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5)화 (5/138)

“사실 펜던스 남작 부인이 추가로 소소한 업무를 봐 달라고 하셨어. 업무 날짜가 확실히 정해지면 말해 주려고 했는데 네가 걱정하는 것 같으니 지금 말하는 거야.”

“진짜?”

“그래. 그러니까 이건 안 팔아도 돼.”

빙긋 미소 지으며 리브가 코리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코리다는 그런 리브를 미심쩍은 눈으로 보았으나, 그녀가 진위를 알아낼 재간은 없었다.

태연하게 표정을 꾸민 리브가 일부러 더 부산스러운 몸짓으로 몸을 돌렸다.

“자, 기분 전환할 겸 맛있는 거 먹자! 오늘은 언니가 솜씨 좀 보여 주지!”

코리다는 한참 오르골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곁눈질로 살피던 리브는 코리다의 표정이 한결 풀어진 걸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달 생활비는 코리다가 잠들고 난 뒤에 계산해 봐야지.

***

보통 모델 일은 브레드가 요청하고 리브가 응하는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당장 처지가 급해진 리브는 별수 없이 브레드를 먼저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후드를 최대한 눌러쓴 리브가 바쁘게 계단을 올랐다. 몇 번이나 뒤를 확인한 그녀가 조심스럽게 작업실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났다.

“예, 들어오세요!”

혹시 없으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다행히도 안에 있던 모양이다. 리브가 반색하며 문을 열었다.

일전에 나던 산뜻한 향기는 전부 착각이었던 양 내부는 물감 냄새로 꽉 차 있었다. 바닥이며 주변이며 제대로 청소하지 않아 엉망이었고, 빈 물감통 몇 개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리브?”

흰 천으로 가린 캔버스 앞에 서 있던 브레드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리브를 보았다. 그는 방문객이 리브라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당황한 얼굴이었다.

“어쩐 일이야?”

“브레드, 부탁이 있어서….”

초조하게 맞잡은 손을 문지르던 리브가 멈칫했다. 브레드의 태도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캔버스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뒤에 그건 그림인가 봐요.”

“어? 으응.”

“완성된 누드화군요?”

“뭐, 그렇지.”

이따금 그는 자랑하듯 완성된 그림을 보여 주었다. 제 작품을 자랑하려는 의도이면서 자신이 약속을 지켰다는 걸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의 그는 유난히 그림을 가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너무나 수상쩍게도.

“…봐도 되죠?”

넌지시 묻자 브레드가 애써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했다.

“미안해서 어쩌지, 이미 팔려서. 함, 함부로 보여 주기가….”

딴청을 피우느라 그는 리브의 재빠른 행동에 뒤늦게 반응하고 말았다.

“리브, 잠깐…!”

잡아챈 흰색 천이 손쉽게 끌어 내려지고, 마침내 캔버스를 가득 채운 그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브레드가 얼른 나무 이젤 앞을 가로막았지만, 리브는 이미 완성된 누드화를 확인한 뒤였다.

“브레드!”

리브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졌다. 땀을 뻘뻘 흘리며, 브레드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이건. 내가 설명할게.”

“얼굴은 안 나오게 그린다고 약속했잖아요!”

등을 지고 앉았으나 반쯤 고개를 돌린 여성.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뒤를 돌아보는 전라의 여성은 틀림없는 리브였다.

“그, 그래서 조금 다르게 그렸잖아. 게다가 옆얼굴 실루엣만 살짝 드러난 거라서 아무도 모를 거라고.”

숨기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브레드가 황급히 그림 속 옆얼굴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목구비가 조금 다르다는 둥, 눈동자 색을 바꾸었다는 둥 형편없는 변명이 이어졌다.

새하얗게 질린 눈으로 브레드를 응시하던 리브가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그래도 싫어요!”

“리브, 이미 돈도 받았잖아.”

“코리다가 곧 생일이라며?”

“설마 그때 생일 선물 사 주라고 얹어 줬던 돈…!”

평소답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웃돈을 나눈 거였나. 리브가 입술을 내리 물었다. 코리다의 생일 선물에 정신이 팔려서 돈의 출처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제 탓이었다.

“그, 그것뿐만이 아니야. 완성작을 넘기면 추가금을 준다고 했어. 당연히 네 몫도 있을 거야. 옆모습이 살짝 드러난 것만으로 예전의 두 배를 받을 수 있어!”

“이건 계약 위반이에요. 난 이런 작업에 동의한 적 없다고요.”

“그럼 받은 돈을 다 돌려줘야 해. 그럴 수 있어?”

“돈은…!”

말머리는 기세 좋게 튀어나왔으나 그 힘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모델료를 돌려주기 이전에 계약 위반으로 브레드를 고발한다면 그림값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진 않으리라. 하지만 그러려면 이 그림의 모델이 자신이라는 걸 치안 판사에게 고백해야 한다. 어쩌면 다른 경관들 앞에서 이야기해야 할 수도 있고.

누드모델을 했던 여성에게 자기 아이의 교육을 맡길 부모가 과연 이 도시에 있을까?

제아무리 상냥한 펜던스 남작 부인이라고 해도 이를 아는 순간 당장 해고장을 내밀 테지.

브레드를 고발할 수 없다면 그녀는 받은 모델료를 전부 돌려줘서라도 이 누드화의 판매를 막아야 했다. 당장 전액을 돌려주지는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마련해서 돌려줄 테니까, 당장 못 판다고 연락해요.”

“하지만 리브….”

그들의 대화는 이어지지 못했다.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린 탓이었다. 리브가 황급히 캔버스를 다시 천으로 가렸다. 그러는 사이 브레드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깔끔한 고용인 제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리브는 본능적으로 저 남자가 이 그림을 샀다는 사람의 하인임을 알아보았다.

“주문한 물건 찾으러 왔습니다.”

“죄송하지만 팔 수 없어요.”

브레드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리브가 얼른 말했다.

“모델과 합의된 그림이 아니어서요.”

그녀의 말에 하인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곧 브레드를 돌아보며 무감하게 말했다.

“전 주인님이 시키신 대로 그림을 받으러 온 겁니다. 이외의 사안은 제가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구와 이야기해야 하나요? 지금 당장 그림을 드릴 수 없는데요.”

리브가 재차 대답했으나, 하인의 시선은 브레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브레드 씨, 오늘 찾으러 오면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주인님께서는 지금 마차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 예에…. 그게, 그랬습니다만….”

눈을 굴리며 리브와 하인의 눈치를 보던 브레드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모, 모델과 합의를 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해서, 며칠만 말미를 주시면….”

“브레드!”

놀란 리브가 다시 브레드의 말을 정정하려는데, 하인이 먼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주인님께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리브가 망연자실한 눈으로 돌아서는 하인을 응시했다. 브레드는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손수건으로 연신 닦으면서도 어떻게든 리브를 설득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리브의 귀에 브레드의 말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림을 못 가져가게 우격다짐으로 막기는 했는데, 막상 그러고 나니 모델료를 반납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아득했다.

지금 수중에 남은 돈이 얼마 있더라?

전부 끌어모아도 한참 모자랄 텐데. 바느질거리라도 찾아 헤매는 수밖에 없나?

하지만 그러면 이달 월세 추가금은 어쩌지?

“그러지 말고, 리브! 그냥… 아, 아이고. 어쩐 일로 다시 오셨습니까!”

혼란스러움과 막막함에 휩싸여 우두커니 서 있던 리브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등을 돌렸던 하인이 도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주인님께서는 직접 만나서 듣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었나. 직접 그림을 받으러 행차했는데 예정이 어그러져 화가 난 모양이었다. 리브의 얼굴에 착잡함과 절망감이 깃들었다.

하인이 말하는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보통 그림의 구매층이 상류 부유층이라는 걸 고려하면 아마 그 또한 그러하리라. 행여 화가 나 어떤 방법으로든 책임을 물어 오면 꼼짝없이 엎드려야 할 테지.

브레드 역시 상대가 화났으리라 짐작했는지, 새파랗게 목이 졸린 얼굴로 얼른 외투를 집어 들었다.

“아, 예! 지금 당장….”

“아니, 브레드 씨 말고요.”

무뚝뚝하게 말을 끊은 하인이 리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모델에게 거절 사유를 듣고 싶다 하셨습니다. 물론 작품의 특성상 모델의 신원은 함구해 주겠다는 말씀도 덧붙이셨고요. 가능하겠습니까?”

리브의 어깨가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얼어붙어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리브를 대신해 브레드가 어색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모, 모델이 모습을 드러내길 원치 않아서….”

하인이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신경한 목소리는 슬슬 이 상황을 귀찮게 여기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게 불가하다면 그림값을 당장 돌려주면 되겠군요. 아니면 본래 예정했던 대로 그림을 주든가.”

그림은 안 돼.

뇌리에 번뜩이는 생각이 굳었던 혀를 움직였다.

“그림값이 얼마였죠?”

“잠깐!”

브레드가 다급하게 리브의 팔을 잡아챘다. 그녀를 한쪽 구석으로 끌어당긴 브레드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속삭였다.

“난 당장 돈이 없어. 이미 다 써 버렸다고.”

“뭐라고요?”

“급하게 쓸 곳이 있어서….”

“또 도박했어요?”

우물쭈물하는 브레드의 반응을 보니 더 듣지 않아도 상황이 훤했다. 리브는 기가 막힌 얼굴로 브레드를 보다가 하인을 슬그머니 돌아보았다. 그는 지금 당장 돈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는 듯, 덤덤하게 쪽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더는 주인님을 기다리시게 할 수 없습니다. 방문은 저녁 전에 하십시오.”

하인은 이번에야말로 진짜 떠났다. 그리고 리브는 망연하게 서서 한참이나 하인이 두고 간 쪽지를 내려다보아야 했다.

어딘지 모를 주소만 달랑 적혀 있는 쪽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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