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옥사건 더 디파일러-583화 (583/599)

vol.15 Oxygan the Close Beta Test

평소라면 서로의 보금자리가 되어주었을 나무와 새들이 사방팔방에서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데 이곳 아나키스트가 있는곳만 무슨 학급회의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뭐 그것도 아이시클의 이글루 형태의 얼음방벽과 에스파이더의 거미줄 그물망의 이중 보호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였지만, 지닌 힘과는 별개로 이 혼돈의 도가니속에서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정신력만은 칭찬할만 했다.

"나한테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탄생석이 능력이 있는건 사실이지만 딱히 아나키스트의 운명을 결정할만큼 지혜로운건 아닌데 말이지. 어느편에 설지 결정하기 전에 부외자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는건 어떨까? 이봐 좀비걸Z, 네가 염라라는 명계의 왕의 특명을 받고 지상으로 올라온 송제시왕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어. 하지만 네가 이 세계의 주민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지. 네가 볼땐 우리 아나키스트가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할 것 같냐? 아마 최단기 퇴출로 기록되긴 하겠지만 너도 일단 아카니스트였었잖아. 지혜를 보태줘."

"지혜를 보태달라고? 좆까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애초에 이 싸움은 너같은 얼라들이 낄 싸움이 아니니까 그냥 그린 아일랜드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대륙으로 튀어서 땅굴이나 파고 살아. 어줍잖은 공명심에 프록시마를 구하겠답시고 개죽음 당하지말고 새끼들아."

"라고 하는데 뭐 솔직한 심정을 말하면 나도 그러고 싶군. 하지만 여기서 진실을 외면하고 도망치게 되면 우리 아나키스트는 통합정부때의 실수를 반복하게되. 리더 앞에서 이런 말하면 좀 그렇지만 결국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일은 뭐가 선이고 뭐 악인지 구분하지도 못한채 괜히 이리저리 훼방만 놓은셈이잖아. 그러니까 나 제이토크는 이렇게 주창하겠어. 녹색의 왕, 브리슬콘의 편에 서서 목숨을 걸고 카라스 의원이란 자를 저지한다."

"그건 네 탄생석 능력에 기반해서 내린 결론인가?"

"뭐 얼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반정도는 내 감이야. 에스파이더처럼 타고난 육감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트루노트의 탄생석 능력을 써오면서 알게 모르게 쌓인 추리능력을 총동원한 결과 녹색의 왕편에 서야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한가지 오해하지 말아야할 점은 그녀가 최선이여서가 아니라 차악이기 때문에 그런거니까 내키지않는 사람은 그냥 빠져도 좋아. 이건 겁먹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의 문제니까 말이야."

"새삼스럽게 무슨 가치관타령이야 우리가 히어로나 빌런중 어느쪽이냐 하면 빌런에 더 가깝다는건 공공연한 사실 아니였나? 그보다 저놈의 불새가 떨구는 불똥때문에 내 이글루가 다 녹아내릴 지경이거든? 에스파이더의 거미줄도 슬슬 한계인 것 같고 싸우려면 지금 빨리가서 아나키스트로서의 마지막 하루를 화려하게 장식해보자고."

아닌게 아니라 아이시클이 형성한 이글루는 어느새 두깨가 종잇장처럼 얇아져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럼 모두 참전하는걸로 하되 좀비걸Z는 내보내겠다. 딱히 전투의지도 없어보이고 애초에 이 세계의 주민이 아닌 그에게 프록시마의 운명이 걸린 싸움의 참전을 바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엔화이트, 번거롭겠지만 저녀석을 VIP 의뢰인이 있는곳으로 옮겨다 주고와라. 이곳 그린 아일랜드의 심처를 왔다갔다 할 수 있는건 너와 나 둘뿐이니까 말이야."

"하이하이. 후딱 갖다오겠습니다."

"아이코 이렇게 감사할때가. 이 은혜 잊지않겠습니다, 천우용성씨!"

나는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괜히 심통이 나서 리더를 본명으로 불러재꼈다. 하지만 리더는 살짝 움찔했을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않은채 전투준비에 나섰다. 다른 아나키스트 동료들도 워낙 급박한 상황을 앞두고 있다보니 VIP 의뢰인과 리더의 성씨가 같다는 사실에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모영이였다.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척 하는걸지도.

아무튼 천하의 옥사건이 무슨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받게되는 날이 오다니 실로 말세가 아닐 수 없었다. 이와중에도 본체인 나는 구미첩을 위시한 각종 박음직스러운 계집년들과 질펀하게 놀아나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울화통이 치미면서도 한편으론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본체와 분령은 본래 하나였다. 당연히 너가 나고 내가 너일진데 내가 나한테 질투심과 증오를 느끼다니 이게 정상적인 상황인가? 만약 이게 분령(分靈)이 완전히 독립적인 자아를 가지기 시작한 징조라고 한다면 왜 소울 아바타가 금술로 지정되어 왔는지 능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였다. 만약 이런 증상이 심화된다면 분령인 내가 무사히 본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해도 다시 본체의 일부가 되는 것을 거부할지도 몰랐다.

부디 그렇게까지 상황이 악화되질 않길 바랄뿐이지만 애초에 지금 상황에서는 분령이 무사히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지 자체가 미지수였다. 잡귀를 잡아먹는 새도 있는데 정령을 잡아먹는 새라고 없으리란 법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내가 이런저런 잡념에 휩싸여 있을때 나는 어느새 천우용진이 있는 해변가에 도착해 있었다. 이것참 신속, 정확한 배송이로구만.

"좀비걸 돌아왔구나!"

"자 그럼 난 이만. 언니, 오빠들 나중에 살아서 볼 수 있으면 또 보자고."

팟!

엔화이트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는지 슬픈 표정으로 작별인사를 건네며 사라졌다. 그에 반해 천우용진은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만사오케이인지 밝은표정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왔다.

"좀비걸 도대체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어. 아까 안전가옥에 있으면 잠깐 라디오를 엿들었는데 통합정부가 무너졌다느니 대통령이 비인도적인 실험을 자행했다느니 같은 이야기가 들려오는데, 차라리 하루하루 끼니걱정이나 하던때가 더 나았던 것 같아. 그때는 무료시식 코너에서 소고기라도 얻어 먹는 날엔 그렇게 기쁠 수 가 없었는데 지금은 뭘해도 공허해. 그토록 원하던 정부공인의 히어로까지 됐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걸까? 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천우용진님 혹시 내일 세상이 멸망해도 한구루의 사과나무를 심으라는 명언을 알고계십니까?"

"에? 그런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데?"

"아 참 그러고보니까 여긴 프록시마였죠. 제가 잠깐 착각했습니다. 아무튼 이 격언이 의미하는 바는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고달파도 묵묵히 자신이 해야할바를 이어나가자는 것. 그러니 천우용진님께서도 너무 혼란스러워하지 마시고 막간을 이용해 수련에 집중해보시는건 어떨까요? 명옥공을 한번 운공해보세요. 제가 바로 옆에서 봐드리겠습니다."

"으, 응."

천우용진이 내 입발린 말에 속아 넘어가 얌전히 명옥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속마음은 전혀 딴판이였으니 이번 기회에 최대한 영혼 회로의 심득을 얻어낸 뒤 그를 데리고 내륙으로 튀어서 VOT(Vaccine Of Things) 온라인 2.0에 접속할 요량이였던 것이다. 이른 바 프록시마 행성 손절 계획.

카라스 의원이 이기건, 브리슬콘 여신칼날단원이 이기든 상관없이 더 이상 이 행성에 머물러봐야 득될게 없으니 하루라도 빨리 본체로 복귀하겠다는 심산이였으니 사실상 천우용진의 생사따위는 이제 내 관심사 밖이였다. 그리하여 내가 마지막으로 영혼 회로의 심득을 얻기 위헤 좀비걸의 너덜너덜한 육체를 버리려는데 천우용진이 갑자기 비명을 내지르며 자세를 무너트렸다.

본디 명옥공은 내공이 아닌 영력을 수려한는 명상법의 일종이였기에 결코 주화입마따위에 걸릴 일은 없을터. 내가 더 자세히 그의 몸을 살피기 위해 손을 올리려는 순간 그린 아일랜드의 심처쪽에서 핵폭탄이라도 터진듯 어마어마한 굉음함께 빛덩이가 솟구쳐올랐다. 그리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예의 폭발때문이 아니라 분명 비어 있어야할 천우용진의 탄생석에 정체불명의 이방인 그러니까 루뚜뚜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심지어 그 루뚜뚜는 내 분령을 알아보고 말까지 걸어왔다.

'넌 뭐하는 루뚜뚜야 남의 뚜뚜루 탐내지 말고 어서 저리 꺼져! 아무리 지난 10년간 내가 콧에 봉인되어 자리를 비웠다지만 너같은 돌연변이가 탐낼만한 탄생석이 아니란 말이다!!'

'콧? 설마 COT를 말하는거냐?'

'그래 맞아. 덕분에 그릇에도 맞지않는 인간의 몸에 깃들어서 꿈별사탕도 먹지못하고 대부분의 능력을 억제 당하는 수모를 겪어왔지. 아니 SSS등급의 탄생석 능력, 플레인즈워커의 소유자이신 이 몸이 공간이동의 하위호환쯤 취급을 받는게 말이나 되냐고. 이제 마이 스위트 홈에 돌아왔으니 뚜뚜루한테 부탁해서 저 멀리 다른 차원으로 여행이나 다녀야겠어.'

"크으윽! 여행이나 다니고 있을때가 아니야! 지금 형이 위험에 처했으니까 당장 구하러 가야해!!"

"천우용진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설명하자만 길지만 잃어버렸던 기억의 일부를 되찾은 것 같아, 좀비걸 아니 옥사건. 그래 맞아. VOT 온라인 속에 있는 네 본체를 내 탄생석 능력으로 프록시마에 데려오면 지금의 위기를 타파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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