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5 Oxygan the Close Beta Test
주섬주섬.
정말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군. 나는 티호크가 찢어버린 좀비걸Z의 마스크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처음 에스파이더가 용진이의 경호를 맡고 돌아온 아이시클이 뭔가 이상한걸 달고 왔다고 했을때는 그저 장난인줄 알았다. 그저 그 나이대의 남자 애들이 으레 그렇듯 좋아하는 이성에게 관심을 끌기 위한 개수작인줄 알았건만 진짜 귀신이 달라붙어 있었을 줄이야.
그것도 귀신을 붙인 장본인이 프록시마로 따지면 지옥의 청장쯤 되는 인사라니 영화나 애니메이션보다도 더 판타스틱한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상대가 탄생석 능력이 아닌 미증유의 힘을 다룬다고 해서 무작정 그 이야기를 믿을순 없는 노릇. 하여 나는 진즉에 아지트의 도청기와 연결된 무전기를 제이토크에게 건네 모든 상황을 전해듣게 하였다.
그의 탄생석 능력인 트루노트(True Note)를 살펴보면 완벽하진 않아도 대강의 진실은 파악할 수 있으리라.
"제이토크 다 듣고 있었겠지?"
-아아, 물론이지. 지금 바로 트루노트에 적혀진 수정안을 들려줄테니까 너무 놀라지나 말라고. 일단 그 좀비걸Z라는 자의 정체는 지옥의 송제시왕같은게 아니야.
"어쩐지 너무 허황된 이야기라고 생각은 했다. 그래서 지옥이니 송제시왕이니 하는 이야기는 모두 즉석에서 지어낸 허구의 이야기라는건가?"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은게 트루노트에 적힌바에 따르면 그는 송제시왕은 아니지만 송제시왕을 살해한 존재라고 되어 있어. 즉 한빙지옥을 관리하는 송제시왕의 존재자체는 실제한다는거지. 그리고 염라대왕 그러니까 프록시마로 따지만 지옥의 대통령으로부터 받은건 특별임무가 아닌 특별한 부채라는군. 트루노트의 한계때문에 그 특별한 부채가 정확히 어떤건지는 알 수 없겠지만 무려 지옥의 최고 우두머리로부터 받은 물건이니 보통 부채는 아니겠지.
빠직!
젠장할, 상황이 정리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 복잡해졌잖아! 제이토크의 탄생석 능력인 트루노트는 사용자가 자신이 들은바를 무의식적으로 받아적었을때 그 내용을 자동으로 진실로 바꿔주는 것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속 아주 깊은곳에 숨겨둔 내밀한 비밀까지는 알아내지 못한다해도 일단 입밖으로 튀어나온 얘기는 어떻게든 진위를 가릴 수 가 있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상대가 정말로 지옥에서 올라온 존재였다니! 물론 디테일한 부분에 있어선 거짓말이 다소 섞여 있긴 했다. 허나 송제시왕이란 자를 살해하고 염라대왕으로 부터 특별한 부채를 받았다는 두가지 사실을 종합해봤을때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은 하나, 그 좀비걸Z란 존재는 일종의 쿠데타를 통해 송제시왕의 자리를 빼았고 그걸 지옥의 최고 우두머리인 염라대왕으로부터 인정받았다.
프록시마같았으면 도덕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절대 용납되지 않을 행동이겠지만 지옥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생각한다면 도리어 자연스러운 찬탈 행위였다. 그리고 왕씩이나 되는 존재가 저승사자를 냅두고 친히 이승으로 행차한것도 그렇게 쿠데타로 획득한 불안정한 지위를 공고히 다지기 위함이라면 앞뒤가 맞아 떨어진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제한된 정보를 기반으로 한 가설에 불과했기에 실제로 무슨 내막이 숨겨져 있는가는 오직 좀비걸Z 본인만이 알터. 허나 어찌됐든간에 정부의 인간통합실험을 막기 위해서라면 지옥의 사이탄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내 각오는 진심이였기에 그녀가 최대한 아나키스트의 멤버로서 협조해주길 바랄뿐이였다.
-이봐 리더 여러가지로 생각이 복잡할때 미안하지만 급보가 들어왔어. 아이시클이랑 교대로 VIP 의뢰인을 감시하던 피타입한테 들어온 보고인데... 그 아무래도 VIP 의뢰인이랑 좀비걸Z가 안기청에 끌려간 것 같아.
"잠깐, 뭐라고!? 더 자세히 설명해봐, 제이토크!! 설마 좀비걸Z가 아나키스트에 가입하자마자 배신을 한건 아니겠지?"
-처음엔 나도 그쪽을 의심했는데 만약 정말 그녀가 배신했다면 당장 우리 아지트로 안기청 요원들이 들이닥쳐야지 그저 자금출처중 하나일뿐인 VIP 의뢰인만 팔아넘긴다는건 조금 이상하지 않아? 애초에 그녀의 능력이면 언제든지 우리 멤버들의 감시를 피해 의뢰인을 납치하는게 가능했을텐데 말이야. 아무래도 뭔가 수상해. 마침 피타입이 현장에 나가 있으니까 한번 잠입을 시도해볼까? 리더는 어떻게 생각해?"
"다른 부서라면 모를까 안기청은 아무리 피타입이라도 위험해. 일단 아지트로 복귀하라고 전하고 추후 상황은 좀비걸Z를 통해 듣도록하지. 그녀가 정말 배신한게 아니라면 이중스파이 역할을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만에 하나 좀비걸Z가 이미 배신했거나 혹은 앞으로 배신할 가능성을 생각해서 이 아지트는 버린다. 제이토크 네가 주도해서 자료소각하고 해산명령 내려. 나는 따로 할일이 있어 먼저가보겠다."
콰직!
지시를 마친 나는 도청기겸 수신기 역할을 하는 차임벨을 박살 내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이토크 앞에서는 태연한척 굴었지만 용진이가 안기청에 납치됐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최대한 정보를 숨기기 위해 호적을 말소하고 같은 아나키스트 멤버들에게도 진실을 숨겼건만 설마 안기청놈들이 용진이가 내 형제라는걸 눈치챈건가?
아냐 그럴리가 없어! 그냥 우리 행적을 쫓다가 얻어걸린거겠지. 그렇다면 과민반응하기 보다는 기다리는게 답이다. 하지만 만약 놈들이 우연이라도 용진이를 인간통합실험에 참가시키려 하는거라면 그때는...
* * * *
"우리 안전기획청의 요청에 따라 히어로 협회에 참가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에 그러니까 다음은..."
"제가 분명 오늘 아침에 브리핑 자료를 올려드렸을텐데요. 그게 몇줄된다고 버벅거리시는건가요, 청.장.님!"
"미, 미안하네. 선우매향양. 나도 나이가 있다보니 노안이 와서..."
"그러면 달달 외워서라도 말끔하게 브리핑을 하셨어야죠! 나라의 녹봉을 받아먹고 사시는분이 이리도 나태해서야 원."
나는 계급상 분명 우위에 있음에도 부청장에게 잡혀사는 초로의 노인을 동정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다 주위를 다시 한번 살폈다. 히어로 협회라는 미명하에 전국구에서 S급 탄생석 능력자들이 모였다곤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이렇다할 임팩트가 느껴지는 인물은 단 한명도 없었다.
안기청 부청장인 선우매향에게서 본체도 경시 못할 포스를 느꼈기 때문에 안전기획청 청사 를 목전에 두었을때만 하더라도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기분이였거늘, 막상 건물 내부로 들어오니 당장 안기청 청장부터가 평생 서류작업만 해왔을것 같은 샌님이 아닌가?
물론 누군가는 현장일을 할때 누군가는 행정처리를 해야하니 모든 안기청 요원들이 싸움꾼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뭔가 분위기가 시골 동사무소같은게 막말로 선우매향 부청장 한명이 안기청 전체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것 같았다. 물론 그런 무력 다툼이 아니더라도 이미 안기청의 모든 실권을 그녀가 장악하고 있는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눈이 안좋으시면 청사 건물 뒷편 텃밭에 당근 농사라도 지으시던가요! 그러면 브리핑은 제가 이어서 하겠습니다. 자 여기 있는 전도유망한 젊은이분들에게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소 편차가 있긴 하지만 평균 A랭크 이상의 엘리트 탄생석 능력자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홀로 혹은 무리지어 자율방범 활동을 해왔다는 점이죠. 하여 저는 이 정의로운 친구들에게 물적, 인적 자원을 아낌없이 투자해 통합정부의 촘촘하지 못한 치안망의 구멍을 메우려고합니다.
이 영상을 한번 봐주시죠!"
쾅!
선우매향이 고장날게 무섭지도 않은지 최신식 빔프로젝터를 강하게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렇게 스크린상에 비쳐진 영상은 일전에 천우용진이 마주했던 학교폭력이나 암중에서 조직폭력배들과 뒷거래를 하는 유흥업소와 관련된 사진등을 파노라마처럼 나열하고 있었다.
명백히 불법이지만 아슬아슬하게 법의 경계선상을 넘나들며 처벌을 피하는 범죄의 온상들. 이런걸 보면 프록시마도 지구와 다를바 없는 아니 탄생석 능력의 존재때문에 오히려 더 괴상한 범죄가 난립하는 사람냄새(?) 나는 곳이였다. 아무튼 선우매향은 마치 자기가 그런 범죄(물론 안기청 부청장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를만한 간큰 인간은 없겠지만)를 당하기라도 한듯 감정을 몰입해 열변을 토해냈다.
그리고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붙여 말이 길게 늘어졌지만 요는 이거였다. 정의를 지켜야할 법이 도리어 소년법이니 함정수사 금지법이니 같은 굴레를 만들어 오히려 악을 방치하고 있으니 너희들이 나서서 초법적 징벌을 행사해라. 뒤는 우리 안기청이 봐주겠다.