 위해 지불할 삯비를 생각하니 바닥을 보였던 기력이 조금이나마 되살아났다. 집에 도착하자 그야말로 진력이 다 빠져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최악은 면했다. 리브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느리게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그녀는 후작과 나눈 대화를 회상했다.
“어차피 그림값은 가져오지 못할 테고.”
그의 목소리에 화난 기색은 없었다. 건조하고 무감하기만 했는데, 그게 도리어 리브에겐 큰 질책으로 다가왔다.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후작의 안색을 살피던 리브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여유 시일을 조금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시일을 얻어 봐야 무슨 수로 돈을 구하겠나. 선생은 물론이고 그 화가의 사정도 딱히 넉넉하진 않은 모양이던데.”
애써 조사해 볼 필요도 없이, 차림만 조금 살피면 금방 알아챌 수 있는 사정이리라.
리브는 괜히 뜨끔한 마음에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기가 죽어 슬그머니 내린 시야에, 거리의 온갖 진흙과 오물로 얼룩덜룩해진 구두코가 보였다. 집무실 카펫을 밟고 서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깨끗하던 카펫 위에는 이미 더러운 흔적이 잔뜩 남았을 것이다.
“소모적인 대화는 생략하도록 하지. 나는 그림을 원해.”
“그 그림은 제발….”
“모델의 얼굴이 나오지 않은 그림을 다시 그리면 될 일 아닌가.”
리브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후작은 여전히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읽느라 그녀에겐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거면… 괜찮으신가요?”
“다른 작품을 가져온다면, 내가 받은 그림은 선생에게 주도록 하지.”
기껏해야 약간의 시일을 얻고 돈을 도로 반납하는 방안이나 생각하고 있던 리브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다른 그림이라니. 얼굴이 나온 그림을 받아서 없애 버릴 수만 있다면 등이야 얼마든지 더 노출할 수 있었다.
“당장 브레드에게 전하겠습니다! 가능할 겁니다. 최대한 빨리 작업해서….”
“대신 조건이 있는데.”
횡설수설하는 리브의 말을 끊으며, 후작이 느리게 말을 이었다.
“작업 과정을 참관하고 싶군.”
“작업 과정을…?”
“물론 나 홀로.”
작업 과정이라면 그림 그리는 과정일 테지. 그는 브레드가 리브를 그릴 때 동석하겠노라 말하는 것이다.
“받아들일 수 있겠나?”
후작이 힐긋 눈을 들어 리브를 보았다.
여기서 거절하면 가까스로 얻은 후작의 자비는 곧장 신기루처럼 사라지겠지. 머뭇거리던 리브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조건은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종류였다. 몇 시간 동안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을 리브의 모습이나 지독한 물감 냄새를 풍기는 브레드의 작업은 그의 흥미를 채 한 시간도 충족시키지 못하리라. 그러나 리브는 지루하실 거라든가, 왜 그런 조건을 붙이느냐 말하지 못했다.
기실 그녀의 의견을 묻는 자리가 아니었다.
리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작업실은 이쪽에서 따로 제공하지. 다음 주부터 시작하도록.”
마찬가지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려던 리브가 불현듯 다급하게 말문을 열었다.
“아, 브레드에게도 이야기를 해 봐야 하는데.”
브레드가 일방적으로 계약을 어긴 건 사실이지만, 결국 후작의 조건을 받아들이려면 브레드의 협조가 필요했다.
리브의 말에 후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상체를 곧게 세워 등받이에 살짝 기댄 그가 팔걸이에 손을 올렸다. 흰 장갑을 낀 손끝이 일정한 박자로 가죽을 톡톡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