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화 (1/138)

사내는 긴 다리를 꼬아 앉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하얀 장갑에 휘감긴 손끝이 일정한 박자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수려한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생기는 것을 예리하게 알아챈 관장이 손짓하자 사내의 앞에 걸려 있던 액자가 직원들에 의해 신속하게 치워졌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듯, 그들은 재빠르게 다음 액자를 벽에 걸었다.

푸른 눈동자가 그림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을 확인한 관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이 화가는 요즘 주목받고 있는 신예로서, 최근 아카데미 미술전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으며 입상했습니다.”

관장이 준비한 것 중 가장 회심의 작품이었다. 이전의 작품들은 이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하다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빛을 잘 활용하지요. 앞선 화가들보다 월등히 감각적입니다.”

물론 예술가의 혼이 깃든 작품들을 이런 식으로 취급하는 건 관장의 신념에 어긋났다.

이곳은 부에르노에서 가장 큰 미술 전시관 로이븐이었고, 그는 로이븐의 관장이었다. 관장이라는 직함을 제외하고서라도 그, 아론은 대대로 예술에 조예가 깊은 가문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예술 작품을 사랑하고,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다만 아론이 상대하고 있는 이 손님이 너무 거물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평소 신화적 장면을 차용하여 주제 의식을 표현하는 화가입니다. 이 작품 속 인물 또한, 물론 알아보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사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백금발의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그 움직임을 따라 몇 가닥 흐트러졌다.

그림 속 풍만하고 흰 살결을 눈으로 천천히 훑어보던 사내가 붉은 입술을 느리게 달싹였다.

“달의 여신인가.”

“그렇습니다. 닿을 수 없는 신성에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투영하여….”

“상투적이군.”

수십 작품을 지나친 끝에 겨우 열린 입술이었다. 그러나 흘러나온 것은 냉소적인 감상평이 전부였다.

이번에야말로 사내의 눈높이에 부합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아론이 탄식을 억누르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가장 자신했던 작품마저 맥없이 치우게 되자 여간 속이 쓰린 게 아니었다.

이 작업은 단지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론 스스로 예술 작품을 감정하는 능력을 시험해 보는 자리에 가까웠다. 사내의 까다롭고 독특한 취향은 승부욕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누드 작품만 찾는 저, 디트리언 후작의 올곧고 기이한 취향은 말이다.

“죄송합니다. 오늘도 제가 후작님의 마음에 차는 작품을 찾아내지 못한 모양입니다.”

디트리언 후작은 미술품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알아주는 수집가였다. 주기적으로 예술품을 구매하는 그는 아론에게 절대 놓칠 수 없는 큰손이었는데, 특이하게도 작품의 주제에 중점을 둔 수집가였다.

후작은 구매할 때 장래가 촉망된다거나 이미 명성이 높은 예술가의 작품이라는 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가 중요하게 보는 점은 단 하나였다.

작품의 주제, 누드.

아론이 아쉬움을 삼키며 직원들에게 눈짓했다.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별개로, 확인한 누드 작품은 전부 구매하는 후작이었다. 오늘 본 누드화들 역시 그럴 것이다.

“저것은?”

자리를 정리하려는데, 후작이 문득 아론의 뒤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아론은 그제야 자신이 한 작품을 빼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 뒤편을 확인한 아론이 난처하게 입술을 다물었다.

“저 작품은….”

저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일종의 구색 맞추기 용이었다.

모든 예술 작품을 사랑하는 아론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수준에 맞는 작품일 경우에 한해서였다. 그리고 저것은….

“앞선 작품들에 비해 화풍이 다소 거칠어서, 오히려 보시기 불쾌하실 수 있습니다.”

수준 낮은 예술품은 이따금 애호가들의 분노를 자아내기도 한다.

아론이 보기에 저 작품이 그러했다. 누드화를 닥치는 대로 모으는 과정에서 우연히 손에 넣었지만 다른 작품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실력의 작품이었다. 아마 디트리언 후작이 아니고서는 구매해 줄 사람도 찾지 못할 작품이지만 차마 꺼내 놓기가 민망했다.

그러나 이러한 아론의 태도가 도리어 후작의 흥미를 자극한 듯했다. 후작이 아론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걸어.”

마지못해 아론이 직원들에게 명령했다. 눈치를 보던 직원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넓고 깨끗한 벽에 덩그러니 걸린 그림은, 이제까지 걸린 다른 것들과 달리 다소 초라해 보였다.

그것은 단지 화가의 미숙한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초라함은 저 그림 속에 헐벗은 여성에게서 기인하고 있었다.

여성은 벌거벗은 등을 내보인 채 반듯하게 서 있었다. 살짝 수그린 고개와 앞으로 모은 팔, 딱 붙은 두 다리는 그야말로 황야에 우두커니 선 나무토막처럼 보였다.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여성의 자세는 보는 이로 하여금 미묘한 불편함을 주었다. 몸매가 훌륭해 보이기는 하나, 단지 그것만으로는 좋은 모델이라 칭할 수 없으리라.

다시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림 속 여성은 지나치게 뻣뻣하고 어색했다. 그녀의 몸에서는 어떠한 아름다움도, 예술적 가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쯧.’

아론은 후작이 금방 흥미를 잃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보는 순간 눈살을 찌푸리고, 평가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릴 것이라고.

그러나 예상외로 후작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그림 속 여성의 초라한 뒷모습을 응시할 뿐.

“후작님?”

아론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후작은 대답하는 대신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의자 옆에 기대 두었던 지팡이를 쥔 그가 느리게 구둣발을 내디뎠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그는 그림 앞에 서서 또 한참이나 침묵했다. 후작의 행태는 언제나 이해하기 힘들었다지만, 오늘처럼 영문 모르기는 또 처음이었다.

아론이 불안한 시선으로 후작을 살폈다. 혹시라도 작품이 너무 형편없어서 분노하고 있는 건 아닌가 우려스러웠던 까닭이다. 당장이라도 움켜쥔 지팡이를 휘두르지는 않을까 싶어 한껏 긴장했는데, 다행히도 후작의 얼굴에서 노기는 보이지 않았다. 성정이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그답지 않게도.

한참이 지나서야 후작이 말문을 열었다.

“이 화가.”

“네?”

“이 화가의 이름.”

아론은 조금 전 자신이 들은 것을 믿을 수 없어서 대답하는 것도 잊고 눈을 크게 떴다. 그 어리숙한 반응을 본 후작의 얼굴에 짜증이 깃들었다.

지체했다간 호되게 질책을 들을 것이다. 아론이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르고 대답했다.

“제, 제대로 된 정식 데뷔도 못 한 자라서… 즉시 확인해서 자료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론은 자신의 치명적인 실책에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자의 이름을 물어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준비가 부족했다.

후작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 어디에도 마음에 드는 작품을 찾았을 때 느낄 법한 희열이나, 혹은 기쁨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평소 그러하듯 날카롭고 오만할 따름이었다.

결과적으로 언제나와 같은 날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무명의 화가에 관해 물었다는 점이었으나, 이후 후작은 그 일을 까맣게 잊은 것처럼 굴었으므로 아론 역시 금방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

‘특이해서 눈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역시 다시 보니 영 아니었던 모양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

평소와 다른 공기였다.

늘 독한 물감 냄새가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는데, 오늘은 뜰채로 전부 걷어 낸 듯 깨끗했다. 되레 산뜻한 향기마저 나는 듯했는데, 그것이 도리어 속을 거북하고 매스껍게 만들었다.

진한 녹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손안에 뭉그러뜨리듯 움켜쥔 숄을 괜스레 끌어모은 그녀가 어깨를 조금 더 움츠렸다.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그녀가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조금 힘을 준다 하여 삐걱거릴 일은 없을 텐데, 그녀는 늘 이런 식으로 최대한 가볍게 발을 디뎠다. 단지 걸음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늘 소리를 죽였다. 집을 나서 이 건물에 이르는 내내, 대문을 열고 현관문을 열 때, 3층에 있는 작업실에 다다르기까지. 마침내 어지러운 방 안에 들어서 침대 앞에 설 때까지.

오늘따라 그녀의 움직임은 퍽 더뎠다. 평소보다 더 신중하고 경계심이 넘쳤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성질 급하기 짝이 없는 브레드가 인내심 있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의구심을 더욱 공고히 곤두서게 했다. 오늘의 브레드는 언제나 입던 꼬질꼬질한 작업복 차림도 아니었고, 염료로 엉망진창인 앞치마도 입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지저분한 수염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전부 이상했다.

이 공간에서 그녀에게 익숙한 것이라고는, 이불이 반쯤 흘러내린 낡은 침대뿐이었다.

“어서 벗도록 해.”

끝내 기다림을 참지 못한 브레드가 한마디 했다. 그조차 그답지 않았다. 꾹꾹 억누른 목소리는 그가 지금 얼마나 성질을 억누르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심호흡을 한번 한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숄을 끌어 내렸다.

작업실을 드나든 이래, 굳이 턱 아래까지 단추를 채우는 재킷과 꼼꼼하게 살결을 가린 옷만 골라 입었다. 부질없는 고집이었다. 벗을 때 번거로움만 더하는 작업임을 알면서도 그녀는 부득불 이런 옷을 택했다. 이런 차림을 하면 그녀가 하는 일이 달라지기라도 하는 양. 브레드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 종종 비웃음을 흘렸다.

무의미하게 겹쳐 입었던 천들을 하나하나 거쳐 마침내 낡은 속옷까지 벗은 그녀는 그것들을 차곡차곡 개켜 한쪽에 두었다. 두 팔로 가슴을 감싸며 몸을 일으킨 그녀가 침착하게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 자세에서 머리를 풀 것처럼 두 손을 올려 봐.”

브레드를 등진 채 침대 위에 다리를 접어 앉은 그녀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주문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단정하게 묶여 있던 머리카락이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사이에 얽혀들었다. 느슨하게 늘어진 머리끈 사이로 약간의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곧게 편 등줄기에 유독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단순히 그녀가 나신이라서 쌀쌀함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오늘따라 피부에 닿는 시선이 날카롭게 느껴졌다. 예리한 면도날로 피부의 표면을 살살 긁어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상체는 옆으로 살짝, 아니 너무 많이 움직였어. 응. 그 상태로….”

원하는 요구 조건은 즉각 이야기하던 브레드가 어쩐 일로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물었다.

“진짜로 얼굴 보이는 건 안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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