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6)화 (6/138)

그냥 그림을 줘 버리자. 브레드의 말대로 모델이 누군지 못 알아볼 거야.

하지만 만약에 알아보면?

설사 눈썰미가 좋아서 그림만으로도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구매자라고 해도 마주치지 않으면 돼. 펜던스 남작가의 가정 교사 따위가 상류 사람들을 만날 일이 뭐가 있겠어?

그러다 펜던스 남작 부인이 그림을 보기라도 하면?

아, 신원을 함구해 준다고 했으니 차라리 직접 가서 사정을 설명할까? 그러면 만회할 수 있을까?

과연 누드화를 산 사람이 그렇게나 사려 깊은 사람일까?

그런 고민을 하다가 그만 저녁이 되고 말았다. 끝내 리브는 이도 저도 못 한 채 하루를 날리고 말았다. 브레드에게 따로 연락이 오거나 일이 생기면 즉시 알려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소식이 없었다.

이대로 넘어갈 리가 없는데….

다음 날은 밀리언의 수업 때문에 펜던스 남작가에 출근하느라 시간을 내지 못했다. 3일째가 되었고, 월세로 성화를 부리는 포멜과 실랑이를 벌이다 말고 코리다의 상태가 안 좋아져 정신없이 의사를 찾다가 또 하루를 보냈다.

그리하여 나흘. 주소가 적힌 쪽지는 내내 그녀의 주머니에 있었고 몇 번이나 폈다가 접은 바람에 구깃구깃해져 있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당장 돈을 구할 수 없었다. 하도 들여다봐서 외워 버린 주소를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리브는 집을 나섰다. 그러나 발길은 주소지 대신 예배당으로 이어졌다.

오늘따라 예배당 주변엔 누구 하나 보이지 않았다. 우두커니 예배당을 응시하던 리브가 힘껏 문을 열었다.

예배당 안은 언제나처럼 한적했다. 딱 한 사람, 누군가 앞쪽 의자에 앉아 기도하는 게 보였지만 그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리브는 평소 늘 앉던 가운데 대신 뒤쪽에 조용히 자리했다. 단 며칠 만에 너덜너덜하게 변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받고 싶었다.

짧게 기도하고 진짜로 주소지를 찾아가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리브가 두 손을 모았다. 꾹 깨문 어금니 탓에 턱에 힘이 들어갔다.

부모님이 마차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을 때도, 당장 죽을 것처럼 힘들었지만 결국 견뎌 냈다. 처음으로 입주 가정 교사를 할 때도, 백작가에서 모욕을 받을 때도, 그 이후에도 끝내 잘 견디고 이겨 냈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잘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분명 방도가 생길 거야.

좋아, 가서 이야기하자. 신원을 숨겨 주겠다고 했으니까 직접 가서 거래를 일방적으로 깬 경위를 설명하고, 사죄하고, 사정을 이해해 달라고 부탁하면 된다. 혹 손해 입은 비용을 문제 삼는다면 나눠서 꼭 갚겠다고 말하면 된다. 지금 하는 일만 잘리지 않도록 수습하자.

뚜벅뚜벅.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정리되던 생각이 일시에 흐트러졌다. 텅 빈 예배당을 울리는 구둣발 소리가 귀에 익었다. 가지런히 감겨 있던 리브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한번 깨진 집중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자연히 신경은 발소리로 옮겨 갔다.

어딘가 귀에 익은,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각 잡힌 소리.

리브가 홀린 듯 눈을 떴다.

앞자리에서 기도하는 줄 알았던 사람이 어느새 걸음을 옮겨 신상을 가리고 서 있었다. 우두커니 선 그의 위로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쏟아졌다. 환한 빛줄기 속 먼지가 마치 신비로운 연기처럼 날렸고 백금발은 오묘한 빛으로 반짝였다.

맨 뒤에 앉은 덕분에 한눈에 그 모든 장면을 한눈에 담게 된 리브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신상을 올려다보던 그가 눈빛을 알아챈 듯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느낀 순간, 리브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거리는 멀어. 맨 앞과 맨 뒤인데, 당연히 못 알아봤을 거야. 눈도 마주쳤을 리 없어.

애써 마음을 달래 보았으나 이미 심장은 무섭게 속도를 높여 뛰고 있었다. 핏기가 사라졌을 안색을 숨기고자 눈을 감고 깍지낀 손에 이마를 붙였다.

구두 소리가 들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가까워지던 소리가 그녀의 근처에서 멈추었다.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순간, 머리 위로 냉담한 음성이 들렸다.

“선생이라기엔 인사 예절이 부족하군.”

오, 신이시여. 도대체 제가 뭘 잘못한 건가요?

애꿎은 신을 부르짖으며, 리브가 천천히 눈을 떴다.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고 시선을 들자 새파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뒷짐을 지고 서서 그녀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이는 틀림없는 디트리언 후작이었다.

왜 하필 그 많은 예배당 중 여길 찾아온 거지? 남들은 얼굴 한번 보기 힘들다는 사람을 벌써 세 번이나 마주치다니.

“시간은 나흘이면 충분했던 것 같은데.”

리브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당연히 조금 전 모른 척하려던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흘이라니? 그러나 디트리언 후작은 더 설명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힐끗 본 그가 더 말을 섞기 싫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런 후작의 뒷모습을 보던 리브는 불현듯 나흘 전의 일을 떠올렸다.

누드화, 브레드, 하인, 주소.

“설마…!”

목덜미의 솜털이 오스스 솟았다. 뒤늦게 벌떡 일어나 예배당 바깥으로 뛰쳐나가니 후작은 이미 마차에 오르고 있었다. 새까만 사륜마차에 오른 후작이 창밖으로 뒤쫓아 온 리브를 얼핏 발견한 것도 같았으나, 그뿐이었다.

흙먼지를 날리며 매몰차게 출발해 버리는 마차를 리브가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착각일 거야.

리브는 주머니에 들어 있는 꼬깃꼬깃한 종이를 꺼냈다. 주소를 확인하자 뜨거운 숯을 통째로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목구멍이 오그라들었다. 그녀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이건 악몽이야. 아주 화려하고 생생하지만 끔찍한 악몽.

그렇게 생각하며 리브는 불안한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눈 닿는 곳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사치품이 가득했다. 벽에는 그림이 걸려 있고 간격마다 조각품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외관은 평범해 보였는데 내부는 그야말로 작은 미술관이나 다름없었다. 예술품에 별다른 조예가 없는 리브가 봐도 범상찮으니 분명 이곳의 주인은 수집가가 분명했다. 이만한 규모의 공간을 채울 정도로 많은 작품을 수집할 수 있는 재력이라면 보통 자산가가 아닐 테고.

“죄송하지만 주인님께서는 다른 일로 바쁘셔서, 제게 말씀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크고 화려한 응접실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기다린 게 무색하게도 주인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아마도 사용인으로 짐작되는 중년 남자가 들어와 리브의 가까운 곳에 섰다.

빳빳하게 각을 세운 사용인의 옷차림을 힐끔 본 리브가 슬쩍 시선을 내렸다.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흙먼지와 얼룩으로 온통 더러워진 치맛단이 보이자 괜히 움츠러들었다.

작게 심호흡한 리브가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먼저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너무 늦게 와서 아마 심기가 많이 어지러우실 듯합니다. 사정이 있어서 곧장 찾아오지 못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손님. 저는 해당 상황을 알지 못합니다. 말을 전달해 드릴 뿐이지요.”

“그럼 제일 먼저 이렇게 전해 주세요. 제가 무척 송구하게 여기고 있노라고.”

리브의 말이 퍽 절박한 까닭인지, 사용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다시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쉰 리브가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이 댁 주인께서 나흘 전 구매하신 그림을 판매하기 어렵다는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당시 판매 불가에 관한 사유를, 그림 모델에게 직접 듣고 싶다 하셔서 제가 왔고요. 그 그림에는 합의되지 않은 내용이 그려져 있어서 부득이하게 이런 무례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림값은… 이 자리에서 전액을 돌려드리긴 어렵겠지만, 어떻게든 손해 보지 않으시도록 힘쓰겠습니다. 그러니까….”

말을 이을수록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힘겹게 말을 이어 가는데, 돌연 냉랭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어떻게 힘쓸 생각인가?”

사용인이 당장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오는 내내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장면이라서일까? 차갑게 자신을 응시하는 디트리언 후작을 진짜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버틸 만했다.

물론 그게 여유롭게 상대할 담력이 생겼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적어도 앞선 만남 때처럼 고양이 앞의 쥐가 되어 버리진 않았다는 의미였다.

엉거주춤 일어난 리브가 다급하게 말했다.

“시, 시간을 주신다면 브레드와….”

“화가가 그림을 가져왔네.”

리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후작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거래는 종료됐지.”

그러지 않아도 창백하던 리브의 얼굴에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브레드 이 인간이 기어코!

“그 그림은 계약 위반이었습니다.”

“모델과 화가 간의 분쟁은 구매자가 배려해 줄 문제가 아니군.”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심지어 이미 그림을 받은 상황이라면 더욱. 하지만 리브는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그림이 후작의 손에 떨어졌고, 후작은 펜던스 남작가에 드나들 정도의 친분이 있는 존재이며, 리브가 그 펜던스 남작가의 가정 교사라는 걸 후작이 아는 이상.

“판매 거절 사유를 모델에게 직접 듣겠다고 말씀하신 건, 배려해 주겠다는 의향을 내비치신 게 아니셨나요?”

“그랬지. 당일 찾아온 건 모델이 아니라 화가였고.”

심지어 당일에 그림을 넘겼어? 브레드, 이 나쁜 인간 같으니!

“설사 이제 와 편의를 고려해 준다고 해도….”

느리게 응접실 안으로 걸어 들어온 후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모델과 대화하길 바랐고, 내가 신원을 지켜 주기로 한 대상 또한 모델인데 선생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요청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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