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5 Oxygan the Close Beta Test
선우매향의 폭탄선언에 주위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어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어머어머 설마 좀비걸양은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란걸 몰랐던건가요? 만약 그런거라면 제가 괜한 이야기를 꺼낸셈이네요. 이걸 어쩐담. 세상에는 그냥 모르고 사는편이 좋은 진실도 있는법인데 말이죠. 아 참 그리고 좀비걸양은 히어로나 사이드킥이 되기전에 건강검진부터 받는게 좋을것 같아요. 제가 안기청 입구에 설치된 열화상 카메라를 잠깐 본적이 있는데...
"거기까지. 시덥잖은 연극은 집어치우지. 나와 너 둘 다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인가요? 연극같은게 아니라 저는 진심으로 좀비걸양의 건강이 걱정되서 그러는것 뿐인데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거짓말을 늘어놓는 선우매향앞에서 나는 보란듯이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어던졌다. 화상때문에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형체를 찾아볼 수 없을정도로 문드러진 눙동자가 안그래도 고즈넉한 야경을 한층 더 공포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피차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있을뿐 진짜 정체는 한없이 괴물에 가까운 존재아니던가? 무의미한 탐색전에 시간낭비하지 말고 그냥 각자의 소속을 밝히는게 어때?"
"흐으음? 제 소속은 통합정부 안전기획청입니다만? 좀비걸양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네요."
"그럼 내가 한번 맞춰볼까? 너 판데모니엄 소속이지?"
일전에 청장 환웅연우가 부청장에 관한 타로카드점을 쳤을때 [깃털:Feather]과 [악마:Demon] 카드가 뽑혔던걸 기억해낸 내가 못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질문을 던졌다. 솔직히 내가 질문을 하고도 큰 기대는 없었는데 선우매향의 미소 가득한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지더니 갑자기 불길한 아우라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한때는 거기에 몸 담고 있던 시절도 있었죠. 하지만 이제와서는 빛바랜 추억이 됐을뿐... 아니 솔직히 말하면 절대 떠올리고 싶지않은 트라우마 가득한 기억인데 이 썩다만 시체같은 년이 함부로 입을 놀리기는! 아냐, 아냐 나는 이제 판데모니엄의 군주들조차 벌레처럼 굽어보시는 위대한 분의 슬하에 들어갔으니까 괜찮아.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날 혼혈이라고 무시했던 악마놈들을 벌레처럼 밟아죽일 수 있어.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자, 참아 하피뇽! 하지만 그전에 저 썩을년부터 벌레처럼 밟아죽이고!! 내가 이 연극을 위해서 십몇년을 고생했는데 이제와서 너 따위가 가면을 벗으라니 마니 어깃장을 놓는거야!!!"
투둑, 투둑!
사실 선우매향을 도발할 생각따윈 없었지만 판데모니엄 소속이라는 사실 자체가 그녀의 역린을 건들였는지 어쨌는지 사태가 급변했다. 대노한 그녀의 어깻죽지에서 악마 특유의 박쥐날개가 아닌 천사 특유의 깃털날개(다만 색깔은 순백색이 아닌 연갈색이였다)가 튀어나옴과 동시에 이마에서는 트리케라톱스를 연상캐하는 큰뿔 하나, 작은 뿔 두개가 솟아올라 맹렬한 마기를 뿜어냈던 것이다.
일찍이 내가 천우용진의 단칸방에서 선우매향을 처음만났을때 느꼈던 그 미증유의 불안감이 선명하게 실체화된 느낌. 하여 나는 이렇다할 반응도 하지 못한채 목을 붙잡혔고 그녀는 마치 닭의 모가지를 비틀듯 내 목뼈를 바스라트렸다. 우드득! 물론 좀비의 몸인 내게 이 정도 부상은 부상이라고 할 수 도 없었으나 문제는 뿔을 매개체로 봇물처럼 마기가 쏟아져나와 내 몸을 침식하고 있다는 점이였다.
본래 어둠의 정령왕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둠의 정령왕자쯤은 되는 분령(分靈)이니까 버티는거지 보통의 인간이였다면 육체는 둘째치고 마기가 정신을 침투해 그대로 미쳐버렸으리라. 그렇게 내가 어둠의 정령왕자로서의 힘을 십분 활용해 마기침식에 저항하는데 본모습을 드러낸 선우매향이 갑자기 화들짝 놀라 내 목을 놓아주었다.
내 눈을 찌를듯 했던 삼각뿔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숨통이 트인 내가 뭔가 싶어 사위를 살피니 일전에 보았단 갈색피부의 절세미남 히어로, 백리몽룡이 한손엔 샴페인을 다른 한손엔 꽃다발을 든채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정상인으로 돌아온 선우매향은 뭐가 그리고 불안한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갑자기 병주고 약주고도 아니고 내 어긋난 목뼈를 원위치시키는 한편 선글라스와 모자까지 주서와 착용시켰다.
"부청장님 어디계시나 했더니 여기 계셨군요. 정말이지 한참 찾았습니다. 히어로 협회 창립파티의 주최자분께서 자리를 이렇게 오래 비우시면 어떡합니까? 어서 돌아와서 멋진 건배사 부탁드립니다. 모두 술은 입에도 못되고 안주나 축내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그런데 거기 계신 분은 누구...?"
"아, 아까 낮에도 보셨겠지만 예비 히어로 아니 예비 사이드킥이신 좀비걸양이에요. 숙소로 복귀하다가 길을 잃은것 같아서 제가 찾아주고 있는중이랍니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져서 그런가 돌부리를 못보고 넘어진 모양이에요. 의무청에 잠깐 데려다 주고 올테니 다른 예비 히어로분들에게는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전해주시겠어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고요? 흐으음. 확실히 멀리서봐도 상태가 안좋아 보이긴 하군요. 그렇다면 그냥 저희는 신경쓰지 마시고 좀비걸양을 잘 케어해주세요. 당장 내일부터 히어로 자율방범순찰을 나갈텐데 거동이 불편하면 아무래도 곤란하지 않겠어요? 아 그리고 이 꽃다발은 제 작은 선물입니다. 본래는 샴페인도 같이 따려고 했는데 이건 그냥 다른 동료들이랑 마셔야겠어요."
자신이 있던 자리에 꽃다발을 놓고 조용히 떠난 백리몽룡을 망부석마냥 하염없이 지켜보는 선우매향. 그리고 그걸 바로 곁에서 지켜보던 나는 뭔가 미묘한 기류를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몸안에 잔류한 녹진한 마기를 소정령 내부로 조용히 흡수시켰다. 오호라, 이거 꽤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잖아?
* * * *
"함께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레이디. 그러니까 사이드킥 이명이 좀비걸양이라고 하셨나요? 먼저 차에 오르시지요."
달칵.
나는 갑을 관계로 따지면 을에 해당하는 사이드킥에게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백리몽룡을 흘낏 쳐다봤다가 말없이 순찰차에 올랐다. 어제의 해프닝(?)으로 목깁스신세를 지게된 나였지만 실은 이미 공기중에서 추출한 변이에너지를 활용해 자가치료를 끝낸 상황이였기에 무리 없이 착석할 수 있었다.
사실은 그래서 목깁스도 그닥 필요없는 상황이였으나 백리몽룡이 꽃다발을 두고간 후로 무슨 귀신에 씌이기라도 한것처럼 다시 부담스러울정도로 친절한 부청장 모드로 돌아간 선우매향이 어찌나 성화를 부리는지 원. 누가보면 내가 정말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목뼈가 부러진줄 알겠어.
그건그렇고 나를 천우용진이 아닌 백리몽룡과 페어로 짝지어준건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군. 나는 내심 백리몽룡의 사이드킥이 되고 싶어 안달나 있던 예비 여성히어로들의 쏟아지는 눈총과 몸매 좋고 귀염상에 붙임성 좋은 사이드킥과 짝이 되어 얼굴을 붉히던 천우용진을 떠올리곤 혀를 끌끌찼다.
하긴 나같아도 그런 사이드킥과 짝이되면 순찰을 핑계로 어디 해변가 드라이브나 다니다가 헤어질때쯤 어디 으슥한데서 카섹스로 마무리를 짓겠지만 지금이 어떤 상황이던가? 말이 히어로 협회지 사실상 호랑이 아가리속에 머리를 들이민거나 다를바 없는 상황일진데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천우용진은 아직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이였다.
"어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생긴 상처는 잘 치료하셨나요?"
"그럭저럭."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설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걸로 목뼈를 다치셨을줄은 몰랐네요. 뼈가 완전히 붙을때까진 제가 잘 서포트 해드릴테니 너무 부담갖지마세요."
"글쎄. 재수가 아무리 없다손 쳐도 너만할까?"
나는 걸핏하면 갈색피부와 대비되는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 빌런 대신 여심을 사냥하려하는 백리몽룡에게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많은 예비 여성히어로들이 그와 짝이 되지 못해 울음을 터트리기까지 했고, 지금 이 순간도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사인을 받으려 주위에 얼쩡거리는 여학생들까지 있었지만 내게는 그저 존나게 재수없는 새끼라는 인상만이 박혀 있을뿐이였다.
"후후후. 우리 좀비공주님께서 뜻하지않게 부상을 입고 많이 화가나셨나보군요. 뭐 이해합니다. 저도 뜻하지 않게 큰 부상을 입고 굉장히 낙담했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한번만 더 좀비공주니 뭐니 하는 말을 지껄이면 고가도로에서 풀악셀을 밟아주지. 너도 목깁스 신세가 되고 싶은게 아니라면 입닥치고 그냥 얌전히 운전이나 해!"
"이런이런, 진짜로 그럴까봐 무서워서라도 안전벨트를 꼭 착용해야겠군요. 하는 김에 좀비걸양의 안전벨트도 채워드리죠."
철컥!
본래 심성이 착한 사람이 들어도 기분이 나쁠만한 모욕적인 언사에도 백리몽룡은 특유의 미소를 잃지않으며 안전벨트까지 메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이게 무슨 개지랄인가 싶었지만 더 이상 그와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시동이 걸릴때까지 얌전히 침묵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